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전쟁 준비(5)
[스륵.]
이준경은 머릿속에서 책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소리를 신경 쓰기도 전에.
화륵.
이준경이 손을 내뻗자 자연스레 불꽃이 피어났다.
반대쪽 손을 움직이자, 불꽃은 소용돌이 휘말리며 덩치를 불려갔다.
양손이 춤추듯 움직였고.
휘이이이이익!
화염의 소용돌이가 밤을 밝혔다.
하지만.
“어어어어어!”
이준경은 무언가 당황한 듯 소리치기 시작했고.
“디스펠!”
멀린의 목소리가 이어지자.
화륵.
다시금 타오르는 불길만이 남게 되었다.
긁적.
이준경이 멀린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힘의 조절에 실패했다.
바람을 만들어내는 마법은 성공적이었으나, 그 규모를 조절하지 못했다.
허나.
“대, 대단하신데요.”
멀린은 오히려 놀란 듯 이준경을 향해 말했다.
이준경이 의아한 얼굴로 멀린을 바라보았다.
조절에 실패한 마법은 생성이 되었다고 한들 실패였다.
허나.
“이건 이준경 씨의 잘못이 아니에요.”
“네?”
“제가 알려드린 마법 체계 자체가 이준경 씨의 마나를 받아들이기에 부적합했을 뿐이에요. 오히려 제가 알려드린 마법의 한계치까지 사용하신 셈이죠.”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칭찬인 거죠?”
“네.”
멀린이 단호하게 말하자 그제야 이준경이 안색을 풀었다.
“헌터들이 사용하는 마법은 두 가지가 있다고 설명드렸죠?”
익히 알고 있는 사실.
“스킬과 마법 체계를 이용한 마법입니다.”
[스륵.]
전자는 후원자에게서 받는 방식으로 고정된 위력과 확실한 성공을 장담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마법 계열 헌터라면 대부분이 스킬을 통해 마법을 발현하고, 스킬로써 발현된 마법은 안정적으로 적들을 섬멸할 수 있었다.
후자의 방식은 몇몇 괴짜 헌터들이 고안해낸 방법이었다.
“스킬의 구동원리를 익히고, 그 방식에 맞추어 만든 것이 마법 체계.”
“맞습니다.”
스킬 자체를 연구하여, 그 원리를 알아내었다.
얼핏 보면 의미 없는 행위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 장점은 극명했다.
첫 번째 마법의 위력이 고정적이지 않다는 것과, 시전자가 만들어낸 마법 체계에 따라 원래의 위력보다 더욱 강력한 위력을 낼 수 있다는 것.
물론 만들어진 마법 체계 안에서의 한계는 있었지만.
‘적들이 생각하는 위력과 전혀 다른 위력으로 공격하기 때문에….’
훨씬 효율이 좋았다.
두 번째 장점은, 후원자가 준 스킬이 아니라는 점.
그렇기에 마력을 가진 헌터라면 누구나 배울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마법 체계를 만들어낸 헌터들의 생각과는 달랐다.
그 방식이 너무 어렵고, 과도한 재능을 요구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헌터라면 마법 체계의 활용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법 체계를 이해한 마법 계열 헌터들끼리는 마법의 공유가 가능했으니, 무의미한 장점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스킬의 발동을 억제하는 스킬이 있을 시 마법의 사용이 가능하다는 점이 있었다.
“언더독 님이 가지고 있는 마나 스트림이라는 건, 제가 보기에 모든 마력을 관통하는 기본 원리나 다름없습니다.”
“…….”
“또한 지금까지 헌터들이 만들어낸 어떤 방식보다도 진보적이고 완벽하다고 할 수 있죠.”
마왕이 만들어 낸 마나 스트림.
이준경은 마법 체계를 이해하지 않아도 됐다.
그보다 더욱 상위의 방식을 이미 몸으로 체득하고 있었으니까.
“제가 만든 마법 체계가 마나 스트림보다 하위의 방식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 같습니다.”
[스륵.]
멀린의 말은 복잡했지만, 결론은 간단했다.
“제가 너무 뛰어나다는 게 문제라는 거죠?”
“…정확히는 마나 스트림이 뛰어난 거지만….”
“감사합니다.”
능글맞은 이준경의 모습에 멀린이 잠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마 며칠 안으로 원하시는 마법은 배우실 수 있을 겁니다. 마나 스트림이 대단한 것도 있지만 이준경 씨가 대단한 것도 사실입니다.”
“…….”
“마치….”
멀린이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빈 공책에 글자를 채워나가는 것 같아요. 언더독 님이 빈 종이라면 제 마법 체계는 글자입니다. 그걸 이해할 필요도 없이, 그저 입력해놓으면 사용할 수 있는 그런 느낌입니다.”
“…….”
“얼른 아서에게 가보세요.”
멀린이 이준경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정말 언더독 님의 말씀대로 두 가지 모두 수준 이상까지 도달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멀린의 재촉에 이준경이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준경이 떠나고.
“후우….”
멀린이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았다.
“이러다 밑천까지 다 털리겠는걸….”
평소 사용하는 말투가 아닌, 일반인들과 다를 바 없는 말투.
멀린은 그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다.
마법을 가르치기 시작한 첫날.
그녀가 느낀 것은.
‘비교할 수 없는 천재….’
이준경이 상상 이상의 괴물이라는 것이었다.
***
[스륵.]
계속해서 들리는 책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리.
이준경은 분명 그것을 인식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이준경이 신경 쓸 수 없도록 무언가 방해하는 것 같았다.
쒜에엑!
이준경이 찔러낸 검이 아서의 검을 스쳐 지나갔다.
“…….”
“…….”
멈춰선 둘.
아서와 이준경은 서로를 바라봤다.
“미쳤냐?”
아서의 욕설이 이준경의 집중을 깼다.
그제야 이준경이 검을 회수해냈다.
아서의 목덜미에 닿아있던 자신의 검.
그리고.
“치우시죠.”
자신의 목에 닿아있는 아서의 검.
“…….”
아서는 조금 충격이라도 받은 듯 멍한 얼굴로 이준경을 쳐다봤다.
“내가 아무리 찌르기만 사용했다고 하지만….”
이준경은 자신의 검격을 피해내 급소를 노렸다.
이건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을 실책이었다.
이준경에게 원탁의 기사들이 사용하는 검술을 알려준 것이 바로 아침이었다.
하지만 지금 열 두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 만에.
“이게 가능해?”
완숙한 검술을 펼치고 있었다.
아무리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고 한들, 아무리 천재라고 한들 이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창을 다루며 무술에 대한 이해가 있다고 해도, 형식이 있는 검술을 배우는 것은 전혀 별개다.
“이건 이상해.”
아서는 확정하듯 말했다.
“이건 정상이 아니야.”
[스륵.]
그의 경악이 절실히 느껴졌다.
이준경 또한 마찬가지였다.
‘방금….’
아서와 대련하며 자신이 느꼈던 감각.
그건 분명 자신 또한 이상하다고 느낄만한 것이었다.
검술을 펼친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입력되어 있는 정보를 출력한다는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아서의 틈을 노릴 수 있었다.
찌르기의 궤적을 예상하고 옳은 방향으로 아서가 알려준 검술을 출력했다.
“이건….”
“멀린이 그러더군요. 빈 공책에 글씨를 써넣는 것과 비슷하다고.”
“틀린 말이 아니야.”
아서는 굳은 얼굴로 이준경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게 결코 정상적인 건 아니야. 그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서는 분명 그 말을 하려고 했다.
자신도 안다.
‘설마….’
짐작 가는 것이 없는 건 아니었다.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는 하나의 책.
이제야 인식하게 된 것인지, 새롭게 나타난 것인지 모를 한 권의 책.
그 때문일 것이다.
마치 그것이 나타난 이후 자신은 각성이라도 한 듯 달라졌다.
[스륵. 스륵. 스륵.]
계속해서 들리는 책 페이지 넘어가는 소리.
이준경이 마침내 그것을 인식하여 아서에게 말하려 했지만.
“깨어난 건가.”
“깨어나다….”
“너는 미래에서 왔다고 했지.”
아서가 이준경의 비밀을 상기하며 말했다.
그 탓에 이준경은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종이 넘기는 소리는 이준경의 정신에서 멀어졌다.
“어쩌면 너는 이 검술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군.”
“……!”
“너는 이미 학습한 것을 답습하는 것뿐이야. 그렇다면 이해가 돼. 빈 공책에 글씨를 써넣는 것이 아니라.”
이준경이 마른 입술을 적시며 말했다.
“적혀져 있는 글씨를 일깨운다.”
“…….”
아서와 이준경이 다시금 서로를 보며 침묵했다.
하지만.
“뭐 좋아.”
아서는 그답게 고개를 한 번 휘젓고선 원래의 얼굴로 돌아왔다.
“비장의 카드가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
그는 어떠한 질투도 없는 듯, 천천히 이준경을 바라보며 검을 들었다.
“잘 봐둬. 이것도 네가 알고 있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아서의 검이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
아서의 검은 뭉뚝한 철검이 아닌, 전설 속의 명검과도 같은 모습을 발하고 있었다.
그의 엑스칼리버처럼.
“검술이나 창술이나 기본은 같아. 네가 이걸 완벽히 사용할 수 있다면….”
아서의 검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슬로우 모션인 듯 느릿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
아서의 목소리만큼은 똑바로 들렸다.
“네 창술에도 대입할 수 있을 거다.”
쒜엑!
스쳐 지나간 바람.
“이게 펜드래곤 왕가의 검술이다.”
이준경의 시선이 하늘을 바라봤다.
“달이….”
갈라지고 있었다.
[사가각.]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리가 아닌, 다른 소리.
마치 글씨를 종이에 써넣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
한 달이 흘렀다.
“와아아아!”
이준경을 바라보며 환호하는 시민들.
이준경은 그들에게 두려움을 받고자 환상을 이용해 공포를 심어두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이준경의 예상과는 달랐다.
더욱 환호하며 열광했다.
이준경이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으니.
‘사람들은 두려움 속에서 경외를 얻는다.’
두려움을 준다고 공포로 몸을 떠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존경하며 우러러보았다.
다행이라면 이제 웅녀를 마녀라 부르지 않는 것이었다.
원래 오딘에게 붙잡혀 있던 웅녀는 사람들을 치료하는데 많은 것을 투자했고, 그들은 그 기억을 일깨웠다.
웅녀는 마녀가 아니었다.
“신녀님! 신녀! 신녀!”
신녀.
웃기게도 마녀는 단시간에 신녀가 되었다.
모여 있는 사람들.
그리고.
“…….”
경기도에 모여 있는 최정상급 헌터들도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한 달.
멀린이 힘을 회복하는데 필요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때가 왔다.
전쟁을 시작하기에는 이르지만, 전쟁의 준비를 철저히 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오늘.”
웅녀가 모두의 대표로 입을 열었다.
“저희는 떠납니다.”
“…….”
사람들의 환호는 곧 정적이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여러분을 지켜줄 수는 없습니다.”
웅녀의 말은 절망적이었지만, 사람들은 침착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힘으로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선언과도 같은 말.
“할 수 있습니다!”
“저희도 열심히 했습니다!”
“신녀! 신녀!”
사람들의 반응에 웅녀가 작게 미소 지었다.
한 달 동안, 웅녀는 이날을 대비했다.
자신들이 떠나는 날, 이들이 버림받았다고 느끼지 않도록.
이들이 앞으로의 삶을 자주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했기에 결실을 맺었다.
“하지만 약속하겠습니다.”
웅녀가 슬쩍 이준경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정상으로 돌려놓겠다고.”
웅녀의 말이 끝나자 정적이 이어졌다.
그리고 곧.
“와아아아아아!”
우렁찬 함성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이들은 오늘 희망을 확신했다.
***
“주변 몬스터들은 모두 정리했습니다. 아마 한두 달 정도는 크게 문제없겠죠.”
정인창과 원화가 이준경을 향해 말했다.
얼굴이 좋아 보이는 그들.
“후원을 얼마나 받은 겁니까?”
또한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힘이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죽자고 몬스터만 사냥했더니 좀 많이 받긴 했습니다.”
“이제 죽은 사람도 살려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허….”
이준경이 작게 탄식하며 둘을 보았다.
곧 하늘을 바라보는 이준경의 눈.
‘총애는 이런 거 아니냐?’
총애를 받는 헌터에게 후원자는 관대한 후원을 베푼다.
<종말의 하늘>, 녀석은 가진 후원자라고는 자신밖에 없음에도 제대로 된 후원을 주지 않는다.
이 불공평한 대우에 이준경이 눈살을 찌푸릴 때.
[<종말의 하늘>이 그대를 독려합니다.]
조금은 진지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준경이 그제야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웃었다.
“가죠.”
전쟁 준비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마왕을 쓰러트리기 위한 전쟁 준비, 그 첫 번째는.
“일본으로.”
일본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