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화
피를 뒤집어쓴 악귀가 날뛴다. 신기하게도 그 악귀는 오직 인외종만을 족쳤다.
악귀가 지나갈 때마다 흡혈귀, 식인거미, 악어족 등의 신체 부위가 허공에 비산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무위.
거칠 게 없어 보였던 악귀가 멈춰 선 것은 그때였다. 어느 거대한 악어 한 마리가 그 앞을 막아선 것이다.
하지만 쉬워 보이지는 않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공방 속에서 악어는 연신 손해만 봤다.
"끄흐으으윽!"
늪지왕의 첫째 왕자. 다른 이들에게는 차기 늪지왕에 가장 가깝다는 평가를 듣던 알바게토는 신음을 흘렸다.
'멍청한 동생 놈들이 왜 이놈에게 당했는지 알겠군!'
게헤니아의 요청을 받아 참전한 이번 전투. 그 여자가 말한 바에 따르면, 이건 식은 죽 먹기와 다를 게 없는 싸움이다.
저들끼리 치고 받고 있을 때, 스리슬쩍 나타나서 뒤통수만 치면 된다고 했었지. 그래서 숟가락만 얹으려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전장에 투입되자마자 달라졌다. 지금 눈앞에서 날뛰는 칸 때문에.
"으이이익! 이 괴물 놈이···!"
악어족 출신이 인간더러 괴물을 운운하는 게 우습기는 했지만, 이건 어쩔 수 없다.
그저 지금 느끼는 감상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을 뿐이다. 실제로 지금 알바게토는 왼팔이 뽑혔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그동안 치르면서 늪지왕 혈통의 육체가 이토록 쉽게 훼손된 적이 있던가?
단연코 없었다고 장담할 수 있다. 겨우 인간 주제에 어디서 이런 힘을 뽑아냈는지 모르겠다.
'이대로는 안 돼.'
일단은 뒤로 물러나자. 대충 보아하니 지금 상대하고 있는 인간 놈의 상태는 딱히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인간의 몸으로 저런 출혈량을 견딘다고? 저렇게 제 몸을 찢으면서 전투에 임하는 주제에?
아서라, 저런 식으로 싸우면 악어족도 버티지 못한다. 가장 강력한 신체를 타고나신 늪지왕조차도 불가능하리라.
'으음, 아버님은 좀 다르려나?'
어쨌거나 저 악귀는 혼자 두면 알아서 고꾸라질 것이다. 팔 한쪽을 내준 것이 심히 불쾌했지만, 죽지 않은 게 어딘가.
'그래, 살고 봐야지.'
살아남아서 게헤니아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식은 죽 먹기라며 선동한 것은 분명 그녀의 잘못이다.
그게 고의였든 아니었든, 알바게토에게는 중요치 않았다. 그 흡혈귀의 어매로부터 뭔가를 뜯어낼 빌미가 생겼다는 게 중요할 뿐이다.
무식하게 싸움을 추구하는 것이 악어족의 본성이지만, 알바게토 정도의 위치쯤 되면 참을 줄도 알아야 한다.
'일단은 후방으로.'
터억-!
그러던 그때, 어떤 묵직한 손길이 콧잔등 위에 얹어졌다. 당연하게도 그건 칸의 손이다.
"한눈 팔면···· 후우, 뒤져야지."
숨을 몰아쉰 탓에 말이 도중에 끊겼지만, 칸의 목소리는 꼭 지옥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지옥의 밑바닥에 살고 있는 짐승 정도는 돼야 저렇게 갈라진 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성대까지 망가지기라도 한 걸까? 어쨌거나 알바게토는 뒤로 몸을 빼려 했다. 후퇴를 결정한 참이니까.
"······!!"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채 자신을 바라보는 칸 때문이다.
핏덩이가 덕지덕지 붙어있어 얼굴 전체가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더러운 머리카락 사이로 살벌하게 빛나는 눈동자.
저것만큼은 아주 선명하게 보인다. 아마 저 눈과 마주쳤을 때부터인 것 같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은.
"흐읍! 우, 움직여! 이 병신아, 움직이라고!"
멍청하게도 알바게토는 제 몸뚱이를 향해 욕설을 뱉었다. 그에 그치지 않고 하나 남은 오른팔로 허벅지를 찍었다.
주먹이 허벅지 근육을 뭉개며 신호를 전달했다. 그럼에도 몸뚱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마주하며 칸이 씨익 웃었다. 호선으로 갈라진 입술 사이로 피에 절은 건치가 드러났다.
"너도 똑같구나."
말을 뱉을 때마다 핏물이 뚝뚝 떨어졌고, 핏발 선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다. 그와 동시에 <감정 파동>이 전개됐다.
지이이이이이이이잉······!
제멋대로 최고 출력을 또 다시 갱신하고 있는 <감정 파동>. 이제는 칸도 걷잡을 수 없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형국, 브레이크가 망가진 폭주 기관차, 시위를 떠난 화살.
뭐라고 불러도 좋다. 이미 분노의 격류에 몸을 맡긴 칸은 제 몸을 연료로 삼아 시원하게 달리는 중이니까.
"게헤니아는 어디에 있지? 아니, 그냥 대답하지 마. 내가 직접 찾아도 되겠어. 어차피 여기 어딘가에 있겠지."
그렇게 혼자 자문자답하며 칸은 양손으로 알바게토의 악어 주둥이를 벌렸다.
"즈, 즘깐만!"
그때까지 알바게토가 한 것이라고는 어눌한 발음으로 다급히 말문을 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딱 그 세 음절이 알바게토가 뱉을 수 있는 마지막 단어였다.
푸화아악-!
살벌한 소리와 함께 길쭉하고 두꺼운 혓바닥이 그대로 뽑혔기 때문이다.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졌다.
"이걸로 줄넘기를 해도 되겠는데?"
그 모든 핏물을 뒤집어쓰면서도 칸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대신에 혓바닥을 바닥에 내팽개치며 <수동탄>을 손바닥에 올렸다.
"너희 늪지왕 혈통과도 참 악연이군. 네놈까지 합하면 내 손에 죽는 왕자님만 모두 셋인가?"
"끄흐읍-! 어흐억, 으르븗···!"
"옹알이는 천국에 올라가서 하라고, 왕자님."
그 순간 <수동탄>이 알바게토의 아가리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알바게토는 좋지 않은 느낌을 감지했다.
하지만 이미 잔뜩 굳은 몸뚱이는 전혀 말을 듣지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칸의 눈깔을 뽑아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 또한 머릿속의 상상에 불과할 뿐이다. 실제로 행동에 옮길 수는 없었다.
이윽고 알바게토는 속에서 무언가 터지는 것을 느꼈다. 뒤이어 짜릿한 번개가 혓바닥이 뜯겨나간 부분을 타고 전해졌다.
"아흐야아아악──!"
생전 처음 느끼는 통증. 정말 미치도록 아팠다. 그것이 알바게토가 기억하는 마지막 생각이 됐다.
축 늘어진 알바게토의 시체를 멀찍이 던져버리며 칸은 주변을 둘러봤다. 칸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는 인외종들은 저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마치 석상으로 변한 듯했다. 개중에는 톨칸 영감의 형상을 가진 흡혈귀들도 있었다.
"·····."
칸은 애써 익숙한 얼굴을 회피하며 게헤니아를 찾기 위해 연신 고개를 돌렸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분명 보기만 해도 느낌이 올 것이다.
흡혈귀의 어머니로 불리는 여자가 존재감이 희미할 리가 없으니까. 그러던 그때, 하늘 위에 뜬 붉은 달에서 다시 한 번 기운이 방출됐다.
'성가셔.'
칸은 반사적으로 <태극 파동>을 펼쳐 모든 기운을 흘려냈다. 지금 날아온 붉은 달의 기운은 최초에 방출됐던 것에 비해 훨씬 미약했다.
최초의 기운만 특별했던 걸까? 지금으로써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수색이 계속 이어졌다. 어느새 칸은 오크 기마대와 멀찍이 떨어진 위치까지 도달한 상태.
주변에 보이는 것은 온통 인외종뿐이다. 보이는 족족 죽이면서 앞으로 전진했지만, 어째선지 손이 잘 가지 않는 부류도 존재했다.
"칸! 나다, 톨칸! 나를 못 알아보는 거냐!"
"이, 이익···! 배은망덕한 녀석! 내가 얼마나 신경 써서 용병 일을 가르쳐 줬는데!"
"아아, 칸. 너로구나. 너무나도 보고 싶었어."
그 부류는 당연하게도 톨칸의 형상을 갖춘 흡혈귀들. 차마 무참하게 선을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다른 인외종을 상대하는 칸의 손속에는 짜증이 잔뜩 묻어났다. 그리고 그에 비례하여 점점 더 잔인해졌다.
평소 같았으면 숨통만 끊고 말았을 텐데, 지금은 일부러 비효율적으로 주먹을 휘두르는 중이다.
"끄이이이익····!"
"오지 마! 이 괴, 괴물! 오지 마아아아악····!"
"사, 살려줘! 나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더 많은 고통, 더 처절한 절망, 영원히 죽을 수 있다는 공포.
지금 줄 수 있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을 선사하려 한다. 오직 그런 생각만이 지금의 칸을 움직이고 있다.
그럴수록 신체는 빠르게 한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음에도 칸은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싸움을 끝내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만큼 마음이 여유롭지는 않았다. 핏물이 잔뜩 맺힌 칸의 눈동자는 분명 다급함을 담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 붉은 달이 만개하며 빛을 뿌려댔다. 사방으로 흩어졌던 빛무리는 이내 어느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너구나."
그 달빛을 받고 있는 여자. 그녀는 팔자 좋게 양산을 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의자에 앉아 있기까지 했다.
그런 그녀의 뒤에는 집사복 차림의 남자가 공손한 자세로 칸을 응시하고 있다. 얍삽한 인상이다.
어쨌거나 드디어 찾은 것 같다.
"네가 게헤니아야."
지금까지 눈에 띄지 않았던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다만, 그딴 걸 고민할 겨를이 없다. 찾았으면 된 거다.
칸은 단숨에 허공을 밟고 날아가려 했다. 하지만 마치 노리고 있었다는 듯 방해꾼들이 등장했다.
이놈들은 구면이다. 일전에 상대했던 다섯 명의 진혈. 각종 종족이 뒤섞여 있던 버러지들.
"흐하핫! 체스카의 칸! 다시 한 번 붙어보자!"
"이번에는 저번처럼 안 될 거요!"
"거트닐! 씨반! 둘 다 닥치고 전투나 준비해!"
다섯 중에 오크 진혈은 저번에 죽였으니까···· 이제 그 숫자는 모두 넷이다.
안 그래도 시간이 별로 없는데 별 같잖은 것들이 앞을 가로막는다. 칸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비켜라, 벌레."
"비키기는 뭘 비켜! 네놈을 죽이는 게 우리의 임무다!"
드워프 진혈, 거트닐이 도끼를 치켜들며 기세 좋게 대꾸했다. 하지만 칸은 신경 쓰지 않았다.
"크흐흐, 저번과 같을 거라고는 생각지 마라! 나는 그때보다 몇 배는 더 강해졌····!"
허공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한 그 순간, 거트닐의 눈앞에 칸이 나타났다. 말을 완성하기도 전에 칸의 손바닥이 거트닐의 머리통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오늘 내내 보여줬던 잔인한 손속을 그대로 재현했다.
꽈드득─!!
이어진 것은 말 그대로 분리. 거트닐의 머리가 몸통에서 뽑혔다.
거칠게 뜯긴 머리통을 따라서 척추뼈까지 함께 나열됐다. 하지만 겨우 이 정도로는 죽지 않겠지. 이 녀석은 진혈이니까.
"몇 배는 더 강해졌다고?"
칸은 의문을 던지며 살벌한 웃음을 흘렸다. 그런 그의 주먹에 맺힌 것은 유도 전류.
이 끈질긴 놈을 빠르게 끝장내기 위해 칸은 최대 출력을 구사했다. 거트닐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숯덩이가 됐다.
그에 그치지 않고 칸은 그 숯덩이를 향해 파동권을 몇 번이고 후렸다. 아예 가루가 되어 흩어지도록.
"멍청한 놈. 네가 수십 배는 더 강해져도 나는 못 이겨."
이놈들은 강한 게 아니다. 그저 바퀴벌레처럼 생명력이 질길 뿐이다.
그러던 그때, 입술을 뚫고서 끈적한 핏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어금니 사이로 살점이 씹힌다.
이건 그냥 살점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올라온 내장 조각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장 조각은 올라오지 않았었다.
'···더 빨라졌군.'
신체가 무너지는 속도에 점점 가속도가 붙고 있다. 칸은 이를 악물고서 전투에 임했다.
인간 형태의 안나, 수인족 형태의 씨반, 그리고 가장 애를 먹였던 엘프 형태의 체스토까지. 칸은 전부 죽였다.
복부에 활이 박히는 것을 감수하면서 체스토의 심장을 터트렸고, 왼쪽 다리의 힘줄이 끊기는 대신에 씨반과 안나를 불태웠다.
다시는 재기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칸은 놈들을 몇 분 사이에 놈들을 끊임없이 불태웠다.
그리고 놈들의 시체를 밟고 또 밟았다. 거트닐에게 했던 것처럼 아예 흔적도 남지 않도록.
"허억, 후욱····."
칸은 숨을 고르며 굽혔던 허리를 다시 폈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몸뚱이.
하지만 어째선지 시야는 이전보다 선명했다. 핏물 때문에 온통 붉게 보이기는 했지만, 게헤니아로 추정되는 여자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거기서 딱 기다려라, 개 같은 년."
칸은 발바닥에 파동을 담아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기나긴 악연의 마지막 챕터가 눈앞에 있다.
허공을 밟고 높이 떠올랐던 칸이 게헤니아의 코앞에서 착지했다. 아주 자연스러운, 평소에 몇 번이고 했던 동작.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지상에 착지하기 직전 칸은 발을 헛딛고서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
털썩-!
덕분에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갓난이처럼 넘어지기 않기 위해 손으로 땅을 짚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무릎이 굽혀졌다.
몸이···· 망가진 듯했다. 아주 간단한 오러 응용조차 견디지 못할 정도로 무너지고 만 것이다.
"그래요, 그게 당신에게 딱 어울리는 자세예요."
머리 위로 고혹적인 목소리가 떨어졌다. 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해골로 만들어진 의자에 게헤니아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앉아 있었다. 같잖게 턱을 세우고 있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죽탱이에 주먹을 꽂아 주고 싶군."
"어머나, 예의도 없으셔라. 첫 만남부터 그러고 싶으신가요? 악수부터 나누자고요."
"····지랄, 우리가 사이좋게 악수나 주고받을 사이인가?"
칸의 반문에 게헤니아가 입술을 비틀었다.
"물론, 우리가 그럴 사이는 아니죠. 나도 농담이나 한 번 던져봤을 뿐이랍니다."
게헤니아의 손에는 해골 하나가 거꾸로 들려 있었다. 다른 해골들과는 달리 금으로 도금된 모습이다.
"이 해골잔은 말이죠, 얼마 전에 새로 마련한 물건이에요. 참 마음에 들어요. 원래 해골잔은 해골의 주인이 생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중요하거든요."
게헤니아는 해골잔을 살살 흔들었다. 그 위에 맺혔던 붉은 달이 파문과 함께 흐트러졌다.
달콤한 혈향이 올라온다. 원래부터 좋아하는 냄새였지만, 지금은 그 정도가 더 심했다.
단순한 기쁨을 넘어 희열의 단계까지 이르렀다. 그건 아마 지금 직면한 상황 때문일 것이다.
"자, 체스카의 칸. 어서 인사하세요.
게헤니아가 해골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스승님과 해후를 나눠야죠. 내가 정말 힘들게 기회를 만들었어요."
"······."
"몰래 무덤을 파고, 관뚜껑을 열고. 그 다음에는 두개골에 생긴 구멍을 메웠죠. 강화제를 겹겹이 바르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에요."
게헤니아의 입을 통해 어떤 말이 나올 때마다 칸의 얼굴은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 년의 손에 들린 저 해골이 톨칸 영감의 것이라고? 그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어떤 것이 치밀었다.
"우웁, 푸흐으으읍····!"
그건 핏덩이요, 동시에 울화였다. 극한까지 몰린 상태에서 유난히 선명했던 시야가 한순간에 흐트러졌다.
그 왜, 마라톤을 하면 그런 게 있다고 하지 않는가. 러너스 하이였던가? 대충 꺼지기 직전의 촛불은 가장 강렬하다고 생각하면 되겠지.
칸은 눈과 귀, 코와 입, 그리고 찢어진 근육, 파열된 힘줄 등을 타고서 핏물이 폭포수처럼 흘렀다.
어깨는 축 늘어졌고, 굽혀진 허벅지에는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숨을 헐떡일 뿐이다.
"아무래도 해후를 나눌 상태는 아닌 것 같군요."
게헤니아가 해골잔에 든 핏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고는 의자에서 궁둥이를 뗐다.
천천히 걸어와 칸의 앞에서 멈춰 서는 모습. 칸은 말없이 게헤니아를 올려다봤다.
"이게 나와 당신의 눈높이 차이랍니다. 아시겠어요? 애초에 감당하지 못할 싸움은 하지 말았어야죠. 나약한 인간 주제에."
그렇게 말하며 게헤니아는 검지를 쭉 내밀었다. 이윽고 그 손가락은 칸의 이마에 닿았다.
"당신이 사랑하는 톨칸을 대신해서 말을 전해줄게요."
위이이이잉·····!
검지 끝으로 검붉은 기운이 응집됐다. 그건 붉은 달을 통해서 얻은 게헤니아의 의지였다.
"체스카의 칸, 당신은 용병 실격이에요."
그 말은 꼭 사형 선고 같았다.
타아아아앙───!!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검지 끝에 응집돼 있던 기운이 일점으로 방출됐다.
그리고 다음 순간 칸은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