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병으로 살다-172화 (172/216)

◈ 172화

"····저는 누구를 죽이고 싶지 않아요."

포르모스의 선택은 그러했다. 평소의 성정을 생각해 본다면,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답이다.

칸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서려 했다. 하지만 아직 포르모스의 말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때로는 하기 싫은 일도 해야겠죠."

포르모스는 자신의 성격이 싫었다. 좋게 말하면 온화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유약하고 소심한 성격.

왜 이렇게 된 걸까? 과거 바포루에게 학대당해서? 아니면 그냥 타고난 성격이라서?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포르모스는 언제나 변화를 꿈꿨다.

'달라지고 싶어.'

포르모스의 시선이 바포루 쪽으로 옮겨갔다. 이미 실망할 대로 실망한 사람이지만, 바포루를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꼭 바포루여서 이러는 것은 아니다. 그냥 누군가를 죽인다는 행동 자체가 무서웠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지금 포르모스는 살의를 느끼고 있다.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싶다. 유약한 성격을 죽이고 싶고, 학대에 굴복했던 나날을 죽이고 싶다.

"···제, 제가 직접 할게요."

포르모스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언제 빼 들었는지 모를 단검이 녀석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나름 긴 여정을 떠난답시고 아발론 왕국에서 처음 출발할 때 챙긴 물건이다.

탄생하고 단 한 번도 피를 묻힌 적 없는 날붙이. 그 창백한 빛깔은 어째선지 포르모스의 얼굴과 꼭 닮았다.

"직접 해야만·····."

달라질 수 있어.

포르모스는 뒷말을 삼키며 숨을 몰아쉬었다. 묵직하고 서늘한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분명 작달막한 단검일진대, 어찌 이리도 무거운 것일까. 들고 있기가 버거웠다.

"····해야만 한다고."

어느새 독백으로 바뀐 목소리. 동굴처럼 좁아진 시야 속에서 포르모스는 정면을 응시했다.

오직 바포루만 보였다.

밥을 굶기던 바포루, 채찍을 휘두르던 바포루, 주먹으로 때리던 바포루, 목을 졸랐던 바포루.

"···바포루."

그 모든 것이 바포루다.

숨이 거칠어졌다. 자연스레 몸도 떨렸다. 그 동요를 감추기 위해 포르모스는 일부러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쿵!

한 걸음, 쿠궁-!

내딛는 걸음마다 심장 박동이 격렬하게 호응했다. 시야에 들어오는 바포루의 얼굴도 점점 커졌다.

이제 남은 것은 딱 다섯 걸음. 포르모스는 손에 힘을 주며 마음을 다잡았다.

"포, 포르모스! 이러지 마라!"

다시 한 걸음 앞으로.

"살려줘! 살려달라고!"

또다시 한 걸음 앞으로.

"정신 좀 차려! 새꺄! 너 사람 죽여본 적도 없잖아! 생선 한 마리도 못 죽이는 새끼가!"

이제 남은 것은 마지막 한 걸음.

"포르모스! 그만! 그마안-! 포르모스으으─!"

푸욱-!

차가운 것이 살집을 갈랐다. 하지만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생각보다 훨씬 독해. 마냥 여린 줄 알았는데 말이야."

"스, 스승님!?"

어느새 칸의 손바닥에 박혀든 단검. 포르모스는 깜짝 놀라서 단검 자루에서 손을 뗐다.

"어, 어째서····. 아니, 그보다 내가 무슨 짓을·····."

무언가에 홀린 듯했던 감각이 쑥 꺼졌다. 갑작스레 확장된 시야 속에서 포르모스는 바포루의 얼굴을 마주했다.

악귀 같던 바포루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그저 눈물을 흘리는 살덩이일 뿐이다.

"나, 나는 대체·····."

하얗게 물드는 머릿속. 굳게 먹었던 마음이 흔들렸고, 주문처럼 떠올렸던 과거의 기억이 흩어졌다.

단단한 바위가 됐다고 생각했다. 물렀던 마음에 강철을 발랐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건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자신은 아직 어렸고, 그저 학대받고 자란 멍청이일 뿐이다. 결국에는 또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몇 걸음이나 앞으로 전진했구나."

그러던 그때, 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 한 걸음은 나중에 준비가 되면 내딛거라. 아직은 네 고사리 같은 손을 더럽힐 때가 아니야."

칸은 손바닥에 박힌 단검을 빼 들었다. 싸구려 단검은 칸의 장갑을 뚫지 못했다.

그저 겉면에 살짝 박힌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을 뿐이다.

"지금은 다섯 걸음이면 충분해."

그렇게 말하고서 등 뒤로 단검을 던졌다.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 가볍게 손을 털어낸 것에 불과했다.

푸욱-!

하지만 바로 뒤에 있는 놈을 맞추는 것쯤이야,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하물며 바포루는 묶여 있기까지 했다.

바포루의 미간에 정확히 박혀든 단검. 녀석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뒤로 넘어갔다.

"네 각오는 내가 잘 봤다, 포르모스."

듣기 좋은 칭찬이다. 포르모스는 마음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눈꺼풀이 스르륵 감겼다. 요 잠깐 사이에 심력 소모가 엄청났던 탓일까?

"잘 자라."

칸은 쓰러지는 포르모스를 자연스레 받아들었다.

***

일행은 무인도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각자 옹기종기 모여앉아 모닥불을 피웠다.

"그놈은 꽤나 대단했어."

오쉬하르는 낮에 있었던 싸움을 상기했다.

"붉은 발톱 해적단의 총대장이라지?"

"그렇소. 요 인근에서는 나름 대해적 취급을 받는다더군."

"흐흐, 역시 보통 놈이 아니었어."

이름이 뭐였더라? 만티코레였나? 아무튼 그놈은 용케 도망치는 것에 성공했다.

그 많던 해적선을 전부 내팽개친 채 바다로 몸을 던졌었지. 해적선이고 나발이고 간에 목숨이 제일이다.

"확실하게 마무리 짓지 못한 게 아쉬워. 손맛을 봤어야 했는데."

뿌듯해하는 오쉬하르를 뒤로한 채 칸은 포르모스를 바라봤다. 녀석은 여태 깨어나지 않았다.

'많이 불안할 수밖에 없지.'

일전에 포르모스에게 들은 적이 있다. 바포루는 녀석에게 악몽이다. 동시에 양아버지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오늘 일을 아주 짜릿한 복수라고 말할 수 있겠지. 하지만 마냥 기쁜 일은 아니다.

마지막 순간에 포르모스는 많이 심적으로 괴로워했고, 거의 무너질 뻔했다. 속마음이 복잡미묘할 것이다.

'복수가 항상 달콤한 건 아니니까.'

역시나 포르모스는 본성 자체가 선한 편이다. 이런 불안한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칸은 녀석에게 더 정감이 갔다.

생각해 보라. 아무리 원수 같은 사람이라지만, 이 어린놈이 무턱대고 사람을 찔러 죽인다면·····.

'그건 정상이 아니야.'

어딘가 인성적으로 결핍된 사람처럼 비춰질 수밖에 없다. 그래도 포르모스의 정신이 그 정도로 피폐하지는 않았다.

참 다행인 일이다. 그러던 그때, 포르모스가 미간을 구기며 잠꼬대를 했다.

"으, 으으····. 싫어, 저리 가. 꺼지라고··· 바포루."

칸은 조용히 녀석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자 금세 조용해지는 포르모스.

잠결에도 손길을 느끼는 걸까? 신기한 녀석이다. 어쨌거나 포르모스는 지금 악몽을 꾸고 있는 듯했다.

'극복해야지.'

자고 일어나면 포르모스가 정신적으로 한 뼘 더 성장해 있기를 바란다.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고래 소년의 성장기를 보는 것도 나름 재밌더군."

칸의 시선을 따라서 포르모스를 눈에 담은 오쉬하르. 그가 끌끌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네만, 자네 같은 스승이 있다면 참 듬직할 것 같아."

"할 일을 했을 뿐이오."

칸은 가볍게 대꾸하며 모닥불에 장작을 던져 넣었다. 곁에 앉은 네리아가 조용히 입술을 뗀 것은 그때였다.

"포르모스는 훌륭한 가신이 될 거다. 우리가 잘 키워서 레오칸에게 물려줄 재목이지."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네리아는 레오칸의 측근으로 포르모스를 점찍어 놨다.

이게 포르모스에게 잘된 일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칸은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나중에 가서 포르모스의 의사를 존중하면 될 일이다. 녀석을 구속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있잖아, 주인."

오늘은 잠잠하게 보냈던 로젤린이 조용히 말을 뱉었다.

"이 꼬마, 내가 가르쳐 봐도 될까? 지금 당장 주인이 따로 파동술을 전수할 생각이 없다면 말이야."

며칠 동안 마법사의 눈으로 관찰한 결과, 이 녀석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물[水] 마법을 누구보다 잘 익힐 수 있는 자질을 타고났다고 해야 할까?

"적합도가 아주 뛰어나더라고. 다른 해양 수인족들도 그런 편이기는 한데, 얘는 그 정도가 좀 유별나."

모닥불이 맺힌 로젤린의 동공이 이글거렸다. 꼭 재능을 향한 탐욕이 들끓는 것처럼 보였다.

"고래족이라서 그런가? 아무튼 나한테 마법을 배우면 금방 성취를 이룰 수 있을 거야."

이제 보니 아주 재능 덩어리였구만? 마법 쪽으로는 아주 진지한 태도를 견지하는 로젤린이다.

며칠간 살펴보고서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일 테니까, 아마도 허언하는 것은 아닐 터. 피식 웃은 칸이 어깨를 으쓱였다.

"마음대로 하시오. 포르모스에게 동의만 얻는다면 신경 쓰지 않을 테니."

"오, 허락한 거다? 나중에 쟤가 마법에만 열중한다고 삐지면 안 된다?"

"그럴 일 없소."

칸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로젤린은 어디서 수첩 같은 것을 꺼내 간이 맹세를 작성했다.

마법 종이에 적은 것도 아닌, 그냥 글줄 몇 개로 작성된 맹세. 별 효과는 없다. 그냥 기분만 내는 것이다.

"그나저나 물과 파동의 조합이라····. 잘 어울리는군."

"주인도 좀 배워볼래?"

모닥불을 응시하며 칸은 잠시간 생각을 정리했다. 마법은 생전 가까이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풍문으로 듣기로는 입문 나이 같은 게 큰 문제는 아니라고 하더라.

오러보다 더 재능을 많이 타는 분야. 그게 바로 마법이다. 재능만 있다면 언제 입문했느냐는 중요치 않다.

'혹시 마법과 오러를 결합할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도 칸은 파동 오러를 독자적으로 운용해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마법까지 더해진다면? 그건 또 새로운 차원의 연구가 될 것이다.

그야말로 전인미답의 연구. 칸은 가슴 한쪽 구석이 간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에 흥미가 동할 때면 매번 이런 느낌이 들고는 했다.

"심심풀이 삼아 배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후후. 좋아, 맡겨만 둬."

로젤린의 입술을 뚫고서 의미심장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럼 이제 호칭부터 다시 정리해야 하려나?"

"뭔 개소리요?"

"나는 노예이면서 주인의 스승이 되는 거잖아. 당연히 호칭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브으읍! 으븝·····!"

칸은 머릿속으로 외쳤다. 아가리 봉인. 아봉, 아봉, 아봉! 들을 가치도 없는 개소리는 일찌감치 막는 게 답이다.

"으으읍! 우붑! 우으읏····!"

"개소리 또 하면 이틀 동안 아봉이오."

그렇게 경고를 보내고서 칸은 아봉을 풀었다. 잠시 후 로젤린의 말문이 다시 트였다.

"푸하아····. 진짜 가차 없네. 스승 대우도 안 해주면서 알맹이만 쏙 빼먹으려고?"

로젤린은 입술을 삐죽이며 툴툴거렸다. 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을 푸념일 뿐이다.

"마법에 재능이 없으면 그냥 관둘 거요. 파동과 접목이 어려워도 때려칠 거고."

"·····마음가짐부터 글러 먹었어."

칸은 코웃음을 터트리며 모닥불을 뒤적였다. 처음에 묻어뒀던 감자를 찾기 위해서.

"포르모스를 어떻게 구슬릴지나 생각하시오."

칸이 로젤린과 적당히 어울려주고 있던 그때, 네리아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문을 열었다.

"흐음, 그래. 기왕에 이렇게 된 거 포르모스가 마법까지 배우면 쓸모가 아주 높아지겠어. 레오칸의 제1 가신이 그 정도는 돼야지."

확실히 네리아의 관점은 남달랐다. 아들 레오칸에게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 오직 그것만이 기준이다.

칸이 마법을 배우겠다고 말한 것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습. 이윽고 생각을 끝낸 네리아가 로젤린을 바라봤다.

"간만에 쓸모 있는 말을 했구나, 골 빈 년아."

"···뭐? 누가 누구 보고 골이 비었대? 뇌까지 근육으로 들어찬 주제에."

네리아와 로젤린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붙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꼭 불똥이 튀는 것 같았다.

아니지, 저건 진짜 불똥인가?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오르며 공기를 타고 올라가는 중이다.

칸은 허공에 떠오른 불똥이 밤하늘의 별과 겹칠 때까지 계속 바라봤다.

이내 온기를 다하며 사르르 사라지는 불똥.

"운 좋은 줄 알아, 뇌 근육녀. 주인만 아니었으면 아주 그냥 치도곤을 냈을 거라고."

"지랄도 풍년이군. 네가 내 상대가 될 것 같으냐?"

하지만 두 사람의 말싸움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쪽에 앉아 있던 오쉬하르는 슬그머니 궁둥이를 뗐다.

"또 시작들이군. 나는 저쪽으로 가보겠네."

그는 질린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 칸은 오쉬하르를 향해 살짝 고개만 까딱였다.

"좋은 밤 되시오."

그렇게 말하고는 품에서 두 개의 솜뭉치를 꺼내 귓구멍에 꽂았다.

"다시 말하지만, 너는 노예 주제에 말이 너무 많아. 그 더러운 아가리 좀 닫고 살아라."

"응, 네 아가리가 더 역겨워."

저쪽은 알아서 떠들 게 놔두자.

지금은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

대초원과 맞닿은 파탈라 왕국은 사람들에게 이런 말로 유명했다.

일명 '성벽의 나라'. 그들은 대초원과의 접경지에 무수히 많은 성벽을 쌓았다.

국가의 존립을 위해서라도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 오크 기마대를 막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책이니까.

덕분에 대초원 접경지의 영주들은 따로 '성벽군주'라는 별칭까지 얻게 됐다.

"봉신 맹약에 따라 명을 받드시오! 국왕 전하의 소집령이 떨어졌소!"

그리고 근래에는 각지의 성벽군주들을 향해 소집령이 떨어졌다. 수많은 파발이 왕명을 받아 말을 달렸다.

파탈라 왕국의 남동쪽 국경에 자리를 잡은 '수틀리에 가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틀리에 가문의 가주, 호베르스트 공에게 전하는 바요! 한 달 내로 집결지에 모습을 드러내시오!"

대충 제 할 말만 전달하고서 사라지는 파발. 나름 기사 작위를 받은 놈이라고 태도가 참 뻣뻣했다.

하지만 수틀리에 가문은 남작 가문이다. 정식 작위도 없는 기사 따위가 무시할 집안이 아니다.

그럼에도 저런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국왕께서 방향을 잡으셨구나."

파발이 보여준 태도에 여러 가문이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판단의 기준이 될 듯했다.

아군과 적군을 가르는 기준. 파탈라 왕국의 현 국왕, 슈버트 2세가 내전을 결심한 것이다.

"우리도 이제 결정을 내려야지."

옥좌에 앉은 호베르스트가 주변을 훑어봤다. 남작의 궁정에 모인 가신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선택의 때가 찾아온 게야. 다들 기탄없이 의견을 개진해 보거라. 우리 영지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작금의 상황은 아주 명확했다. 파탈라 왕국의 내전에 성신교가 얽혀든 모양새였다.

슈버트 2세는 이단 심문소가 개창한 '정세교'의 편에 서기로 했고, 그 대척점에 있는 몇몇 귀족은 '성신교 교황청'에 힘을 보태고 있다.

이런 와중에 국왕의 소집령이 떨어졌다. 이 소집령에 어떤 대답을 내놓느냐에 따라 진영이 결정되는 것이다.

정세교와 국왕파의 연합.

교황청과 귀족파의 연합.

대립의 형태는 이토록 뚜렷했다. 곧이어 가신들의 갑론을박이 시작됐다.

"국왕 측에 걸어보심이 어떻겠습니까?"

"어허,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누가 봐도 귀족파의 뒤에 있는 교황청이 정통이거늘."

"성신교의 집안싸움은 둘째치고, 명분이 국왕 쪽에 있지 않소이까! 귀족파? 그 치들은 그냥 무뢰배요!"

역시나 쉽게 나오지 않는 결론. 호베르스트는 침중한 눈으로 좌중을 훑어봤다.

피곤했다. 늙어서 그런지 몸이 예전 같지 않았지만, 그래도 정정함을 연기해야 한다.

작금의 파탈라 왕국은 크게 흔들리고 있다.

여기서 자신이 중심을 잡지 못하면, 수틀리에 가문은 순식간에 휩쓸리게 될 것이다.

'교황청과 귀족파. 참 글러 먹은 놈들끼리 붙어먹었어.'

오직 성전(聖戰)에만 집착하던 교황청의 행태는 예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부패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귀족파. 이놈들은 사실 말이 귀족파일 뿐이지, 사실 왕국 귀족들로부터 신뢰를 잃은 지 오래였다.

'사람들은 아직도 6년 전을 기억하고 있으니.'

6년 전에 있었던 오크 대침공.

당시의 난리에서 수많은 성벽군주가 제대로 방어에 임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들은 신뢰를 잃었고, 귀족들 사이에서 인식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신뢰를 잃은 성벽군주들이 귀족파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상황. 귀족파라는 명칭은 허울에 불과했다.

"무조건 국왕의 소집령에 응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영지의 위치를 생각해 보시오! 지금 섣불리 국왕의 편을 들었다가는 분명 주변 성벽군주들이·····!"

여전히 진행되는 갑론을박 속에서 호베르스트가 말문을 열었다.

"그만."

묵직한 한 마디.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던 가신들이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추태를 보인 것에 대한 사죄였다. 하지만 호베르스트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저 자신의 뜻을 밝힐 뿐이다.

"국왕 전하의 소집령에 응하겠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귀족파 놈들은 믿을 수가 없을 것 같으이."

선대의 성벽군주들은 항상 오크들을 막아냄으로써 존재를 증명했고, 드높은 신뢰를 쌓았다.

하지만 당대의 인물들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오크에게 길을 터줬다. 선대가 쌓은 공든 탑을 직접 무너트린 것이다.

원래 신뢰란, 쌓기는 어려워도 잃기는 쉬운 녀석. 이미 호베르스트의 마음은 국왕 쪽으로 기울었다.

"경들에게는 미안하네만, 국왕파에 가담하는 것을 상정하고서 논의를 이어갔으면 좋겠네."

"명을 받들겠나이다."

"가신 된 자로서 따르겠습니다."

가신들은 호베르스트에게 반발하지 않았다. 이미 주군의 뜻이 확실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호베르스트는 한번 마음을 정하면 쉽게 꺾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어쨌거나 이제는 그 다음을 논의할 때. 문득 회의장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급보입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파수꾼. 수상한 시국에 경계 구역을 넓게 설정한 탓에 하루에도 몇 번씩 급보가 올라왔다.

"발언을 허하겠다. 파수꾼은 소식을 전하라."

"감사합니다, 각하!"

몇 차례 숨을 고른 파수꾼은 본인이 직접 확인한 것을 입에 올렸다.

"북쪽 해안에서 신원 미상의 인원을 다수 확인! 대략 100여 명의 인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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