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병으로 살다-209화 (209/216)

◈ 209화

칸이 새로운 적수와 맞닥뜨렸을 무렵.

"끄르릅! 커흑, 흐으으!"

로베르트는 생사의 갈림길에 있었다. 지금 그는 들것에 실려 전장을 이탈하는 중이다.

"빨리! 더 빨리!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고 봐!"

"이런 염병할! 탑주님을 뫼셔라! 내가 시간을 벌겠다!"

"제1장로님! 안 됩니다! 돌아오십쇼!"

그야말로 눈물겨운 탈출 작전. 항상 로베르트의 곁에서 심복을 자처했던 제1장로가 몸을 돌렸다.

보아하니 이 오크 기마대는 단순히 숫자만 많은 게 아니다. 곳곳에 보이는 깃발의 종류가 참 다양했다.

깃발의 종류가 다양하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숫자의 오크 부족이 뒤섞여 있다는 뜻.

동시에 그건 족장급 오크들 또한 다수라는 뜻이기도 했다. 육안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깃발의 숫자는 많았다.

'대체 족장급 오크가 몇이나 있는 거냐!'

제1장로는 과거 파탈라 왕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오크 대침공을 떠올렸다.

그때 대륙을 침공했던 오크 부족의 숫자가 몇이었더라? 대충 총 10개 정도였나? 그보다 적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쨌거나 그 정도만으로도 대단한 위력을 선보였던 오크 족장들이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는·····.

'그때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숫자가 있지.'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상황은 극도로 좋지 않다. 안전하게 퇴각하기만 해도 기적인 수준.

애초에 처음부터 퇴각했어야만 했던 걸까? 대규모 오크 기마대가 이곳에 당도했음을 알고서도 작전을 진행한 것이 실책인 듯했다.

어쩌면 그 결정은 만용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대륙의 뒤편에서 정세를 주무르고, 또 양민들의 위에 군림하며 절대적인 권위를 누렸던 마탑의 만용.

'····정확히는 마탑이 아니라 선지자들의 만용이라고 할 수 있겠지.'

제1장로 또한 선지자의 일원. 탑주처럼 선지자의 주체가 될 수는 없지만, 세계의 비밀에 근접한 사람 중 하나다.

그렇기에 제1장로는 알고 있다. 선지자라는 이름으로 마탑이 얼마나 오랫동안 세계의 이면을 주물러댔는지.

그래, 마탑은 너무 긴 시간 동안 대륙의 정점에 있었다.

그렇기에 스스로의 한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고, 결국에는 이런 사태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작게나마 내가 책임을 지겠다."

제1장로는 결의를 다지며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단전에서부터 들끓는 불[火]의 마나.

운용할 수 있는 최대 화력을 시작부터 쏟아부을 생각이다. 어차피 이곳에서 버리기로 한 목숨이니까.

"마나는 나의 손 아래로, 불꽃은 하늘을 바라보며 상승하라."

뒷일을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 그저 산화하면 된다. 평생토록 익혀온 불의 마법과 하나가 되어 죽을 것이다.

그러던 그때, 갑작스레 하늘의 눈보라를 뚫고서 광선이 땅으로 떨어졌다.

"이런 멍청한····!"

제1장로는 이게 뭔지 알고 있다. 금색 탑주가 전개하는 <골렘 마법 철왕(鐵王)>.

그 거대한 존재로부터 비롯된 금속[鐵] 마나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지금껏 얼음성을 공략하면서 몇 번이고 마주했었지.

그런데 그게 왜 이쪽으로 떨어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목숨을 걸겠다고 생각했던 제1장로는 본능적으로 마법을 거뒀다.

'이, 일단은 저걸 피하고 봐야 해!'

스스로 목숨을 거는 것과 아군의 오인 사격으로 목숨을 잃는 것.

둘 사이에는 크나큰 차이점이 존재했다. 전자는 숭고한 희생처럼 비쳐질 수 있지만, 후자는 그냥 개죽음일 뿐이다.

하지만 제1장로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푸촤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제1장로가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두 줄기의 광선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지상에는 두 줄기의 거대한 상흔이 새겨졌다.

마치 거대한 쟁기로 밭을 간 듯한 모습. 그 거대한 상흔 속에 제1장로가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커헉! 이, 이런 죽음은 전혀 의미가····· 없, 어."

그는 반쯤 녹다 만 상태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옷가지와 피부 등이 모두 녹아내려 근육과 장기가 그대로 드러났다.

정말이지 허무한 최후였다. 그런 제1장로의 눈에 어떤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됐다.

"체, 스카의···· 칸."

그 남자다. 기이한 재주로 하늘을 유영하는 용병. 체스카의 칸이 날파리처럼 철왕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지금 벌어진 오인 사격은 아마 저 과정에서 나온 산물이리라. 체스카의 칸이 이걸 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노렸다면 그 전략에 찬사를, 만약 노리지 않았다면 멍청한 금색 탑주에게 저주를.

"····불꽃은 무엇을 태우는가."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던 제1장로는 마지막으로 적색 마탑의 구호를 외치며 고개를 꺾었다.

더 이상 이 늙은 몸뚱이를 지탱할 만한 힘이 없었다.

그만 놓아주자.

***

제1장로가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고, 금색 탑주 엥그루스와 칸이 전투를 벌이고 있을 무렵.

"흐으, 흐으으····."

로베르트는 생사를 오가고 있었다. 들것에 실려 황급히 전장에서 이탈한 그는 강제로 마차에 실리게 됐다.

불규칙적으로 덜컹이는 진동 때문에 로베르트의 상처는 더욱 벌어졌다. 하지만 마법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물러서! 다들 마차 밖으로 나가라고!"

"여기 있다가는 다 같이 죽는다! 차라리 나가서 길을 뚫어!"

현재 로베르트의 신체는 무너지고 있는 상태. 막대한 양의 마나를 보관하고 있던 만큼 그 여파 또한 남달랐다.

쉽게 말하자면 댐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틈새가 생길 때마다 그쪽을 통해 불[火] 속성 마나가 줄줄이 새어 나왔다.

화르륵-!

그와 동시에 로젤린의 마나독 또한 함께 연소됐다. 덕분에 마차 내부에는 독연기가 흐르게 됐다.

"독기를 억제해! 그리고 불똥이 마차에 옮겨붙지 못하게 막아!"

"하메스 장로! 어떻게 좀 해 보시오! 이대로는 안 되오!"

"지랄! 나보고 뭘 어쩌라는 말입니까!"

로젤린의 마나독은 아주 독했다.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생명체를 위협할 정도로 악독한 독이다.

장로급도 오래 버티지 못할 수준인데, 다른 마법사들이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다른 마법사들을 물린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한계. 로베르트가 잘 버텨주기를 바라면서 장로급 마법사들도 밖으로 나갔다.

차라리 바깥에서 힘을 보태 빨리 안전한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모두가 떠나간 마차 내부.

"끄흐으으으····."

로베르트는 홀로 남아 사투를 이어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삶을 이어가고 싶다.

구차하게 살아남아 복수를 이뤄야만 한다. 그래, 복수. 그것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 로베르트가 삶의 동력으로 삼은 목표였다.

모름지기 인간은 목표가 있어야만 의지를 다질 수 있으니까. 그 추악한 감정에 몸을 맡겨 로베르트는 살아남고자 했다.

하지만 쉽지가 않다.

울컥-!

로베르트의 입술을 뚫고서 검붉은 핏물이 치솟았다. 원래 의지만으로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없는 법.

몸 상태가 따라주지 않는다. 그리고 평생 수족처럼 다뤘던 불의 마나 또한 제대로 따라주지 않고 있다.

"여, 염병할····."

이런 식의 무력감은 로베르트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탑주위(位)는 그에게 전지전능함을 선사했다.

마치 신이 된 듯했었지. 그렇기 때문인지 지금 느끼는 이 느낌이 더욱더 크게 다가왔다.

아주 깊은 무저갱에 떨어진 느낌이다. 아니면 끝도 없는 심해에 떨어졌던가.

묘사야 어떻든 간에 로베르트가 지금 느끼는 절망은 아주 끔찍했다.

"······."

로베르트는 눈을 감았다. 까맣게 물든 시야. 그 속에서 고개를 바짝 쳐든 단어는 '포기'였다.

아아, 찬란했던 인생이여.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됐는가. 서서히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끈을 놓기만 하면 끝이다. 어떻게든 복수하고 말겠다는, 그 마지막 생각을 놓기만 하면·····.

"벌써 포기?"

사그라들던 의식에 돌 하나가 던져졌다. 안식을 방해하는 그 목소리에 로베르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여기는···· 마차가 아니다. 주변 풍경이 완전히 반전돼 있었다. 어둠에 휩싸인 숲속이 로베르트를 반겼다.

하늘에 떠 있는 것은 붉디붉은 보름달. 아주 거대한 적월이 로베르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대단하신 적색 탑주께서 이렇게 의지가 박약하면 어쩌자는 거지? 초월하는 불꽃이라고 불리는 마법사잖아. 그 명성이 아까울 지경인데?"

영 거슬리는 목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하지만 로베르트는 그 같잖은 도발에 집중하지 않았다.

대신에 이리저리 손을 움직이며 본인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필시 이곳은 현실이 아닐 것이다.

한순간에 이토록 몸이 멀쩡해질 리가 없으니까. 환상 혹은 환각의 일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인가?"

"맞아, 바로 나야."

로베르트의 앞에서 그림자 하나가 솟아났다. 그 형태는 한 명의 여성. 실물을 맞이하는 것은 로베르트도 처음이다.

"흡혈공의 적장녀."

게헤니아를 똑바로 바라보며 로베르트는 미간을 구겼다.

"왜 나를 이런 공간으로 부른 거지? 다 죽어가는 노인네에게 뭘 바라는 건지 모르겠군."

"후후후, 당신. 아직 살고 싶잖아?"

게헤니아는 매혹적인 웃음을 흘리며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붉은 달에서 핏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에는 유리잔이 쥐어져 있었는데, 달에서 떨어진 핏물이 그 안에 담겼다. 아주 철철 흘러넘칠 때까지.

"그래서 살려주려고 온 거야. 이걸 마시면 영원히 살 수 있거든."

"···나를 모욕하지 말게나. 내 목숨은 생체 마법의 피조물 따위가 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은 연구가 금지된 생체 마법. 그리고 그 마법에 기원을 두고 있는 흡혈귀를 비롯한 괴물들.

아주 먼 옛날의 5대 마탑이 흡혈귀를 탄생시킨 셈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적색 마탑의 주인이 그 피조물의 밑으로 들어가라고?

그 치욕을 감내하느니 차라리 그냥 죽는 게 낫다. 로베르트가 거칠게 손을 휘둘렀다.

"빨리 나를 현실로 돌려보내라. 아니, 지금 당장 내 의식에서 꺼져라. 여기는 더러운 흡혈귀 따위가 들어와서는 안 될 곳···· 우흐읍-!"

갑작스레 목구멍으로 무언가가 침입한 것은 그때였다.

언제 움직였는지 모를 게헤니아가 로베르트의 입술에 유리잔을 처박은 탓이다.

"이,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닥치고 마시기나 해, 로베르트 공. 이 공간에 들어온 이상 당신에게 선택지 같은 건 없어."

사방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가 로베르트를 구속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해진 지금. 당신이 나의 정혈에 저항할 수 있을까? 응? 영생의 유혹을 거절할 수 있을 것 같아?"

"우웁! 으으읍····!"

"나는 아니라고 봐. 로베르트 당신이 내 권속이 될 거라는 것에 전 재산을 걸 수도 있어."

유리잔의 각도가 더욱 크게 기울어졌다.

종국에는 붉은 달에서 떨어진 핏물이 아예 로베르트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목구멍뿐만이 아니라, 로베르트의 전신이 게헤니아의 정혈(精血)로 물들게 됐다. 권속 의식은 순항하고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당신에게 영생을 허락할 생각이 없어."

그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서 게헤니아는 로베르트의 등 뒤로 이동했다. 그러고는 송곳니를 드러내 목에 박았다.

"커헉!"

"로베르트. 당신은 흡혈귀가 되자마자 내 식탁 위에 올라올 예정이거든."

동족 포식.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게헤니아의 그 특성은 동족을 대상으로만 발동된다. 그래서 로베르트를 동족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로베르트의 능력을 흡수하고, 더 나아가서는 가장 최근에 체스카의 칸과 맞붙은 경험을 흡수하기 위해서.

"그래도 너무 슬퍼하지는 마. 당신의 복수는 내가 대신 이뤄줄 테니까."

어느새 로베르트의 눈동자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게헤니아가 호언했던 것처럼 그는 빠르게 굴복했다.

정혈의 유혹은 원래 이겨내기 힘들다. 하물며 일반적인 흡혈귀의 것도 그러할진대, 게헤니아의 정혈은 따로 말할 필요도 없다.

분명 이 세상에서 가장 짙은 농도의 정혈일 터. 이윽고 로베르트는 흡혈귀가 됐다. 그와 동시에 가상공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우드득! 와그작, 쿠적-!

그리고 게헤니아의 식사가 시작됐다.

***

그리고 로베르트와 비슷한 일이 다른 곳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오오···· 저, 전능하신 아버지 신이시여."

성신교의 상징물이 걸려있는 화려한 마차. 그 안에는 교황 베세리우스 5세가 누워 있었다.

그는 양손으로 삼지목(三枝木)을 붙들고서 연신 기도를 올리는 중이다.

"···버려진 아이가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다, 당신의 뜻을 거역한 패륜아가···· 당신의 가장 신실한 어린양을 죽이기 위해 이리로 오고 있단 마, 말입니다."

저도 모르게 떨리는 입술 때문에 발음이 자꾸만 샜다. 그 누가 이 노인을 두고서 베세리우스 5세라고 생각할까.

이거야말로 얼마 전 파탈라 왕국에서 겪었던 습격 사건이 그만큼 충격적이었다는 증거이리라.

베세리우스 5세는 이성을 잃어가고 있다. 거의 죽기 직전까지 몰렸으니 태연할 수가 없었다.

"타, 타락한 전직 용사 마라엘! 놈을 막아야만 합니다! 저에게, 저에게 전능하신 아버지 신의 힘을····!"

게다가 지금 베세리우스 5세가 말하는 것처럼 습격의 주체가 자그마치 전직 용사였다.

오오, 마라엘! 한때 위대함으로 칭송됐던 그 이름!

하지만 교황의 명에 거역하고, 또 선지자를 배반하여 영구히 사라지게 된 배덕자!

"노, 놈을··· 놈을 막아야만 합니다. 제가 놈의 손에 죽게 되면 아버지 신의 종교 또한 끝나고 말 겁니다! 신성교가 끝난다고요!"

베세리우스 5세는 노망이라도 난 것처럼 발악했다. 그리고 마차를 지키고 있던 이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사실상 이번 대초원 원정은 실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지금 당장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이쪽에 현직 용사가 있는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용사 듀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다.

"그만 고정하시지요, 교황 성하. 이제 곧 용사님께서 숙영지를 꾸리신 위치에 도착할 겁니다."

추기경 중 하나가 마차의 창문을 향해 말을 뱉었다.

"그곳에 도착하기만 하면 지금의 문제는 전부 해결·····."

"이익····! 너희는 몰라! 너희가 마라엘에 대해서 뭘 알아! 아,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지만 곧바로 돌아온 것은 노인의 역정. 그리고 창문 밖으로 던져지는 잡동사니였다.

베세리우스 5세가 잡히는 대로 귀중품을 던지는 듯했다. 그 뒤부터 사람들은 베세리우스 5세를 그냥 무시했다.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흘렀을까. 베세리우스 5세의 역정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휴우, 지쳐서 잠드셨는가 보군."

"쯧! 그 영명하셨던 분께서 어쩌다가 저리 되셨는지."

"그런데 우리를 습격했던 게 진짜로 전직 용사라고 생각하시오?"

"그건···· 나도 모르겠소."

대화를 주고받던 추기경들이 민망하다는 듯 서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머릿속에 비슷한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냥 베세리우스 5세가 노망이 나서 헛소리를 뱉는 것 같다는, 아주 무례한 생각.

행군은 조용히 이어졌다. 한편, 마차 안의 베세리우스 5세는 아주 기이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아아, 아버지! 드디어 제 기도가 하늘에 닿은 겁니까? 이렇게 직접 현신해 주시다니!"

꿈이다. 이건 필시 꿈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아버지 신을 영접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방이 빛으로 휩싸인 공간에서 베세리우스 5세는 환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양팔을 벌려 아버지 신에게 안겼다.

"아해야."

"예, 아버지 신이시여."

"내 너를 구원하기 위해 특별히 이곳으로 왔노라. 내 뜻에 응하겠느냐?"

아버지 신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빛으로 휘감겨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과연 아버지 신다운 모습이시다. 그 존체를 마주하며 베세리우스 5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버지. 따르겠나이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너를 내 속에 품어 권속으로 삼겠노라."

베세리우스 5세의 몸이 서서히 빛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그는 아예 아버지 신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베세리우스 5세는 결코 볼 수 없었다.

"너는 나의 힘이 될지니."

아버지 신의 얼굴에 맺혔던 빛이 사라지는 것을, 그 속에서 요사스러운 붉은색 동공이 피어난 것을.

그리고 하얀 빛으로 가득했던 공간이 순식간에 어둠으로 반전되는 것까지. 베세리우스 5세는 무엇도 볼 수 없었다.

와그작-!

늙은이의 목에 송곳니가 박힌 것은 그때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신기하게도 더없이 안락했다.

"아흑, 아아아····! 이것이 바로 축복!"

그는 그렇게 착각 속에서 죽어갔다.

***

무식한 정권이 철왕의 어깨 위를 짧게 끊어쳤다. 그 위력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굉음이 공기를 울렸다.

꽈아아아아앙-!!

동시에 엥그루스는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제길! 무식한 놈 같으니!"

[철왕의 좌완(左腕) 완파. 피해 복구 필요. 즉시 마법을 해제할 것을 권고.]

엥그루스의 전용 마도구는 아주 정확한 진단을 내렸다. 이 녀석은 사람처럼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면, 진짜로 철왕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뜻이리라.

'철수··· 해야 하나?'

엥그루스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3개 마탑의 연합 마법 전투단은 녹색 물결에 쓸려가는 중이고, 성신교의 얼음성 공략은 지지부진한 상황.

'이건 나가리야.'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됐으니 앞으로 선지자가 제대로 돌아갈지나 의문이다.

이렇게 되면 딴 주머니를 차야 한다. 선지자 이후의 정세를 위해 전력을 보전할 필요가 있다.

"뭔 생각을 그리 하는 거지?"

하지만 문제는 바로 저 놈이다. 체스카의 칸이 이쪽을 그냥 보내줄지가 의문이었다.

"흐음, 으흐음····."

엥그루스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어떤 말을 꺼내며 거래를 걸어야 할지 머릿속으로 계속 고민했다.

가까운 곳에서 이변이 발생하고 있는 것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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