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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백로황자
째깍째깍.
고요한 방 안. 고급 원목으로 다듬어진 괘종시계만이 일정한 속도로 돌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황금과 백색으로 꾸며진 휘장 속에 누워 있는 한 소년이 있었다.
이제 갓 12살이 된 소년의 이름은 쥬다스 루바르잔 아르키디온.
루바르잔 황조의 세 황자 중 1황자였다.
황조 적통의 핏줄임을 알리는 귀한 은발과 금안은 3황자 중 유일하게 물려받은 색깔이다.
나이를 떠나 지닌 능력과 상징성을 중시 여기는 루바르잔이었기에 우수하게 타고난 외향으로 인해 날 때부터 주목받던 아이였다.
그러나 주어진 것과 다르게 평소 몸이 허약하고 성미가 얌전하여 뭇사람들의 걱정을 사곤 했다.
특히 타고나길 약하게 타고난 탓에 어느 순간부터 체구가 크질 않아 비정상적으로 작고 피부가 창백하리만치 희었다.
게다가 백치마냥 입을 거의 열지 않고 움직임이 없으니 이는 마치 잘 만들어진 인형과도 같았다.
그리하여 1황자는 적정 나이가 지나도록 황태자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식은땀에 젖어 늘어진 긴 머리와 앙상하게 마른 팔다리가 더욱 황자를 여리고 병약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겉보기엔 본래 나이 12살이 아니라 7살 수준으로 보일 정도로 작았으며, 성격마저 유약하니 자연히 황자를 안 좋게 보는 무리가 늘었다.
이를 염려한 현 황이 고심하여 선택한 결과가 바로 ‘학원 루바흐’였다. 이는 성년식 이전의 귀족부터 황족까지의 모든 아이가 시험을 치르고 공부하는 재능 개발 학원이었다.
루바르잔(Ruvarsan) 제국이 최초로 만든 국제기관답게 그 이름 역시 학원 루바흐(Ruvar-H).
정치, 경제, 병법, 지리, 심지어 약학이나 마법까지 다루어 익히고 겨룰 수 있다. 이어 누구나 성실하게 교육에 임하면, 그에 준하는 재능을 개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타고난 재능을 걸러내어 빛나게 해주고, 부족한 부분을 교육을 통해 학습한다.
이것이 황제가 장자를 위해 결정한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또 아프신 걸까요?”
“워낙 병약하신 분이라.”
“상황이 상황이니, 견디기 힘드셨을 수도 있겠어요.”
1황자 쥬다스는 그 안에서도 영 평판이 좋지 않았다. 또래보다 작고 볼품없는 몸과 백치를 의심케 하는 조용한 태도는 잘난 핏줄의 아이들 사이에 어울리기 어려웠다.
직접적인 괴롭힘이 없었을 뿐이지, 그는 이미 학원 내에서 외톨이었다.
자기 파벌조차 만들지 못한 1황자에게는 형편없는 평판만 주어졌다. 이미 황태자 자리는 그와 상관없다시피 생각하는 자들도 파다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도 그러고 있었지만 쥬다스는 걸핏하면 쓰러져 며칠이고 수업에 참석하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잘 자라지 않는 신체는 심지어 병약하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1황자라는 신분에 관심을 갖는 아이도 많았지만 입학한 지 2년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며 관심에 대한 반응을 보이지 않은 탓에 점점 그 입지는 좁아져 갔다.
심지어 생모가 이미 죽어 외척세력도 없었다. 병약하고 무능하며 누가 뭐라 해도 그저 웅크리고만 있는 황자에게 돌아오는 건 무시와 차디찬 냉대뿐이었다.
학교 안에는 어느덧 그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자이며 벙어리처럼 입 한 번 뻥끗하지 못하는 장애아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주인이 쓰러져 있더라도 청결은 중요했기에, 청소를 깔끔하게 끝마친 메이드들은 그런 그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그렇지만 쓰러지신 지 벌써 이틀째인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군요.”
“과연 ‘백로황자’님…….”
“쉿. 누가 들을라.”
백로(白鷺)황자.
황제의 정통임을 상징하는 그 고귀한 은발을 의미하는 별칭이기도 했으나, 따로 무리와 어울리지 못하고 동 떨어지는 모습을 백로로 빗대어 놀리는 뜻도 섞여 있었다.
감히 대놓고 제국의 1황자를 핍박하진 못하더라도 충분히 조롱 섞인 별명.
메이드들은 이에 대해 수군거리며 방을 나섰다.
적막을 찾은 휘장 안에서 쥬다스의 손끝이 움찔 움직인 건 그때였다.
죽은 듯 감겨 있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천천히 그 안에 숨겨진 금안을 드러냈다. 여전히 잠이 덜 깨어 초점을 잃은 금색의 눈동자가 천장을 향했다.
“……?”
그는 멍하니 작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목을 매만졌다. 주름이 하나 없는 매끈한 목에선 죽을 것처럼 튀어나오던 기침이 깨끗이 멎어 있었다.
몸에 힘이 없긴 했지만, 그가 기억하고 있는 최근은 이보다 더 힘없고 괴로운 상태였으니 오히려 상쾌하기까지 했다.
쥬다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스르륵.
휘장을 걷고 두 발을 카펫에 디딘다. 그러고 나서 뭔가 한층 더 이상함을 깨달았다. 쥬다스는 양손을 들어 내려다보곤, 이내 천장과 바닥을 번갈아 훑어보았다.
“이곳은 대체……?”
의아함에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쥬다스는 흠칫 어깨를 좁히며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기억 속 거칠고 갈라진 감촉 대신, 보들보들하고 말랑한 어린 소년의 입술이 손끝에 닿았다.
쥬다스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움직임에 따라 긴 은발이 사락 어깨를 타고 흘렀다.
“허-”
이내 어린 소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탄식 소리가 흘러나왔다.
쥬다스의 시선 끝에는 그 자신을 비추는 탁상 거울이 놓여 있었다. 가까이 가볼 필요도 없이 선명하게 비친 모습에, 그는 연이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이 늙은이가 드디어 꿈을 꾸는 게로구나.”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고귀한 긴 은발에 금색 눈동자, 희다 못해 창백하기까지 한 피부에 제대로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의 육체까지.
루바르잔 황조의 직계 혈통을 이은 제 1황자 쥬다스 루바르잔 아르키디온, 아니, 지금은 그 이름이 아니었다.
분명 겉모습은 그대로였으나, 그의 모습을 입은 것은 다름 아닌.
얼마 전 죽음을 맞이한 대현자 ‘이그레트’였다.
***
이그레트, 이제는 쥬다스의 육신으로 살아가게 된 그는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한동안 거울만 들여다보았다.
한평생 대현자로서의 삶을 살아왔던 그였으나, 도무지 이번과 같은 일은 겪은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사람의 생은 단 한 번뿐이다.
늙지 않는 정령과 달리 나이를 먹으면 늙고, 병들어 죽는다. 그것은 단순하리만큼 당연한 자연의 섭리였다.
4대 원소 정령을 모두 다루며 가공할 힘과 지혜, 그 모든 것을 갖추고 있던 이그레트 역시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다.
겨우 100년도 채우지 못한 92세의 삶을 마지막으로 그는 눈을 감았었다.
분명 그렇게 끝났던 일이었다.
“영 어렵구만. 혹 이 어린 것의 몸에 빙의라도 한 것인고……?”
고민할 때면 늘 보이던 버릇대로, 그는 턱을 짚은 채 손가락으로 하관을 툭툭 두들겼다.
거울에 비친 금안은 선명히 빛나며 그 자신을 마주보고 있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생소한 기분에 그는 난처하게 웃었다.
“이것 참. 꼭 유령이라도 앞에 둔 기분일세. 허허.”
턱을 괸 쪽과 반대 손을 들어 가뿐히 주먹을 쥐었다 펴자 그 안에서 청량한 바람이 훅 불어왔다.
후우웅.
갑작스레 일어난 돌풍에 그의 긴 은발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돌풍 끝에 손바닥 위로 나타난 것은 작은 날개를 단 소녀 모습의 정령이었다.
「……이그레트!」
연두빛 머리를 길게 두 갈래로 땋아 내린 정령은 환하게 웃으며 날아올라 그의 뺨에 답삭 달라붙었다.
눈물마저 글썽이며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정령의 태도에 쥬다스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알아봐 주는구나, 유니.”
「당연하지, 내 ‘이그레트’인걸.」
유니의 주변으로 수많은 바람이 모여들었다. 삽시간에 방 안에 청량감이 가득 찼다.
바람이 따르는 정령, 바람의 정령왕 유니의 기쁨은 곧 그녀의 의지를 따라 기분 좋은 바람을 일으켰다.
「반드시 곁에 있겠다고 약속했잖아. 다시 불러줘서 기뻐.」
“…….”
「이그레트.」
유니는 그 뺨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손바닥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소녀의 모습이지만, 그녀가 가진 힘은 무려 자연의 4대 속성 중 하나.
자연현상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정령왕이란 결코 함부로 다룰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쥬다스는 겉모습이 바뀌었어도 거리낌 없이 자신을 따르는 정령왕 유니에게 깊은 감사를 느꼈다.
자신이 대현자라 했던들, 자연계의 정령들에겐 아무런 상관없었을 터였다.
오직 젊은 날 나누었던 맹세를 기억하고 그 부름에 응답한다. 정령들에게 있어 ‘이그레트’는 그저 ‘이그레트’였을 뿐.
꼭 온전히 그 자신을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따뜻한 환대에 그는 허허롭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너희와 친우가 된 것은 내겐 평생의 자랑거리였다.”
「끝난 것처럼 말하지 말라구. 바보 이그레트. 앞으로도 죽 친구란 말이야.」
“……고맙구나, 유니. 한데 말이지. 나는 분명…… 죽었다고 생각했거늘.”
쥬다스는 자그마한 손을 들어 꼼지락거렸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생판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다만 그 특이한 머리색과 눈 색을 비추어 보았을 때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
그는 길게 나풀거리는 은발을 한 줌 손에 쥐고 훑어보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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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