◈ 156화
포훔으로 돌아온 칸은 천천히 떠날 준비를 했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 이미 방향은 정해져 있다. 마무리만 확실하게 하고서 떠나면 된다.
"커트린."
"네, 넵!"
"온건파 측에서 돌아온 연락은 없었나?"
지금 칸은 남몰래 커트린의 사저를 찾아왔다. 미리 사람을 물려두라 일러뒀기에 그 흔한 사용인 하나 보이지 않았다.
"고, 곧 도착한다는 연락은 받았어요. 구체적인 결정 사항은 없었고요오····."
커트린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칸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회담 준비는 철저하게 해야 할 거야."
칸은 회담을 언급하고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지금 말하는 회담이란, 온건파와 나눌 회담을 뜻했다.
며칠 전의 대회의에서 포훔 시의회는 온건파로 전향할 것을 천명했고, 빠르게 움직여 회담 약속까지 잡았다.
강경파 수뇌부가 인외종과 밀약을 맺었다는, 아주 확실한 명분이 있었기에 이견은 나오지 않았다.
해당 안건은 만장일치로 통과. 그 이후로는 회담에서 어떤 것을 논할지에 대한 논의가 여러 차례 진행됐다.
"아예 항복한다는 느낌으로 저자세를 취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지. 태도를 확실하게 해야 해."
"그 부분은 걱정 없어요. 던져줄 희생양이 있으니까요."
커트린이 말하는 희생양은 구 보르달로스 계파를 뜻했다. 한때는 그녀의 동료였던 드워프들.
하지만 이제는 그저 죄수일 뿐이다. 지금 그들은 지하 감옥에 갇혀 처벌을 기다리고 있다.
운이 좋으면 점잖게 교수형, 재수가 없으면 끔찍한 처형을 선고받을 것이다. 드워프의 형벌은 매우 살벌한 편이니까.
"온건파 사람들이 도시에 방문하고 나서 형을 집행할 생각이에요. 대광장은 미리 치워 뒀으니까 별 문제는 없겠죠."
커트린은 구 보르달로스 계파를 보여주기식으로 사용할 생각이다. 대중의 시선을 이쪽으로 끌고올 필요가 있다.
이번 처형에서 중요한 점은 아주 자연스럽게 선악(善惡) 구도를 만드는 것이다.
인외종과 내통한 구 보르달로스 계파. 그리고 그 사악한 놈들을 처벌하는 포훔 시의회와 온건파.
그런 구도만 완성할 수 있다면, 시민 사이에서도 큰 반발은 없으리라 예상한다.
온건파에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 악의 세력을 벌하기 위해 정의로운 편에 합류한다는 느낌을 풍기는 게 목적이다.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흘렀을까.
"왔다! 온건파의 군대가 왔다!"
포훔의 외곽에서 온건파의 깃발이 흩날렸다.
***
놀랍게도 이번에 포훔으로 찾아온 온건파 인사는····
"짧은 시일 내에 또 만나서 기쁘군, 친구여."
벨마르였다.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던 칸은 이내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 이번 사안은 보통 일이 아니지.
때마침 벨마르가 무역도시 트랑켄슈타인에 머물고 있었을 테니까, 이리로 군을 몰아오는 것에 무리도 없었을 것이다.
"앞으로도 자주자주 보자고."
현재 시각은 늦은 저녁. 두 사람은 남몰래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낮에 있었던 회담에는 칸이 참석하지 않았다. 칸에게 어떤 공식적인 직책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광업도시 포훔이 자의적으로 온건파에 합류한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외부에 비치는 시선도 중요했으니까.
"또 한 번 거하게 사고를 치셨어. 이런 식으로 포훔을 박살 낼 생각이었으면, 진즉에 언질 좀 주지 그랬나."
"전부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벌어진 일이오."
칸은 손상된 성벽에 걸터앉아 벨마르의 말을 받았다. 도시 곳곳은 아직 수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온건파와의 회담을 준비하느라 이런 쪽으로 행정력을 돌릴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도시 내부를 보수하는 게 우선이기도 하고.
한 차례 성벽을 쓸어내리며 칸이 뒷말을 뱉었다.
"그리고 이렇게 본격적으로 포훔을 접수할 생각도 없었소."
"이거야 원, 누가 보면 우리가 연계해서 움직이는 줄 알겠군. 현실은 내가 자네의 똥이나 닦는 느낌이거늘."
벨마르는 칸의 옆에 똑같이 궁둥이를 붙이며 말했다. 실실 웃음이 새어 나온다.
"웃지나 말고 그런 말을 하시오. 그게 똥 치우는 사람 얼굴이오? 입이 아주 귀에 걸리셨구만."
"크큭, 사방이 어둠인데 내 얼굴이 보인다고?"
"안 보여도 다 아는 수가 있소."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언제 챙겨왔는지 모를 술잔을 벨마르가 칸에게 내밀었다.
칸은 큰 의심 없이 들이켰다. 오늘은 과일주였다. 무난하게 드워프식 맥주일 줄 알았는데, 나름 신경 좀 썼나 보다.
"사실 자네의 똥을 받아먹는 게 그리 나쁘지는 않아. 으음, 이를테면 황금똥이라고나 할까?"
"····기분이 좀 이상하오만."
"아무튼 칭찬이야. 적당히 걸러서 듣게."
똥을 붙이기는 했지만, 최근 칸의 행보는 그야말로 황금이 맞았다. 적어도 온건파에게는 그랬다.
"오늘 회담에서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아나?"
"모르오. 회담과 관련해서는 전혀 개입하지 않았소."
칸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 회담은 커트린을 비롯한 포훔 시의회에서 전담했다.
회담장에 참석하지도 않은 칸이 그 내용을 알 턱이 없다. 다만, 대충 포훔 시의회가 어떤 내용을 준비했는지는 알고 있다.
필수적인 요구 사항, 숙이고 들어갈 부분, 내줘야 할 부분, 그 외 등등.
전부 사전에 보고받았다. 개중에 무리한 요구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포훔 시의회는 주제 파악을 아주 확실하게 하고 있다.
이번 회담이 틀어지면, 포훔의 위상이 땅에 떨어질 것이다.
'인외종과 붙어먹은 도시'라는 별명이 새롭게 생길 테니까.
그리고 만약에 회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온건파가 도시를 공격하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도시의 존립 자체를 걱정해야 한다. 지금처럼 도시 기능이 망가진 상태에서는 온건파에 대항할 수 없다.
"일단 포훔 근처에 우리 온건파의 전진기지를 건설하기로 했네."
벨마르가 신나는 웃음을 허공에 흩뿌리며 말문을 연 것은 그때였다.
"그리고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천천히 해방하기로 했지. 인원이 많은 곳부터 순차적으로."
"잘한 일이오. 한 번에 풀리면 분명 혼란스러울 거요."
칸은 술잔을 홀짝이며 벨마르의 목소리를 귀에 담았다.
"포훔이 공식적으로 온건파에게 합류하는 것을 대외에 천명하는 것도 약속했다네."
그건 아주 기본적인 조건이다. 온건파 측이 바보 천치가 아니라면, 무조건 뜯어내야 할 요구 사항.
상황 자체가 온건파에게 너무 유리했다. 포훔은 온건파의 깃발 아래로 들어올 수밖에 없다.
"앞으로는 포훔을 어떻게 지킬지 생각해야겠군."
"빨리 군대를 파견하는 게 좋을 거요."
"무얼, 이미 나와 함께 온 군대가 있거늘. 당분간은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해."
어쨌거나 회담과 관련된 얘기는 여기까지. 칸은 잠시간 침묵을 지키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이걸 써야 할 일이 생겼소."
그리고 적당한 때에 품에서 금화 한 닢을 꺼내며 운을 뗐다. 일전에 트랑켄슈타인에서 벨마르에게 받았던 금화다.
칸의 이름을 무단으로 사용한 것에 대한 대가. 벨마르가 칸에게 큰 빚을 졌다는 증표.
벨마르는 달빛에 비치는 금화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생각보다 빠르게 사용하는군. 그래, 말해 보게나. 나도 자네가 뭘 원하는지 궁금해."
"먼저 묻겠소. 이 금화의 한도가 어느 정도요?"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들어주겠네."
벨마르의 확답에 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곧바로 말문을 열었다.
"내가 뒷배를 봐주기로 한 식인거미 부족이 있소."
벨마르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자, 잠깐! 뭐? 식인거미의 뒤를 봐준다고? 자네가?"
"사정이 생겼소."
밤하늘에 총총히 빛나고 있는 별무리를 바라보며 칸은 그 사정이 뭔지 설명했다.
벨마르는 칸의 설명을 조용히 귀에 담았다. 이윽고 그 설명이 끝에 다다랐다.
"어쨌거나 그들은 양지로 올라와서 다른 지상 종족처럼 살고 싶다더군. 인육을 즐기는 문화도 없고, 외관은 일반 사람과 비슷하오."
"종종 인간과 비슷한 외관을 지닌 식인거미도 보이기는 하네만····."
벨마르는 옛 기억을 더듬으며 말끝을 흐렸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인육을 즐기지 않는다는 말은 별개야. 지금 당장 증명할 방법이 없지 않은가."
"나중에 천천히 검증하면 될 일이오."
그렇게 말한 칸은 두 눈을 끔벅이며 벨마르를 돌아봤다. 어둠 때문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렴풋이 움직임 정도는 인지할 수 있다. 벨마르는 손가락을 움직여 제 얼굴을 가리켰다.
"설마 나더러 그 검증을 대신해 달라는 건가?"
"검증 자체가 용건인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부탁할 일에 검증이 포함돼 있을 수는 있소."
태연하게 대꾸한 칸이 벨마르의 손에 금화를 쥐여 줬다.
"벨마르 당신도 그 부족을 비호한다고 선언하는 것. 그게 내 요구요."
"·····."
"나 혼자서 지지하는 것보다야 그편이 훨씬 낫겠지. 우리 둘이 지지한다는데 그 누가 방해할 수 있겠소?"
벨마르는 마치 몸이 굳기라도 한 것처럼 멍하니 있기만 했다. 칸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온건파가 그들을 품어 주시오."
"····이번 똥은 좀 상당히 지독하군."
"힘들면 지금 바로 말하시오. 부탁을 철회할 테니."
칸은 강요할 생각이 없었다. 만약 벨마르가 난색을 표한다면, 적당한 선에서 금화를 사용할 생각이다.
"아니, 철회할 필요는 없네."
벨마르가 마시던 과일주를 성곽에 툭 내려놨다.
"수락할 거야. 하지만 검증을 진행했을 때, 인육을 즐기지 않는다는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때는 내가 먼저 나서서 그들을 응징하겠소."
이어지던 말을 중간에 자르며 칸이 말했다. 그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것은 단호함. 듣기만 해도 서늘해지는 목소리다.
"그래서 그 부족의 이름은 뭔가?"
"투아 부족. 그리고 참고로 말하자면, 그들의 종족명은 이제 식인거미가 아니오. 내가 새로운 이름을 선물했소."
벨마르는 정수리를 긁적이다가 헛웃음을 토했다.
"허!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는가 보군. 그래서 그 새로운 종족명은 뭔가?"
"아라크네. 그 부족에 한해서는 그렇게 부르면 되오."
벨마르 입장에서는 이건 정말 상상조차 못 할 얘기였다. 식인거미에게 작명이 다 뭔가, 그냥 쳐죽이기도 바쁜데.
"아마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눠 보면, 단장도 그리 나쁜 인상을 받지는 않을 거요.
그렇게 말문을 연 칸은 나머지 설명을 덧붙였다.
"양지로 올라온다는 게 거짓 같지는 않았거든. 애초에 식인거미들 사이에서 차별을 받던 부족이오. 아주 악이 잔뜩 올라와 있었소."
"그게 다 연기일 수도 있어."
벨마르의 말에 잠시간 설명이 끊겼다. 하지만 칸은 개의치 않았다. 그저 과일주 한잔을 들이켜고서 다시 말할 뿐이다.
"말했지 않소, 나를 속인 거라면 직접 응징할 거라고.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시오. 그리고 온건파에서도 아라크네를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거요."
그게 대체 뭔 소리야? 벨마르는 아라크네 부족을 어떻게 이용해 먹을지 생각해 봤다.
일단은 확성기 역할. 이건 좀 애매했다. 강경파와 인외종 사이의 밀약은 포훔 시의회를 통해 퍼트리면 된다.
아니지, 사실 수용도시 포훔 자체가 일종의 증거라고 보면 된다. 그 안쪽에 갇혀 있던 타종족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한 벨마르는 제 머리칼을 거칠게 헤집고서 질문을 던졌다.
"당최 모르겠군. 대체 놈들을 받아들여서 뭘 어떻게 써먹겠다는 건가?"
"대통합이오."
"···뭐?"
칸의 입에서 나온 단어가 벨마르를 관통하고 지나갔다.
"최고의 화합. 단순히 양지에 사는 종족뿐만이 아니라, 인외종마저 품어내는 위대한 업적."
"······."
"그런 대통합을 이뤄낸다면 당신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드워프 군주로 이름을 올리게 될 거요."
살살 흔들리는 벨마르의 수염. 밤바람 때문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
수염 아래에 자리한 얼굴 근육이 제멋대로 씰룩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듣기 좋은 말이었다.
"커흐흠! 듣기에는 좋은 말이야. 하지만 괜한 욕심 때문에 기존 세력의 분열을 초래할 수도 있네."
"위대한 업적을 날로 먹어서야 되겠소? 그 정도 정치력은 있어야지."
"····날로 먹다니. 거참 말이 심하군그래."
칸은 성곽에서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벨마르 또한 다급히 일어나 그 뒤를 따랐다.
"용광로를 만든다고 생각하시오."
"뜬금없이 뭔 용광로?"
"온갖 잡다한 철을 모아다가 시뻘겋게 녹이는 물건이 용광로잖소."
칸은 얼굴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 용광로처럼 모든 종족을 녹여 보라는 말이오. 온건파라는 그릇 안에."
사실 이건 지금 막 떠오른 생각이다. 그 왜, 전생의 지구에 인종의 용광로라고 불렸던 국가가 있지 않았던가.
본명은 미국이요, 인터넷에서는 천조국이라는 별명을 지녔던 국가 말이다. 국방에 쏟아붓는 예산만 1,000조 원이라나 뭐라나.
아무튼 그런 패권국조차도 여러 인종이 뒤섞이며 많은 병폐를 겪었지만····.
'당장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할 필요는 없지.'
지금은 벨마르의 웅심을 자극하는 게 먼저였다. 이미 딱 좋은 소재도 생각해 놨다.
지금까지 지껄인 것은 전부 그 소재를 위한 빌드업에 불과했다.
'어울려 진격하는 몰그렌.'
북부 최초의 통일 황제. 고대 앙그리만 지하제국을 이끈 25번째 드워프 군주.
드워프 종족사(史)에는 쟁쟁한 인물이 여럿 있지만, 그중 가장 저명한 사람을 꼽으라면 하나같이 '몰그렌'을 뽑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몰그렌을 상징하는 수식언에 '어울려'가 들어 있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몰그렌은 이전의 드워프 군주들과는 달리, 인간과 엘프를 적극적으로 등용한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북부에서 화합의 대명사로 뽑히는 것이고.'
칸은 곁눈질로 벨마르의 얼굴을 살폈다. 아마 벨마르도 머릿속으로 몰그렌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과거에는 통일 황제 몰그렌이 있었지."
"·····."
"벨마르 당신이라고 해서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은 없지 않겠소? 아니지, 인외종마저 품는다면 훨씬 더 위대한 군주가 되겠군."
조금만 더 하면 넘어올 것 같은 모습. 칸은 벨마르가 진실로 마음이 동해서 움직이기를 바랐다.
단순히 과거의 빚 때문에 억지로 돕는 수준에서 그친다면, 그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모름지기 세상 모든 일은 진심을 다했을 때 성사되는 법. 벨마르를 자극할 만한 목적지가 필요했다.
"이제 북부에도 지하제국의 진정한 계승자가 나올 때가 됐다고 생각하오."
그리고 지금 칸은 그 목적지를 제시하는 중이다.
"·····그런 말을 듣고서 가만히 있으면 사내가 아니지."
칸의 마지막 말에 벨마르는 한 차례 몸을 떨었다. 그러고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한번 해보자고!"
칸이 씨익 웃음을 흘렸다. 역시나 넘어왔다.
"대신에 자네도 감당해야 할 부분이 있어."
"말씀하시오."
"내가 자네의 이름을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것을 용납해야 할 거야. 동의하겠나?"
계속 걸음을 옮기면서 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단, 이번 건에 한해서만 그런 거요."
"그거야 당연하지."
한밤중의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칸은 도시 밖에 자리를 마련했다.
그 자리에 초청된 사람은 아라크네 부족의 키케르 여왕과 온건파의 벨마르 후락.
"서명합시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삼자(三者) 동맹'이 탄생했다. 세 사람은 망설임 없이 서명을 남겼다.
각자의 목적을 속에 품은 채로.
***
동맹을 결성하고서 칸은 곧바로 포훔을 떠났다.
"아, 조금만 더 했으면 아주 완벽하게 정제됐을 텐데·····."
조랑말에 올라탄 로젤린은 작게 푸념을 뱉으며 그 뒤를 따라야만 했다.
"가면서 하시오."
"그치만 한곳에 머물면서 연구하는 게 훨씬 편하다고."
"노예 주제에 불평이 너무 많군."
"·····다물면 되잖아, 다물면."
연구를 진행하던 로젤린 때문에 짐이 많이 늘었다.
하지만 꼭 필요한 것들만 챙기라고 했기에, 딱 조랑말 마빈이 감당 가능한 수준이었다.
칸은 곁눈질로 로젤린을 살폈다. 지금 로젤린은 색깔 귀걸이를 착용하지 않고 있다.
머리카락과 피부 색깔이 본인의 것으로 돌아온 상태.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와 완벽히 똑같지는 않았다.
'얼굴이 더 창백해졌어.'
이전에도 하얬던 로젤린이지만, 지금은 단순히 하얗다고 말할 수준이 아니다. 핏기가 아예 없어졌다.
게다가 눈 밑에는 진한 다크서클이 생겨났다. 음영의 농도가 갈수록 짙어지고 있다.
로젤린 본인의 설명에 따르면····· 저번에 섭취한 독단 때문인 것 같다고 하더라.
물론, 로젤린도 확신은 못하고 있다. 말 그대로 연구 중인 사항이니까. 그래도 딱히 어디가 아픈 것 같지는 않다.
'제 몸 상태를 모를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아니야.'
어쨌거나 로젤린의 변화는 피부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사실 더 큰 변화는 따로 존재했다.
그건 바로 머리카락. 물[水] 속성 마나의 영향으로 파랗게 유지됐던 머리카락이 서서히 청록색으로 물드는 중이다.
이 또한 독단의 영향이겠지. 어쨌거나 로젤린은 더 이상 색깔 귀걸이를 착용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일행은 언제쯤 오는 건데?"
"곧 마중을 나올 거요."
지금 칸과 로젤린이 서있는 곳은 인적이 드문 계곡.
로젤린의 물음에 칸이 막 대꾸했을 때, 계곡의 틈새에서 식인거미들이 줄줄이 튀어나왔다.
'아니지, 식인거미가 아니야.'
아라크네. 칸은 자신이 선물한 종족명을 떠올리며 그들을 바라봤다.
"칸 공!"
그리고 개중에 왕관을 뒤집어쓴 아라크네가 손을 번쩍 들어 인사를 보내왔다. 키르케 여왕이 직접 마중을 나온 듯했다. 그런데·····
"조심!"
어째선지 그녀의 등 뒤로 거대한 창날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