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 비극의 끝(6)
“그 꼴로 게헤나에 들어가겠다는 거냐?”
제우스의 싸늘한 목소리가 정인창의 귓전을 울렸다.
“짐? 아니 짐도 못 된다. 들어가자마자 죽고 말겠지.”
그가 그토록 싸늘하게 말하는 이유는 혹여라도 정인창이 잘못된 선택을 할까 염려하는 마음에서였다.
누가 그의 마음을 모를까.
싹트기 시작한 불안은 몸을 떨게 했다.
“헤임달.”
제우스가 헤임달을 불렀다.
“말해 봐라. 마왕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은 여기 그 누구도 아닌 너다.”
그에게 묻는다.
“그가 정말로 후원자와 같은 것을 바라지 않을 거로 생각하나?”
제우스의 물음.
그건 헤임달의 뇌리를 흔들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다.
여태까지 그저 마왕이 죽고 싶어 한다고만 생각했다.
그 영겁의 저주를 풀고 세상을 구원한 채 사라지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능성은….”
그런 마왕이 실은 새로운 그릇을 만들려던 것이었다면?
영겁 회귀만을 끝낸 채 다시금 인생을 살아보고 싶어 하는 것이라면?
그도 아니라면.
‘내가 모르는 것이 있을 수도 있어.’
애초에 많은 것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가 아는 정보들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이 그의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라면.
‘아니다.’
이미 자신은 그의 손아귀에 있었다.
또한, 그가 자신의 기억을 조작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모든 것이 혼란한 상태.
“가능성은 있다.”
헤임달은 결론 지었다.
모두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그렇다면.
“이준경 씨가… 위험합니다….”
정인창이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애초에 게헤나에 들어간 거 자체가 위험한 일이야.”
“……….”
“우리가 들어간다고 뭐가 달라지진 않을 거라고.”
제우스가 주먹을 쥐며 말했다.
그 순간에도 그의 머리는 쉬지 않고 회전하고 있었다.
이준경을 도울 방법.
방법.
“방법은….”
멀린의 목소리.
“있습니다!”
세안키드의 목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두 명의 여자는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헤임달의 이야기에 빠져 고민할 때, 그들은 다른 것을 고민한 모양이었다.
“방법이 있다고?”
아서 또한 놀라며 물었다.
“아직 해결 못한 의문이 있지 않습니까!”
세안키드가 말했다.
“후원자들!”
“뭐?”
당황해하는 사람들을 향해 멀린이 나아가며 말했다.
“이준경 씨를 죽이라고 미션이 발생했었습니다.”
“그런데?”
“하지만 그의 편을 들어준 후원자들이 있었죠.”
확실히.
멀린과 아서.
호루스를 비롯한 이들의 후원자들은 이준경을 도우라 미션을 내렸다.
“그게 만약, 종말의 하늘과 같은 편이어서가 아니라….”
“이준경을 살리고 싶었다면!”
제우스가 무언가를 눈치챈 듯 소리쳤다.
“방법이 있겠어!”
***
“정신 차리거라. 아이야.”
무지개의 갑옷을 입은 거인이 그렇게 말했으나.
콰아아앙!
그의 앞에서 다시 불꽃이 작열했다.
타오르는 열기에 그가 한 발자국 물러섰다.
“무지개의 수호자. 후원을 모두 거둔 거냐?”
마왕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울려왔다.
“눈엣가시 같은 것들.”
마왕의 말에.
“네 수를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는 대답했다.
다시금 연기가 가라앉았을 때, 그의 등 뒤로 다른 거인들이 보였다.
모두 제대로 된 무장을 한 채 완벽한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너의 시간 회귀를 우리가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던 건가?”
태양처럼 밝은 빛을 내뿜는 거인이 말했다.
“네 녀석이 너의 동료들을 강화시키기 위해 너의 힘을 조금씩 나눠주었다는 걸 안다.”
“그리고 그건 우리에게도 영향을 주었지.”
온몸이 물처럼 흐물거리는 거인이 말을 이었다.
“네 녀석을 막기 위한 기회를 잡고 있었다.”
단단한 암석 같은 거인.
그는 물처럼 흐물거리는 거인의 옆에서 거대한 검을 든 채 서 있었다.
콰아아앙!
다시금 이준경의 주먹이 내리꽂혔다.
“그래서?”
마왕의 목소리가 이준경의 뒤편에서 들렸다.
“이미 늦었다.”
“아직 모르는 일.”
무지개의 수호자라고 불렸던 거인이 손을 내뻗었다.
무지개가 갈라져 화염 거인을 얽매기 시작했다.
“네 녀석의 뜻대로 될 성싶으냐.”
마왕을 향해 싸늘한 목소리로 말한 무지개의 거인이.
“정신 차리거라. 아이야.”
이준경을 막아선 채 그렇게 말했다.
“소용없는 짓이다. 이미 폭주한 녀석에게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아.”
마왕이 그렇게 말하며 웃을 때.
콰드드드득!
시공간이 잘리듯 섬광이 일었다.
마왕의 몸뚱이가 반으로 갈라지는 듯한 환영이 보였다.
하지만.
째에엥!
어느새 마왕은 온전한 모습 그대로 이준경의 머리 위를 날고 있었다.
“태초의 힘도 없는 너희가 나를 죽일 성싶으냐.”
비웃음 어린 마왕의 목소리.
“너희가 나의 힘에 영향을 받았다는 건 진작 알고 있던 일이다. 너희도 내 계획을 알고 있으면서 관여하지 못한 이유가 이것 아닌가.”
그의 손에서 검은 불꽃이 일렁였다.
태초의 힘.
그것이 포함된 화염.
“너희는 나를 죽일 수 없고, 나는 너희를 죽일 수 있다.”
“……!”
분노한 태양의 거인이 주먹을 내지를 때였다.
째에에엥!
다시금 공간이 터져나가는 소리가 울렸다.
“이런…!”
무지개의 수호자.
그가 당혹성을 터트리며 한 발자국 물러섰다.
분명 이준경을 옥죄고 있어야 할 무지개들이 깨어져 그에게로 돌아왔다.
“이미 녀석은 완성이 목전에 있다.”
마왕의 목소리가 다시금 그들에게로 들려왔다.
“그러니 너희를 묵인해 준 나의 관용에 감사하며 자결하는 게 어떠냐.”
싸늘하고도 비웃음 어린 마왕의 목소리는 마치 사형 선고처럼 느껴졌다.
거인들은 동요하지 않고 각자의 무기를 들며 자세를 취했다.
고오오.
후원자.
태초의 세상에서 이어져 지금까지 살아온 괴물 중의 괴물들.
그들의 진정한 힘이 모여들며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구구궁!
게헤나 전체가 진동하며 무너져 내릴 듯한 충격이 일었다.
“정신 차리거라!”
다시금 무지개의 수호자가 소리치며 이준경에게로 뛰어들 때.
“으아아아아!”
화염의 거인에게 먹혀버린 이준경이 소리쳤다.
그의 창처럼 변한 오른팔에 더욱 짙은 화염이 소용돌이 쳤다.
“잘 가라. 머저리들아.”
마치 이준경을 조종하듯, 마왕의 목소리가 들릴 때.
“……!”
무지개의 수호자, 달만큼이나 거대한 그의 동공이 흔들렸다.
***
“무슨 방법이라는 겁니까…!”
정인창이 겨우 몸을 일으키며 제우스를 향해 말했다.
“이준경 씨를 구할 수만 있다면….”
그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마력 한 점 남지 않은 몸.
그 탈력감에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 것이 분명함에도 그는 몸을 꼿꼿이 세웠다.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정인창의 말에 제우스가 볼을 긁적였다.
“도박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하겠습니다.”
“일이 잘못되면….”
제우스가 정인창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오히려 이준경이 더 위험할 수도 있다.”
“…….”
그제야 정인창이 입을 닫았다.
“마왕의 목적조차 확실치 않은 상황이야. 하지만 나는… 왜인지 마왕의 목적이 이준경의 손에 의해 죽임당하는 것이 아닐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제우스가 말했다.
“도박이야. 이건….”
그가 생각한 방법이 무엇일까.
“게헤나에 들어가는 거다.”
“……그게…?”
제우스의 말에 정인창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렇군.”
헤임달은 제우스의 뜻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들에게 걸어보자는 것인가?”
“그래.”
“자, 잠깐만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정인창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헤임달과 제우스가 그를 보며 동시에 말했다.
“후원자들에게 걸어보자는 거다.”
“후원자들에게 걸어보는 거다.”
제우스가 말했다.
“후원자 중 몇몇은 분명 이준경의 편을 들었어. 그리고 우린 그게 <종말의 하늘>과의 친분이나 그런 것으로 생각했지.”
제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닐 수도… 아니 아닐 거다.”
그는 생각을 정리해가며 더욱 확신을 얻은 듯했다.
“후원자들이 편을 든 것은 이준경이 맞을 거야. <종말의 하늘>의 목적은 모든 후원자의 말살. 그들이 어떠한 이유로든 종말의 하늘. 아니 마왕의 편을 들지는 않았을 거다.”
“그렇다면….”
“이준경을 살리려 한 거다.”
정인창 또한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
“이준경이 마왕을 막는데 중요한 열쇠라는 것 확실할 거야. 녀석이 가진 힘은 진짜배기니까.”
“…….”
“후원자들은 그런 녀석을 이용해 마왕을 막으려는 거다.”
제우스가 더욱 확신을 얻고 말했다.
“만약 우리가 게헤나로 들어간다면. 후원자들과 직접 대면할 수 있어. 이미 후원자가 죽었다면 개죽음이겠지만… 잘만 한다면.”
제우스가 주먹을 쥐었다.
“후원자와 조우할 거다.”
“그리고 우리는 몸을 빼앗기는 거군요.”
정인창이 말했다.
몸을 빼앗긴다.
그토록 걱정했던 일이지만,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맞아. 후원자에게 육체가 제대로 주어진다면 분명 더욱 강해질 것이야. 우리는 몸을 바치고, 후원자는….”
“이준경 씨와 힘을 합쳐 마왕을 격퇴한다. 맞습니까?”
제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했듯 도박이다. 후원자들이 우리의 생각과 다를 수도, 우리에게 협조하지 않을 수도 있어.”
세상의 존망을 거는 도박.
만일 지금의 생각이 하나라도 틀렸다면, 더욱더 최악의 결과가 벌어질 것이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
“하겠습니다.”
정인창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저는 마력을 빼앗겼기에… 이미 후원자가 사라졌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가겠습니다.”
정인창이 어느새 등을 보이고 있었다.
“이준경 씨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
소용돌이치는 화염 거인의 창.
그것이.
“무슨….”
마왕의 오른팔을 꿰뚫었다.
너무도 찰나의 순간이었다.
당연하게도 후원자들을 향해 공격해 들어갈 것이라 생각한 창이 마왕을 향한 것도.
공간을 뛰어넘듯 마왕의 팔을 갈라버린 것도.
너무도 찰나의 순간이었다.
마왕조차 감지하지 못했던 빠르기.
하지만 공격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화르르륵!
화염 거인을 이루던 거대한 불꽃들이 꿰뚫린 마왕의 팔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시금 재구성하여 사슬의 형태로 변모하여 그를 옭아매었다.
거인의 화염이 그에게로 향했기에, 어느새 이준경의 몸집은 점점 더 작아지기 시작했다.
“지금!”
이준경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그들에게 향했다.
“지금 공격하라고!”
악에 받친 그의 목소리가.
“마왕을 공격해!”
무지개의 수호자와 후원자들에게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