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부터 플레이어-149화 (149/275)

149. 격변의 땅

검은 로브의 남자가 다가온다.

이준경을 안아 든 채.

“이준경 씨!”

정인창이 다급하게 거검을 들고 뛰쳐나갔고.

쿠웅!

“고옹즈!”

공주 또한 모습을 바꾸어 달려나갔다.

피투성이와 화상으로 얼룩진 그들이었지만, 그들의 눈에는 시뻘건 전투의 의지가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둬!”

여성구가 그들을 말리며 소리쳤다.

달려나가던 정인창과 공주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준경이 검은 로브의 남자의 손에 있었다.

구해야 한다.

정인창의 머릿속을 온통 메운 생각이었으며.

“고오옹즈!”

정인창과 감응해 정인창의 뜻을 따르는 공주에게 여성구의 목소리가 들릴 리 없었다.

“하아압!”

이가 나간 거검이 하늘에서 찍히듯 떨어졌다.

그러나.

카앙!

속절없이 튕겨질 뿐.

검은 로브의 남자는 이준경을 안아 든 채로 창을 휘둘러 정인창의 거검을 쳐내고선.

쒜에엑!

“공주야!”

공주의 허벅지에 창을 박아넣었다.

“……!”

무스펠의 창처럼 회수되어 돌아가는 검은 로브의 남자의 창.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정인창과 공주가 신음을 흘리며 검은 로브의 남자를 바라봤다.

“그만둬!”

여성구가 다시 한번 소리치며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도 검은 들려 있었으나, 그 검 끝은 바닥을 향해 있었다.

“이준경 씨를 구해야 합니다!”

정인창이 울부짖듯 소리쳤고, 백호 단원들이 늦게나마 움직이려 했지만.

지이잉.

어느새 나타난 무지갯빛 장막이 백호 단원들과 정인창, 공주를 막아섰다.

백호 단원은 당황하여 장막을 부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뭐 하는 겁니까!”

분노한 듯 소리치는 정인창, 여성구는 장막에 힘을 더해 소리조차 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준경을 안아 든 검은 로브의 남자.

그리고, 여성구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직도 서로의 창과 칼의 끝은 바닥을 향해 있었다.

“대체….”

쓰러지기 전 이준경이 했던 말과 똑같은 것.

여성구는 대체라는 말을 읊조리며 손을 떨었다.

“당신이… 왜….”

이준경은 처음에 눈치채지 못했지만, 여성구는 달랐다.

이준경과 비교할 수 없는 시간을 저자와 함께 보냈으며.

저자의 권역에 수도 없이 왔다갔다 하여 저 기운을 알았고, 저 무기.

세계에 몇 안 되는 후원급 무기인 궁니르를 알아보았다.

“오딘.”

검은 로브의 남자의 이름이었다.

스윽.

남자가 로브를 벗었다.

드러난 얼굴.

장막으로 인해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정인창이 경악하는 것이 느껴졌다.

한쪽 눈의 안대.

확실한 오딘이었다.

“대체 왜 당신이….”

여성구가 그를 향해 물었지만, 오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창을 들고 천천히 다가올 뿐이었다.

적의는 없다.

그는.

털썩.

안아 든 이준경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바닥에 누운 이준경의 팔뚝부터 핏줄기가 흘러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목 언저리에 닿은 비늘들까지.

그러나 그것들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저벅.

오딘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적의 없다는 것을 보이듯, 물러선 그는.

뚜욱.

작은 핏방울을 떨구었다.

그의 팔에서 흐르는 핏방울.

“……!”

여성구가 놀라 크게 눈을 뜰 때.

“그 녀석은 아직 쓸모가 있다.”

전과 다른, 어딘가 이질감이 드는 목소리로 오딘이 말했다.

“아스가르드를 버린 것이오?”

“살려라.”

여성구가 물었으나.

휘릭.

어느새 오딘이 있던 자리에는 검은색 까마귀 깃털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

이준경은 지독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검은 로브의 남자,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한 그에게 덤볐던 것은 무스펠의 창이 가진 폭주의 힘을 이용하려던 것이었고.

미약한 드래곤 하트와 강력해진 자신의 상태라면 로브만큼은 벗기고 자리를 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폭주한 상태에 대한 대비도 생각해 놓았었다.

지이잉.

지금도 빛을 뿜어내고 있는 멀린의 목걸이.

성장한 마나 스트림.

마지막으로 <종말의 하늘>이 주었던 후원들까지.

무스펠의 창의 마성을 이겨낼 방법을 구상해 놓았다.

“끄으윽….”

이준경은 천천히 회복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변수가 있었다면, 무스펠의 창이 머금고 있는 마성이 생각보다 컸다는 점과 그 마성이 광기와 합일 되었다는 것.

하지만 그것은.

‘오딘이….’

오른팔에 창을 찌름으로써 해소되었다.

정신을 잃고 신음하는 와중에도, 이준경의 생각은 절대로 쉬지 않았다.

오딘을 기억한다.

검은 로브의 남자, 이준경이 쫓던 그자의 정체가 오딘이라니.

그러나.

‘아니야.’

이준경은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검은 로브의 남자는 오딘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끄응….”

천천히 눈꺼풀에 빛이 비쳐 들어왔다.

이준경이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햇빛.

그리고 붉은 빛이 이준경의 시야로 들어왔다.

이준경은.

들썩.

누군가의 등에 업혀 이동하는 중이었다.

천천히 이준경이 몸을 움직였다.

“깨셨어요?”

자신을 업고 있던 것은 정인창.

이준경이 깨어난 것을 눈치챈 그가 입을 열었다.

“내려… 주세요….”

메마른 목소리로 힘겹게 입을 연 이준경.

“괜찮습니다. 좀 더 쉬세요.”

그러나 정인창은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이준경은 그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강력했던 무스펠의 마성.

검은 로브의 남자….

“오딘…!”

이준경이 탄성을 지르듯 소리 내어 이름을 말하자.

모두가 그를 쳐다봤다.

이준경의 시야에 들어오는 이들.

백호 단원들과 생존자들.

생존자들은 어느새 불어났는지 꽤 많은 수가 있는 듯했다.

“그래. 나도 봤다.”

이준경의 곁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준경은 정인창의 등에 업힌 채 고개를 돌렸다.

여성구.

“오딘이더구나.”

딱딱하게 굳은 그의 얼굴이, 자신이 본 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인천 국제공항에서 검은색 로브를 입었던 그 남자는 분명 오딘이었다.

“뭐 하시려고요?”

이준경이 손을 움직이자 정인창은 물었지만, 이준경은 말없이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두 개의 검은 조각.

세트가 사라졌던 자리에서 찾았던 검은 로브의 조각과, 오딘을 상대하며 구해낸 작은 조각이었다.

이준경이 눈을 감았다.

검은 조각에 새겨진 마력의 흔적이 느껴졌다.

집중과 집중.

흔들리는 바람처럼 이준경의 마력이 그것들을 훑었다.

“같아….”

놀랍게도 검은 조각 두 개의 마력이 정확하게 일치했다.

“뭐?”

“뭐요?”

여성구와 정인창이 동시에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두 개의 조각은 분명 같습니다. 하지만 단언컨대 두 사람은 동일인물이 아닙니다.”

이준경은 확신했다.

오딘은 자신이 찾는 검은 로브의 남자가 아니다.

그저.

“검은 로브의 남자에게 로브를 받아 입은 것 같습니다.”

“확신하는 이유는?”

여성구 또한 이준경과 같은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물어야 했다.

정확한 근거.

“세트와 전투할 때 분명 오딘은 형이랑 같이 아스가르드에서 회의를 주관하고 있었어요.”

메말랐던 이준경의 목소리가 약간의 생기를 찾았다.

“제가 중국에 갔었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오딘은 자리를 비운 적이….”

“그건, 그의 능력이라면 해결할 수 있는 것일지 몰라. 확신하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어요.”

“…….”

이준경이 지친 눈빛으로 여성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유는.

“감입니다.”

“…….”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의 정체로 예상되는 것이 있어요. 그리고 결코 오딘은 제가 쫓는 검은 로브의 남자가 아닐 겁니다.”

여성구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그 검은 로브 조각은….”

“오딘이 검은 로브의 남자의 편에 선 것이거나….”

“…….”

“모종의 이유로, 잠시 검은 로브의 남자와 함께하고 있을 수도 있겠죠.”

잊으면 안 된다.

오딘은.

“탐구심에 미친 자이니까요.”

“탐구심에 미친 자니까.”

여성구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렇다고 그가 아스가르드를… 그가 이룩한 모든 것을 이대로 버린다니. 대체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일까.”

인천 국제공항이 전소되었다.

오딘이 한국의 상황을, 격변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가 나서 이 상황을 수습하기에도 급급한 상황에, 그는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검은 로브의 남자를 따라갔다.

그가 이룩한 모든 것을, 그의 야망을.

아무리 그가 탐구심에 미친 자라고 한들 버릴 수 있을까.

“또, 그는 너를 살려 주었다.”

“…….”

말하지 않아도 안다.

마성에 집어 먹혔다고 하지만, 이준경은 이성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다.

전투의 기억이 생생했고, 오딘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자신을 살려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또… 저를 돕기도 했죠.”

또한, 생각보다 강했던 마성이 자신을 먹어치우는 것을.

오딘은 그가 가진 힘으로 막아주었다.

어깨에 박혔던 오딘의 창.

그것이 아니었다면 이준경이 완전히 정신을 차리는 것은 꽤 시간이 걸렸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후우….”

의문점들이 남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이 있었다.

“저희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정인창의 등에서 이준경이 말했다.

마침.

뚝.

사람들이 멈춰 서는 것이 느껴졌다.

백호단이 가장 앞에 서 있었고, 생존자들이 그 뒤로 섰다.

이준경이 있는 곳은 중간.

정인창의 등에 업혀 있었기에 사람들의 등에 가려 풍광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햇빛과 새빨간 빛만이 시야에 가득할 뿐이었다.

멈춰선 그들을 기다리며.

“서울로 가려고 합니다.”

정인창이 답을 주었다.

이준경은 다시금 기다리며.

“현무와 웅녀, 원화 씨는 어딨습니까?”

다른 이들의 행방을 물었다.

“그들은 서울에 있습니다.”

이준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동료들과 만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아스가르드의 몇몇과 연락이 닿았다. 오딘 때문에 아스가르드를 통할 수는 없지만 나도 나름의 대비를 해놓았다.”

미리 여성구에게 격변의 정보를 주었던 이유.

여성구는 이준경의 기대에 부응하듯 대비해 놓은 것이 있는 듯했다.

“또, 가는 길에 리그 길드를 만날 수 있을 거야.”

여성구의 웃음이 힘이 된다.

“움직이실 수 있겠습니까?”

모든 답을 구한 이준경에게 정인창이 물었다.

이준경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발을 떼었다.

아직 전투의 후유증이 남아 있었지만.

‘불사의 능력이 시작되는 건가.’

이제는 자신의 심장 어림에 완전히 자리 잡은 또 다른 심장.

드래곤 하트.

용혈석의 힘으로 만들어진 그것은, 역사의 지크프리트가 그랬듯 불사에 가까운 생명력을 준다.

이준경의 몸은 지금 이 순간에도 빠르게 치료되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지금껏 자신을 업고 움직여준 정인창에게 감사 인사를 표한 이준경이 그의 등에서 내려 땅을 밟았다.

곧추섰기에 시야가 트였다.

장신의 이준경.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

불타올라 재만 남은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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