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부터 플레이어-105화 (105/275)

105. 귀로(5)

“줄을 서세요!”

어디선가 들어본 말인 듯, 원화는 그렇게 소리쳤다.

원화는 산군의 치료를 돕고, 상처 입은 천지촌의 주민들을 살폈다.

그의 의술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그의 놀라운 솜씨에 감탄하였고.

원화는 땀을 흘리면서도 쉬지 않고 사람들을 치료했다.

“감사합니다.”

그들의 감사 인사에 이따금 미소를 지어주는 것이 원화의 휴식이었다.

“후우….”

사람들의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이준경에게 내가기공을 전수하며 얻은 기연으로 인해 원화 또한 강해졌고.

그것은 의술로써 이어졌다.

[<동쪽의 위대한 의원>이 당신을 향해 따뜻한 미소를 짓습니다.]

그의 후원자 또한 그런 원화를 향해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원화는.

“…….”

천지촌의 사람들을 보며 우트가르드를 떠올렸다.

우트가르드의 사람들.

이제는 베이징으로 떠난 그들 또한 이러한 일을 겪었고 겪어갈 것이었다.

‘세상은….’

갑작스레 게이트가 나타나 모든 것이 엉망이 된 세상은.

‘변하지 않는 것인가.’

다시 원래대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인가?

이 특별한 힘이 없어도 좋다.

남들의 칭송을 받지 않아도 좋다.

그저 평화로이 예전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세상을 예전처럼 되돌리거나 그런 변화를 추구하려 하지 않았다.

단 한 사람.

‘저는 바꿀 겁니다.’

이준경.

그 하나를 제외하고는.

원화의 입가에 어느새 다시금 미소가 떠올랐다.

“줄을 서세요!”

다시금 소리치는 그의 앞으로 기다란 행렬이 이어졌다.

원화는.

“따끔하실 겁니다.”

땀을 흘리며, 지쳐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

밤.

“산군.”

이준경은 다시금 그를 찾아왔다.

산군의 몸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지만, 아직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산군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야기를 피하려던 이유는.

-웅녀는 어디 있는가.

웅녀 때문이었다.

산군이 다친 이후 웅녀는 한 시도 빠지지 않고 산군과 시간을 보냈다.

마치 곧 떠나보낼 듯 지극정성인 그 모습에 눈시울이 찡할 정도였다.

그리고 산군은 그런 웅녀를 배려하듯, 이준경에게 다음에 찾아오라 이른 것이다.

“자고 있댔어.”

이준경이 말했다.

-그렇군.

산군이 고개를 들었다.

녀석의 숨소리가 간헐적으로 갈라지고, 탁했다.

녀석은.

‘죽어가고 있다.’

이건 변함없는 사실이요.

바뀌지 않는 진실이었다.

녀석을 살릴 방법은 없었다.

‘힘듭니다.’

원화 또한 녀석의 몸 상태를 살피고선 그렇게 말했다.

영수였던 녀석은 가장 최악인 광기를 집어삼켰고.

헌터이기도 한 녀석은 또 최악인 마기 또한 들이마셨다.

녀석의 겉은 멀쩡해 보일 수 있었지만, 그 속은 이미 상처 입어 갈가리 찢겨 있었다.

다시는 봉합되지 못할 만큼.

-나는 곧 죽을 것이다.

산군 또한 그 사실을 아는 듯 입을 열었다.

-너의 약속은 아직도 유효한가?

지금만큼은.

녀석의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았다.

“유효하다.”

이준경의 약속.

웅녀를 데리고 가겠다던 이야기.

-좋다. 그녀를… 부탁하마.

산군은 완전히 고개를 들어 이준경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이 순간.

녀석은 다시금, 백두산을 호령하던 제왕의 면모를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찾아왔었다.

***

산군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했다.

-그자는 너무나도 불길하면서도….

산군이 물끄러미 이준경을 바라봤다.

-친숙한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

친숙한?

이준경은 조용히 산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자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그자를 찾아갔지.

산군은 그때를 회상하는 듯.

“크릉.”

육성으로 으르렁거렸다.

그의 분노와 화가 여실히 느껴졌다.

-그자는 천지에 있었다.

“천지….”

-천지를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었지. 나는 그자에게 다가갔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

-…….

더 이상 말이 없는 산군의 목소리에 이준경이 산군을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중요한 부분이 전부 빠져있었다.

산군이 어떻게 광기를 주입받았는지, 그자는 어디로 간 것인지.

또.

‘누구인지.’

산군에게서 정보를 얻어야만 했다.

하지만.

-기억이….

산군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질 않는다.

“뭐?”

-분명… 그자를… 천지호에서 만났으나….

산군의 눈동자와 몸이 떨려오고 있었다.

이준경이 재빨리 기운을 끌어올려 녀석을 진정시켰다.

원화에게 배운 내가기공을 이용해 녀석의 몸을 안정시켰다.

떨림이 조금씩 멎는다.

-기억이… 나질 않아….

그렇게.

털썩.

녀석은 쓰러져 내렸다.

***

산군과 그 이후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녀석은 잠에 빠졌고, 자신과 원화의 노력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러던 중.

“주민들의 의견이 모였습니다.”

주민들은 마침내 선택을 시작했다.

“한국으로 향하기로 했습니다.”

정인창의 말에 이준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산군이 저런 상태가 된 상황에서 그것이 베스트였다.

어떤 선택이든 위험 속에 몸을 던지는 행위였지만.

‘한국은….’

그나마 아스가르드가 있었다.

지금쯤 밖의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이 자리를 잡을 정도의 시간은 충분했다.

이들은 또다시 위험과 수난을 겪어야 했지만, 제대로 된 방비도 할 수 없는 이곳.

천지에서 겪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었다.

“모두 준비하라고 하세요.”

이준경이 말을 전했다.

그리고.

“아저씨.”

소녀의 모습을 한 웅녀가 다가왔다.

“나랑 산군 보러 가자.”

웅녀.

그가 떼를 쓰는 아이처럼 말했다.

그녀의 눈가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산군이 자꾸만 깨어나질 않아…. 산군이 아저씨는 특별하게 생각했으니깐… 나랑 같이 가주라.”

결국, 이준경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정인창, 그리고 함께 있던 원화가 입을 다물며 웅녀를 바라보았다.

죽어가는 산군.

지금의 웅녀는 소녀의 모습과 소녀의 정신을 하고 있기에, 쉽사리 말해줄 수 없었다.

산군이.

‘죽을 것이다.’

산군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이준경 일행은 산군이 죽는 날 이곳을 떠날 것이었다.

녀석을 천지에 묻어두고, 모두를 데리고 떠날 셈이었다.

웅녀는.

“나와 가자.”

이준경이 데려갈 것이었다.

산군과의 약속이자, 이준경이 원하는 바람이기도 했다.

“응!”

웅녀는 산군에게 가자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신나 말했고.

“다녀오겠습니다.”

이준경은 일행에게 목례하며 웅녀의 손을 붙잡았다.

“…….”

“…….”

웅녀의 손을 잡고 걷는 이준경의 등.

정인창과 원화는 그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자칫 긴장을 풀면.

“하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

“산군! 산군!”

동굴로 향하는 웅녀가 소리쳤다.

신난 듯 보이는 소녀의 손에는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타버린 감자들과 딸기와 같은 과일들.

웅녀는 동굴에 올 때마다 그녀가 챙겨두었던 과일을 들고 찾아왔다.

“산군!”

쓰러져 자고 있는 산군의 얼굴에 몸을 부비는 웅녀.

“얼른 일어나서 이것 좀 먹어봐!”

웅녀가 바구니를 흔들며 산군에게 재차 말했지만.

“…….”

산군은 깨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만약 우리가 적이었다면, 산군은 아무런 것도 하지 못한 채 목숨을 잃을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산구운-.”

웅녀는 바구니를 내려놓고 산군의 얼굴에 등을 기댔다.

어느새.

“…….”

소녀는 사라졌다.

성숙한 여인.

몇 번 보지 못했던 웅녀의 본래의 모습이었다.

웅녀는 그렇게 산군의 얼굴에 등을 기대어 산군의 코를 쓸었다.

“너는 내 아버지였어.”

웅녀의 목소리도, 웅녀가 보여주었던 감정도 바뀌었다.

“너는 내 친구였고….”

웅녀의 손길이 멎었다.

“가족이었어.”

또륵.

웅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려 간 물방울이 동굴을 울렸다.

작은 물방울이 내는 거대한 울림에.

“…….”

이준경이 잠시 고개를 돌렸다.

웅녀의 목소리는 계속되었다.

“항상 고마웠어.”

물기 젖은 그녀의 목소리.

그녀는 슬픔을 가까스로 참아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지만, 그녀의 목소리만큼은 소녀였을 때와 같이 활기찼다.

산군을 안심시키려는 듯.

웅녀는 더욱 힘을 내어 말했다.

“앞으로도 잊지 않을게.”

웅녀가.

산군의 코에 몸을 기댔다.

산군의 메마른 코가 웅녀의 눈물로 적셔지고 있었다.

한참을 산군과 웅녀.

이준경은 그렇게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렇게 있었다.

“산군.”

웅녀가 고개를 들며 웃어 보였다.

마지막.

지금이 산군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렇게 그녀는 활짝 웃는 얼굴로.

“고마워.”

말했다.

사아아.

가만히 잠자고 있던 산군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뿜어져 나온 빛이 동굴을 메웠고, 이준경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산군은 지금 이 순간.

‘죽었다.’

녀석은 웅녀의 저 말을 기다렸다는 듯, 듣고 싶은 말.

들어야 한 말을 들은 채 모든 것을 놓았다.

안간힘을 써 붙잡고 있던 목숨을 놓았고 녀석의 몸에 가득했던 백두산의 정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는 셈이었다.

웅녀는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붙잡았다.

그러나.

신기루처럼 빛은 사라져갔다.

바닥으로 천천히 흡수되어 가는 빛.

산군은.

‘죽었다.’

빛은 동굴로 흡수되었다가 빠져 나왔다가를 반복했다.

그것은 마치 반딧불처럼 동굴 밖을 빠져나갔다.

웅녀는 멍하니 산군의 싸늘한 시체에 몸을 기대어 빛을 바라보았다.

이준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을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사아아.

반딧불처럼 퍼져나가는 빛.

“이게 뭐야?”

“예쁘다!”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인창이 말을 한 것인지, 산군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들은 사람들이 동굴로 찾아온 것 같았다.

아이들은 빛을 보며 신기해했고.

“아이고오!”

사람들은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아이고오!”

계속해서 들려오는 비명들.

이준경은 뒤를 돌아 동굴을 빠져나갔다.

동굴 앞에는.

“아이고! 아이고! 산군님….”

“산군님!”

사람들이 절규하며 울부짖고 있었다.

엎드려 오열하는 이들과.

서서 묵념하는 이들.

정인창과 원화는 서서 묵념하고 있었다.

천지촌의 주민들은.

“아이고!”

계속해서 소리 내어 울었다.

떠나보내려는 산군을 달래려는 듯.

사람들은 울고 또 울었다.

“크흡.”

정인창이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아내며 입술을 씹었다.

‘이들에게도.’

이준경은 그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들에게도 산군은 소중했다.

웅녀에게만 산군이 소중했던 것이 아니었다.

산군은.

천지촌의 주민 모두에게, 웅녀가 그랬듯 부모이자 가족이었으며 친구였다.

목숨을 바쳐 지켜온 천지촌.

그 주민들이 떠나기 전, 자신의 부모를 달래 보내고 있었다.

“아이고…!”

천지 가득하게 울음소리가 배어갔다.

그리고 그때.

“산군!”

동굴 안에서 웅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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