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백호단
“마력계약이란 것이… 그 내용이 어떻든 궁극적인 것은 하나지.”
여성구는 침음하며 말했다.
“너에 대한 복종과 충성… 그 내용은 각기 다르지만 결국 마력계약에 의하면 그리 따를 수밖에 없으니까.”
“…….”
“그 금광은 네가 손에 꽉 틀어쥐고 있고,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게 된다는 소리지.”
여성구가 기지개를 켰다.
“아무도 가지 않는 중국에서 생존자들을 구출해온 데다, 그자들이 모두 헌터니 국력의 상승이라 여론은 떠들고 있고…. 너는 진짜 둘도 없는 영웅이 되었는데 그 헌터들이 모두 네 부하가 된다라….”
여성구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적이 더 많아질 거다.”
힘.
힘을 가진 자는 언제나 시기나 질투의 희생양이 된다.
그저 힘을 가졌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그를 헐뜯고 끌어내리려 할 것이었다.
“모든 세력이 너를 견제하기 시작할 거야. 마력계약과 길드는 엄연히 다른 것이니까.”
길드 또한 하나의 세력을 휘하에 두는 것이지만, 마력계약과는 달랐다.
일반적인 계약이기에 강제성이 없는 길드 계약과 달리, 마력계약은 강제성이 있었으니까.
“감수해야죠. 또 어쨌든 전 아스가르드의 일원 아닌가요?”
이준경의 심드렁한 말에.
“좋네.”
여성구가 웃었다.
“어찌 되었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환한 얼굴로 이준경에게 다가왔다.
와락!
이준경을 감싸 안는 여성구.
이준경의 귓가로.
“무사히 돌아온 걸 축하한다.”
여성구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성구가 전선으로 오고 일 처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지금껏 왜 이렇게 기다렸는지 모를 정도로.
사람들은 다시금 떠날 채비를 했고.
“이번이 마지막으로 이동하는 겁니다.”
계속된 여행에 지쳤을 것 같은 천지촌 주민들을 향해 이준경이 격려의 말을 전했다.
하지만.
“이런 여행이라면 수백 번도 할 수 있겠는걸?”
“먹고! 자고! 싸고! 하는 건 그것밖에 없었는데 뭘.”
“좋아, 좋아.”
사람들은 현재 상황에 만족해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간의 휴식일 뿐이었다.
이들은 앞으로 바빠질 테고.
또.
“아우, 그래도 몸이 찌뿌둥하구만.”
“뭐라도 좀 하고 싶어.”
그들 또한 가만히 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백두산의 생활이 편안했다고 하지만, 이곳만큼은 아닐 것이다.
언제나 치열하게 살았던 그들이었기에, 좀이 쑤시는 걸 견디지 못했다.
“곧 바빠질 겁니다.”
이준경이 다시금 그들을 향해 말했다.
“그러니 쉴 수 있을 때 쉬도록 하세요.”
“알겠다고!”
“자네만 믿겠네!”
계속된 관계 속에서 여러 번 천지촌 주민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이준경.
마력계약이 아니더라도 그들은 이준경에 대한 신뢰가 생겨있었다.
“좋군.”
여성구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옆에서 말했다.
그리고, 그가 조용히 고개를 가져다 이준경의 귓가에 댔다.
“근데….”
조심스레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
“저 여자는 대체 뭐냐?”
여성구가 가르치는 자는.
‘웅녀.’
웅녀였다.
천지촌 주민들을 계속해서 챙기며 앞장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빛이 나는 듯했다.
그녀의 외모도 외모였지만, 그녀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고아했으며, 사람들이 그를 믿고 따르니 모두의 이목을 끌 만했다.
전선의 헌터들은 그녀를.
‘여신님이라고 부른댔나?’
전선에서 여자를 보는 것이 흔치 않은 데다 저 정도의 미인들이니 당연히 그렇게 이야기할 만했다.
“중국에 간 이유가 설마 저 여자 때문인 거냐?”
여성구의 장난스러운 말에.
“뭐 틀린 말은 아니네요.”
이준경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딱딱하게 굳어 당황하는 여성구.
“장난이에요.”
이준경은 그의 반응을 보고 미소 지었다.
당황한 여성구가 너털웃음을 지을 때.
“확실합니다. 이준경 씨는 웅녀 때문에 중국지역으로 향한 것이 아니에요.”
어디서 듣고 있던 것인지 정인창이 다가와 말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이준경과 여성구의 눈이 정인창을 향했다.
“왜냐면….”
다가온 정인창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준경 씨는 숨겨둔 여자가 많거든요. 웅녀까지 숨겨둔 여자였으면 억울해서 못 삽니다.”
“…….”
“…….”
잠시간 이준경은 진심으로 고민했다.
‘뒤통수 딱 한 대만 때릴까.’
정인창의 품에 안겨있던 공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
백두산에서 이곳까지 왔던 것처럼, 사슴을 타거나 걷거나 하지 않아도 됐다.
장막 위의 세상은 문명이 파괴된 멸망의 대지였고, 장막의 밑에는 아직 문명사회였으니까.
우웅.
수 대의 버스가 천지촌 주민들을 태우고 이동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창밖을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아이 중 몇몇은 아예 자동차 자체가 처음인 것 같았다.
시끄러운 활기 속에서.
덜컹.
버스가 멈춰섰다.
“도착했습니다.”
멀지 않은 곳이었기에,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두 시간.
겨우 전선에서 서울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겨우 두 시간 거리의 세상이.
“와아아….”
이토록 다르다.
사람들은 버스에서 내리며 주변을 보고 감탄했다.
아직 모든 것이 부서지지 않은 서울의 모습에 그들은 감탄하고, 경악했으며, 두려워했다.
낯선 것은 언제나 두렵다.
“웅녀. 네가 잘 챙겨….”
이준경이 웅녀를 향해 천지촌 주민들을 부탁한다 말하려 했으나.
“와아….”
모든 것을 가장 신기하게 보고 있는 것은 웅녀였다.
입을 벌리고 건물들을 둘러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커질 대로 커져 있었다.
-이것이….
산군 또한 모든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맞네.’
이준경이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산군은 백두산을 떠난 적이 없었고, 웅녀는 어릴 때 버려져 백두산에서 산군과 함께 자랐다는 것을.
그들은 이런 문명사회를 보는 것이 처음이었을 것이었다.
그들의 반응이 이해가 되었기에.
씨익.
웃음이 나왔다.
저들의 모습이 너무나 순수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정인창 씨가 천지촌 주민들을 인솔해주세요. 협회 측에서 나온 사람을 따라가면 될 겁니다.”
이준경의 말에, 정인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다른 한 명.
원화를 향해 입을 열려던 이준경은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
원화는 주변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저번에 커피 마실 때도 그러더니….’
참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인 것 같았다.
결국 정인창이 원화까지 포함해 사람들을 인솔키로 했다.
물론.
“펜리르, 정인창 씨 말 잘 따라야 해.”
펜리르도 함께.
이준경은 펜리르의 반응도 나름 기대했으나, 펜리르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그저 관심 없는 듯 무심한 눈동자로 주변을 바라보았으며.
남들이 건물을 볼 때, 녀석은.
“크릉.”
협회 건물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이준경이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도 느껴지는구나.”
다들 새로운 곳에, 아니면 고향에 돌아왔다는 이유로 감탄하고 있기에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그들이 도착한 곳은 한국의 헌터들이 밀집되어 존재하는 협회였으며.
지금 저 협회 건물에는.
‘아스가르드 영웅들인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기운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특히나 이준경은 중국에서 마력의 민감도가 극히 상승했기에.
“……….”
느낄 수 있었다.
높은 협회 건물의 창을 통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오딘.’
오딘을 말이다.
그와 이준경이 잠시 눈을 마주쳤다.
오딘은 다시금 이준경을 보았음에도 어떠한 표정도 짓지 않은 채 이준경과 천지촌 주민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나타났다.
이준경은 그것이 자신을 반겨서가 아님을 알았다.
새로운 존재들.
새로 온 존재들.
북한이라는 불모의 땅에서 오랫동안 생존하여 나타난 헌터들과, 그들을 통솔하는 웅녀와 산군에 대한 호기심으로 입가를 말아 올리고 있는 것이었다.
“크릉.”
이준경이 오딘을 바라보며 으르렁대는 펜리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펜리르.”
조용하게 말하는 이준경.
“이제부터는 명심해야 할 게 있어.”
이준경의 목소리는 낮고 강렬했다.
펜리르가 귀를 세우고선 이준경을 바라보았다.
“이빨을 드러내지 마.”
이준경은 그렇게 말하며 펜리르의 눈을 쳐다보았다.
“필요한 때에 이빨을 사용하려면 이빨을 숨기는 법을 배우도록 해. 펜리르.”
이준경의 말에 펜리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어. 준경.”
웬일인지 정확하고 또박또박한 말이었다.
펜리르는 웃었다.
더 이상 녀석의 이빨은 드러나지 않았다.
***
촤촤촤촤!
수없이 터지는 플래시 세례.
지금 이준경은 한국에서 슈퍼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천지촌 주민들은 미리 다른 곳으로 이동했기에, 플래시 세례를 받는 것은 이준경과 여성구뿐이었다.
“언더독 님!”
“이준경 씨! 현 중국과 북한 지역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생존자들은 그게 전부입니까!”
“이준경 씨! 언더독 씨!”
기자들을 이준경의 이름을 부르짖었지만, 이준경은 여성구와 함께 멈추지 않고 걸어 나갔다.
“이준경 씨! 그들은 안전한 겁니까!”
“혹여 공산주의자나 테러리스트일 확률은 없습니까!”
걸어 나가던 이준경이.
우뚝.
멈춰섰다.
그가 멈춰 서자 카메라 플래시는 더욱 빠르게 터져나갔다.
간질환자라면 이미 발작을 하고도 남았을 정도의 플래시 세례 속에서, 이준경은 눈을 똑바로 떴다.
“그들은….”
여성구는 이준경을 기다렸다.
“오랫동안 고통받아온 사람들입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려던 이준경이 입을 열었다.
“나라가 있을 때는 국가에게 고통받았고, 나라가 멸망하고선 누구도 그들을 구출해주지 않아 고통받았습니다.”
기자들은 숨을 죽이고 이준경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었다.
한 글자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기자들은 또렷한 눈망울로 이준경을 바라봤다.
“그들은 저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오랫동안 고통받았습니다.”
이준경은.
“그들에 대한 것은 제가 보증합니다. 그들은 여러분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그러니 부탁하건대….”
이준경의 목소리가 굳건하고 강렬하게 들려왔다.
이준경이 마나 스트림을 이용해 목소리를 키우고, 또렷하게 만들었다.
기자들의 심상에 꽉 박혀 그들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여러분도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
“…….”
잠시 정적이 일었다.
잠시 후.
촤촤촤촤촤촤!
전보다 더한 플래시 세례가 터져 나왔다.
더 이상 기자들은 이준경에게 질문하지 않았다.
“이준경 씨!”
“언더독!”
이준경의 이름과 별명을 부르짖으며.
“무사히 귀환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환호했다.
영웅.
아직 이명이 없는 영웅의 탄생이 지금 이 순간 싹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