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병으로 살다-202화 (202/216)

◈ 202화

네리아는 대초원이 자리하고 있는 동쪽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거기는 훨씬 더 춥겠지.'

그녀가 머물고 있는 파탈라 왕국과 엄청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건만, 대초원의 겨울은 훨씬 가혹하다고 들었다.

하루아침에 얼어 죽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 곳에 사랑하는 이가 있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마음이 좋지 않다.

"티미, 알아보라는 건 어떻게 됐지?"

네리아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때마침 근처로 다가온 티미가 그녀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보급선은 계속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그 남자가 말했던 것과는 영 딴판이었죠."

"그렇군."

얼마 전에 사람이 찾아왔었다. 온몸이 상처로 가득했고, 복장은 신생 정세교의 그것이었다.

익히 알고 있던 얼굴. 그는 그레고르 교황의 측근으로서 추기경 자리에 오른 헤르메이였다.

"하지만 헤르메이가 헛소리를 할 사람은 아니다. 그럴 위치에 있지도 않고, 또 정세교를 배신할 사람은 더더욱 아니지."

"그 점에는 저도 동의합니다만····· 이게 참 복잡하군요."

대초원으로 향한 정세교를 지원하는 보급선은 지금껏 끊어진 적이 없다.

그런데 그레고르 교황의 측근인 헤르메이는 그게 끊겼다고 한다.

게다가 상황 또한 극도로 좋지 않다고도 했다. 오죽했으면 의식을 잃기 직전까지도 지원이 필요하다며 네리아에게 읍소했을까.

"티미."

"예, 전하. 말씀하시죠."

"나는 되도록이면 헤르메이 추기경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헤르메이에 대해서는 일전에 칸으로부터 들은 게 있다.

아주 강직하고 신실한 사람. 뭔가 이상한 착각을 하여 칸에게 깊은 호감을 가지고 있는 성직자. 그리고 지독할 정도로 이단 심문관에 어울리는 실력자.

그런 사람이 헛소리를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네리아는 칸의 안목을 믿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헤르메이의 우직한 성품은 예전부터 꽤 널리 알려져 있었다. 네리아가 그걸 모를 리가 없다.

"그러시군요. 이미 마음을 정하셨으니 저는 그저 따를 뿐입니다. 뜻대로 하시지요."

"그럼 명령을 내리겠다."

네리아는 주변을 훑으며 주변에 따로 듣는 귀가 없는지 확인했다. 그러고는 잠시 후,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은밀하게 조사를 시작해라."

"조사라고 하심은····?"

"보급로를 담당하는 작자들. 국왕 슈버트 2세와 여러 귀족들. 그리고 직접 물건을 옮기는 상단들까지."

전부 다 조사해야 한다. 만약 헤르메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 중에 문제아가 있을 것이다.

대외적으로 보급선을 멀쩡하게 보이도록 하는, 상당한 공작력을 지닌 인물이 숨어있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없다.

"전하, 송구스럽게도 지금 이곳은 파탈라 왕국입니다."

"알고 있다."

"그럼 파탈라 왕국에서 자국의 국왕을 조사한다는 게 얼마나 무례한 짓인지도 알고 계시겠군요."

네리아는 한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오늘 점심으로 뭘 먹을지 결정하는 것처럼 그녀의 끄덕임은 아주 가벼웠다.

"들키지 않으면 전부 해결될 문제야."

"······."

"나는 네 능력을 믿어, 티미. 그리고 우리 정보원들의 실력도 믿고 있고."

티미는 썩은 동태 눈깔을 하고서 네리아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한 대만, 언젠가 딱 한 번만 저 뒤통수를 때려 보고 싶다.

그러던 그때, 앞서 걷던 네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티미는 황급히 표정을 바꿨다.

"왜 가만히 서 있는 거지?"

"아, 아아···· 갑자기 현기증이 나서 그랬습니다."

"저런, 내가 너무 무심했나? 보약이라도 한 첩 지어서 보낼 테니 빼먹지 말고 챙겨 먹어라."

"감사합니다."

"몸이 건강해야 개처럼 구를 것 아니냐."

보약을 지어준다는 소리가 어째서 이리 섬뜩하게 들리는 걸까. 티미는 입술을 삐죽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순응하자. 애초에 네리아를 모시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편안하게 연구에만 매진할 생각은 버렸다.

"일단 바로 착수하겠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티미와 그 휘하의 정보원들은 아주 은밀하게 보급로와 관련된 인물들을 조사했다.

그런데 말이지····· 어째서 정보원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걸까? 티미는 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보가 아니라면 알 수밖에 없다.

"4호까지 돌아오지 않은 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이걸로 몇 명째죠?"

"실종자만 총 다섯 명입니다, 티미 님."

간부의 보고를 받으며 티미는 손으로 턱을 살살 쓸었다. 꺼슬한 수염이 손톱 끝에 걸렸다.

확 잡아서 뽑아버리고 싶다. 덜 자라서 뾰족뾰족한 이 수염도, 잘 키운 정보원을 몰래 처리하고 있는 놈들도.

"이런 말씀을 올리기는 좀 그렇지만, 애들의 실종 덕분에 단서를 잡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간부의 첨언에 티미는 고개를 살살 끄덕였다. 지금껏 실종된 인원은 전부 같은 쪽으로 배정된 정보원들이다.

상단. 보급품을 직접 실어 나르는 놈들에게 문제가 있는 듯했다.

아니면 그 상단과 동행하는 파탈라 왕국의 고위 귀족이 연관돼 있거나.

어쨌든 범위가 좁아진 셈이다. 실종자들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쪽으로 인력을 더 투입하는 것으로 하죠."

"알겠습니다."

"반드시 밝혀내야 합니다.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마음으로 작전에 임하도록 합시다."

"존명!"

그렇게 다시 며칠이 지났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놈들과의 신경전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종국에는 티미도 화가 뻗칠 수밖에 없었다.

"염병할 것들! 대체 뭐 하는 놈들이야!"

티미는 탁자를 강하게 쾅-! 내리쳤다. 정갈하게 정리돼 있던 찻잔이 이리저리 널브러졌다.

온갖 보고서도 팔랑이며 존재감을 발했다. 하지만 책상 위의 풍경보다 더 엉망인 것은 티미의 얼굴.

마치 터질 듯이 울그락불그락해진 낯빛으로 티미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후우. 진정해, 티미. 그래도 단서는 잡았잖아."

스스로에게 혼잣말을 건네며 그는 머릿속을 뒤적였다. 가장 수상한 행보를 보이고 있는 집단을 이미 골라뒀다.

'발라로스 연합상단.'

몇 십 년의 역사를 갖춘 상단이다. 그 규모가 상당해서 신생 정세교의 보급품을 총괄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 이건 아주 큰 문제다. 어쩌면 정세교의 대초원 원정은 시작부터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

티미의 보고를 받은 네리아는 침음을 삼켰다.

"발라로스 연합상단이라·····."

꽤나 거물이 걸렸다. 한편으로는 그 정도는 돼야 뒤에서 보급로를 가지고 장난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쨌거나 발라로스 상단이 일을 꾸몄다는 것을 증명할 만한 증거는 아직 발견하지 못한 상태. 하지만 상황이 급했다.

헤르메이 추기경의 말이 사실이라면, 발라로스 상단을 조사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는 안 된다.

'고로, 이쪽에서 직접 움직일 필요가 있어.'

발라로스 상단과는 별개로 보급대를 따로 구성하는 것. 그게 지금 막 네리아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다.

만약 발라로스 상단이 정상적으로 보급품을 전달하고 있다면, 새롭게 보급 부대를 구성하는 것은 그저 돈 지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돈 지랄이 뭐 어때서? 가만히 뒀다가 신생 정세교가 전멸하는 것에 비하면 훨씬 낫다.

'내가 뭐 돈 몇 푼이 아쉬운 사람도 아니고 말이야.'

물론, 보급대라는 게 돈 몇 푼 정도로 치부될 규모는 아니겠지.

하지만 애초에 신생 정세교의 대초원 원정대가 그리 거대한 집단이 아니다.

당연히 기존의 보급대 또한 그리 비대하지 않았다. 딱 그 정도 규모로만 구축하면 될 것이다.

"왕세녀 전하, 결정을 내리셨나이까?"

앞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네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눈에 들어온 사람은 헤르메이 추기경.

그는 부목을 짚은 채였다. 정신을 차린 뒤부터 이렇게 계속 네리아의 숙소를 방문하고 있다.

모든 말과 행동에서 간절함이 묻어나온다. 그야말로 간절함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겠다.

"걱정하지 마시오, 추기경. 내가 힘써보도록 하겠소."

"오오, 역시 네메토리아 전하시군요! 감사합니다! 이 헤르메이, 오늘의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나이다!"

쿠웅-!

헤르메이는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부목을 내팽개치며 바닥에 머리를 찍었다. 그 모습에 네리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제 겨우 낫기 시작한 몸을 그렇게 굴리면 쓰겠소?"

"소, 송구합니다. 하지만 감사를 표현할 길이 이런 것뿐이기에 어쩔 수 없이····."

"그쯤하고 일어나시오. 대초원으로 향할 때 추기경 그대도 함께해야 할 거 아니오."

"···민폐를 끼쳐 죄송하나이다."

네리아는 추기경 헤르메이를 상대로도 거침없이 말을 뱉었다. 꼭 부하에게 핀잔을 주는 듯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너무 자연스러워서 헤르메이 본인조차도 딱히 기분이 나쁘거나 하지는 않았다.

네리아는 마치 남들의 위에 서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같았다.

실제로도 라이오넬 왕가의 사람이라면, 태어날 때부터 산 정상에 있다고 볼 수 있겠지.

어쨌거나 네리아의 핀잔과는 별개로 헤르메이는 아주 빠르게 회복하고 있다.

"최대한 빠르게 보급대를 구성해 보겠소. 내가 직접 이끌 거요."

그렇게 네리아의 출정이 비공식적으로 결정됐다. 몰래 보급대를 구축하는 게 마냥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시간이 꽤 허비됐다.

그 와중에 네리아는 뜻밖의 손님도 맞이하게 됐다. 대륙 동남쪽의 이데리코 반도에서 왔다는 남자.

"왕녀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왠지 모르게 가볍게 보이는 관상이다. 하지만 묘하게 관록이 쌓여서 적당히 믿음이 가는 얼굴이기도 했다.

상반된 느낌을 동시에 풍기다니. 참 신기한 얼굴이 아닐 수 없다.

"오랜만이라고? 우리가 언제 만난 적이 있던가?"

"아, 벌써 잊으셨습니까?"

"개수작 부리지 마라."

접견실에 들어온 남자는 네리아를 친근하게 대하려 했다. 하지만 네리아의 기억에는 이런 남자가 없었다.

으음, 약간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하고? 진짜로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건가?

"하긴, 6년이 넘게 지났으니 까먹으셨을 만도 합니다."

"6년?"

남자는 네리아의 반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런 남자를 네리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봤다.

"다시 한 번 자기소개를 올려야겠군요. 저는 소르덴입니다, 전하."

"아!"

기억났다. 구석에 처박혀 있던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자유도시 체스카에서 활동했던 용병. 그리고 칸의 친구. 항상 뺀질거렸던 소르덴의 얼굴과 눈앞의 남자가 하나로 겹쳐졌다.

"그래, 소르덴. 약간···· 아니, 좀 많이 변했군."

"과거에는 멋도 모르고 전하의 존함을 함부로 입에 담았습니다만, 이제 다 알고 있으니 그럴 수는 없죠."

양아치 같다는 느낌이 전혀 나지 않는다. 옷차림도 말끔했고, 제대로 된 예의를 차리고 있다.

어쩌면 그런 차이 때문에 바로 소르덴을 떠올리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몇 년 사이에 사람이 이렇게도 바뀔 수도 있는 건가?

아니, 잠깐만. 문득 네리아의 머릿속을 어떤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분명 나는 이데리코 반도의 피오나 가문에서 접견을 청했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네가 들어온 거지?"

"그야 제가 그 피오나 가문의 대표니까요."

뭐 당연한 소리를 묻냐는 듯 소르덴은 곧바로 대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네리아는 바보가 아니다.

소르덴이 피오나 가문의 대표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해서 그런 질문을 뱉었을 리가 없다.

질문의 요지는 소르덴이 어떻게 피오나 가문의 대표가 됐냐는 것이었다.

"하하, 이거 쑥스럽군요."

네리아의 시선을 받은 소르덴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어쩌다 보니 피오나 가문의 진전을 잇게 됐습니다."

"····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군."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죠."

그래, 그런 개인적인 일이야 아무래도 좋다. 궁금하기는 했지만, 굳이 캐묻고 싶지는 않았다. 왠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다.

네리아는 조용히 손을 뻗어 찻잔을 집으며 말문을 열었다.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갈 생각이다.

"그래서 나를 찾아온 까닭은 뭐지?"

"아, 사실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용무입니다."

네리아의 입술을 뚫고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피오나 가문의 대표자 자격으로 접견을 신청한 주제에 이제 와서 개인적인 용무라고 지껄인다.

"내 친구."

"·····."

하지만 뒤이어 나온 단어 때문에 네리아는 소르덴이 개인적인 용무라고 말한 이유를 알아챘다.

"칸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지?"

"칸의 사라지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임했던 임무가 전하의 용사냥이니까요."

"하지만 최근에 활동한 곳은 대륙 북부지."

묘한 신경전이 시작됐다. 칸의 행방에 대해서 전부 털어놓을 수도 있지만, 네리아는 소르덴을 신뢰하지 않았다.

"북부도 한 번 다녀올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마침 더 가까운 곳에 계신 전하를 뵙기 위해 이리 찾아왔습죠."

깊게 가라앉은 네리아의 시선이 소르덴을 찔렀다. 예전 같았으면 저 고압적인 시선에 당장 눈을 깔았겠지.

하지만 지금의 소르덴은 과거와 달랐다. 개인적인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피오나 가문까지 뒷배로 두고 있다.

"·····."

네리아는 침묵을 지키며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소르덴을 믿을까, 말까. 그리고 소르덴과 피오나 가문이 작금의 상황에 도움이 될까, 되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해볼 문제였다.

***

산적들과 함께 대족장의 숙영지로 들이닥쳤던 올가니는 지금 열심히 깃펜을 놀리고 있다.

'많다, 많아! 기록해야 할 게 산더미야!'

숙영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전투에 참여했던 이들에게 정보를 뜯어내고, 그렇게 뜯어낸 정보를 비교하고.

더 나아가서는 깔끔하게 정리해서 기록하는 것까지. 이건 정말이지 보통 일이 아니다.

"아잇, 씨팔! 저리 좀 꺼져!"

"아파 뒈지겠는데 뭘 자꾸 캐물어!?"

"다리! 지금 내 다리 한쪽 날아간 거 안 보여?"

게다가 다들 잔뜩 예민해진 상태. 말씀 좀 여쭙겠다며 정중하게 다가가도 욕이나 한 바가지 얻어먹는다.

그나마 일전에 대족장을 쓰러트린 칸이 올가니의 위치를 보증한 뒤부터는 그런 일이 줄어들었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다들 싫은 기색을 내비치면서도 순순히 협조한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지.'

그건 바로 당사자. 대족장과 직접 손속을 나눈 칸에게 듣는 것보다 중요한 정보는 없다.

'그리고 대족장도 아직 숨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고.'

아차차, 말조심하자. 이제 오드발은 대족장이 아니다. 스스로 대족장 자리에서 내려오겠다고 선언했다.

어차피 계속 궁둥이를 붙이고 있어 봤자 얼마 뒤에 임시로 개최될 족장 회의에서 폐위될 것이다.

그 전에 자진해서 내려오는 게 그나마 명예를 챙길 수 있는 길이다. 애초에 오드발의 수명도 얼마 남지 않은 듯했고.

"그나저나 무슨 말을 하려나?"

오드발이 사람들을 소집했다. 아직은 대족장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으니까, 그에게 그 정도 권한은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 소집에 응하고 싶지 않을 테지만, 족장들은 갈 수밖에 없다.

분명 사람들을 소집하고서 본인의 폐위를 발표할 테. 그 순간을 눈으로 담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족장에게는 권한이 있다. 다음 대의 대족장 선출회의, 쿠릴타를 개최할 사람을 지명할 권한.

'불명예스럽게 물러나기는 하지만 쿠릴타 개최권까지는 보장해 주겠다는 건가?'

참 족장들의 머릿속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마 오드발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닐 것이다.

대족장이라는 자리가 가진 상징성과 권위, 그리고 전통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서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까?

예외가 발생해서 한 번 권위가 무너지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무너질 테니까. 뭐, 그것도 모를 일이기는 했다.

어쨌거나 올가니는 열심히 화로 앞에서 부채질을 했다.

"후우, 푸후우-!"

지금 그녀는 탕약을 달이고 있다. 취켈 부족의 비전 물약을 만드는 중이다.

주술사 생활을 하면서 꿍쳐 뒀던 약초를 여기에 전부 때려 박았다. 당연하게도 이건 칸을 위한 것이다.

나중에 재료값이랑 치료비까지 두둑히 받아내야지. 칸은 호의를 그냥 외면할 사람이 아니다.

그러던 그때였다.

"이런 미친····! 대족장! 아니, 오드바아알-! 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인간에게 쿠릴타의 개최권을 넘기겠다니! 이런 적은 없소이다!"

"맞아! 대초원에 그런 역사는 없었어! 있어서도 안 되고!"

아무래도 뭔 일이 생긴 것 같다고 생각하며 올가니는 칸을 바라봤다.

수많은 오크들 사이에서도 그는 꼿꼿하게만 보였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은 오드발에게 꽂혀 있었다.

"인간은 대초원의 대소사에 끼어들 수 없소!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래야만 하오!"

하여간 능력도 없는 것들이 목소리만 높다니까. 올가니는 대충 귀를 후볐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대족장 오드발의 목소리는 아주 선명하게 들렸다.

"오직 실력으로 나를 꺾을 수 있는 자만 내 앞에서 이의를 제기하시오."

다 죽어가는 주제에 쓸데없이 위엄이 넘친다.

"다음 쿠릴타의 개최자는 체스카의 칸이오."

목소리가 참 묵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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