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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백로황자
“이건 분명 루바르한 제국 황조에서만 타고난다는 적통의 색일 터.”
「그 말대로야. 지금의 넌 이곳 황조의 직계 혈통을 이은 제1황자. 쥬다스 루바르잔 아르키디온.」
“……역시 알고 있었구만그래.”
「후후. 바람은 모든 걸 알고 있거든.」
유니는 키득 웃으며 그의 손등에 내려앉았다. 그런 그녀를 향한 쥬다스의 금안이 살짝 가라앉았다.
“한데 왜 내가 이곳에.”
「글쎄?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 봐.」
죽은 인간이 다른 육체에서 눈을 뜨는 것을 결단코 본 적 없다.
유니의 단호한 주장에 쥬다스는 점점 더 난감해졌다. 정령왕조차 모르는 일이라면, 이는 무언가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혹시 신이라도 개입된 건 아닐까.
쥬다스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그러자 유니가 파다닥 날아올라 그의 이마를 콕 찍었다.
「찡그리지 마, 이그레트.」
“흠, 이 나이부터 주름살이 늘면 곤란하겠지.”
「……그런 의미가 아니라. 넌 찡그리는 게 안 어울린단 말이야.」
유니는 입을 삐죽 내밀고 툴툴거렸다.
「애초에 그 몸은 12살밖에 안 됐고.」
겉보기엔 7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작은 체구였지만, 어쨌든 실제 육신의 나이는 12살이었다.
그 사실에 놀란 쥬다스는 눈을 살짝 크게 뜨며 탁상 거울을 돌아보았다.
작았다. 너무나도 작았다. 안쓰러울 정도로 마르고 조그만 모습에 한숨부터 흘러나왔다.
“어찌 아해를 이리 굶겼을꼬. 황손이라 하더니, 구박이라도 받는 겐가.”
「구박이라면 받는 걸로 알고 있어. 여기 또래들에게.」
“……따돌림을 받는단 말이냐?”
「응, 아마도?」
멈칫.
어떤 것도 비슷한 점이 없었던 두 개의 삶에서, 비슷한 접점이 생겨났다. 하필이면 좋지 않은 쪽으로 뻗어 나간 동질감에 쥬다스는 혀를 찼다.
대현자 ‘이그레트’의 삶에서 지긋지긋하게 겪어온 것이 바로 ‘따돌림’이었다.
동족으로부터의 배척, 배신. 이는 그에게 있어 너무나도 익숙했다.
그러한 것을 이 작은 소년이 똑같이 겪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가엾은 마음이 가슴속에 차올랐다.
쥬다스는 느릿하게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 위에 폭 얹었다.
「이그레트?」
“힘들었겠구나.”
쓰담쓰담.
스스로 자기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독이는 쥬다스의 행동에 유니는 눈을 깜빡이며 가만히 지켜보았다.
영 해괴한 모양새가 되긴 했지만, 그녀의 눈에는 이그레트의 젊은 시절이 그 위로 투영되어 보였다.
‘너희도, 쓸쓸했겠구나.’
‘그래도 다행이야.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이제 나와 함께 지내지 않을래?’
상냥한 이그레트, 유니는 과거의 잔상을 묻어두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픽 웃었다. 아무리 겉모습이 변해도, 이그레트는 이그레트였다.
「……이그레트.」
“음?”
「우린, 나는, 네 곁에 계속 있을 거야.」
자신의 머리에서 손을 내린 쥬다스가 빙긋 웃어보였다.
“……그거 고맙구나.”
「그러니까 이제 다른 생각 말고.」
포로록.
사뿐히 쥬다스의 머리 위에 내려앉은 유니가 그의 정수리를 톡톡 두들겼다.
「살아. 네가 원하는 대로.」
“으음, 그렇게 되면 이 아해는…….”
「어차피 이렇게 된 원인도 모르고, 돌릴 방법도 모르잖아? 어쩌면 다시 몸을 돌려줘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그동안은 이그레트 네가 그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거고.」
유니의 단호한 상황 정리에 쥬다스는 눈을 끔뻑거렸다.
사실이 그랬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일단 그 육신을 사용하게 된 이상 다시 본래 주인에게 넘겨줄 방도가 없었다.
대현자와 정령왕이 머리를 맞대어도 당장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는다면 이대로 사는 수밖에 없었다.
쥬다스는 난감한 얼굴을 했다.
“그렇다고 이 늙은이 멋대로 살기도 미안하잖나.”
「이그레트가 미안할 게 뭐 있어? 지금 여기에 살아 있는 건 그 애가 아니라 너인걸.」
‘살아 있다’라-
이그레트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어린아이의 얼굴 위로 떠오른 연륜 가득한 표정에 유니는 빛나는 은발 한 가닥을 붙잡아 돌리며 구시렁거렸다.
「하여튼 이그레트 넌 예전부터 늘 남만 생각하던 버릇이 있어. 이런 상황일수록 너를 위해 살아보는 것도 좋을 텐데. 응?」
“……유니.”
「알겠지, 난 무조건 이그레트 편이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연두색으로 빛나는 정령을 머리 위에 얹은 채 쥬다스는 한숨처럼 웃었다.
“알고 있단다.”
***
쥬다스가 ‘깨어난’ 이후로 사흘이 지났다.
그 사흘간 쥬다스는 수업에는 전혀 출석하지 않았다. 오로지 제 방에서 머물며 유니로부터 이것저것 정보를 수집하는 것에 집중했다.
유니가 부리는 바람의 정령들은 간만에 할 일이 생긴 것에 신이 나 온갖 정보를 긁어모아 전달해 주었다.
대충 1황자로서의 삶이 어땠는지를 이해한 쥬다스는 나흘째 되는 날 드디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학교였단 말이지. 허허, 마침 재미있는 장소구만.”
그가 괜히 대현자라 불린 것이 아니었다. 무엇이든 배우고, 학습하는 것에 열의가 있으며 그 동기를 뛰어넘을 만큼 배움에 대한 어마어마한 재능이 있었다.
단순한 두뇌 이야기가 아니었다. 마치 까마득히 펼쳐진 책장에 서적들을 정리하듯 머릿속에 모조리 입력하고 이해한다.
그건 일종의 재능, 천재(天才)였다. 그리고 그 열의와 학습은 영혼까지 각인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왔다.
쥬다스는 옷장에서 루바흐 학원 교복을 꺼내 입었다. 작은 체구를 덮다시피 한 교복은 지혜를 상징하는 남색이다. 고풍스러운 조끼와 재킷을 함께 걸치고, 금장 단추를 채워 입자 마치 유치원생이 중학교 교복을 입은 듯 어설픈 모양새가 완성되었다.
길이야 맞춤 제작을 한 듯 딱 맞았지만, 워낙 마르고 작은 체구였기에 품이 널널했다. 흘러내리려는 재킷을 힘 있게 고정시킨 쥬다스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거울을 응시했다.
“이런, 키가 좀 커야겠구나.”
「응, 또래에 비해선 많이 작아. 물론 지금의 작은 네 모습도 귀여워.」
“으응? 귀여운 건 너란다. 유니.”
여전히 자신을 어린애 대하듯 웃는 쥬다스에게 유니는 볼을 뚱하니 부풀려보였다.
「……귀여워해 주는 건 좋지만, 살아온 세월을 따지면 내가 훠어어얼씬 연장자야!」
“그랬지, 참.”
「그러면서 또 웃고 있지. 하여간 넌 진짜.」
유니는 졌다는 듯 쥬다스의 머리 위에 풀썩 드러누웠다.
연두빛으로 빛나는 그녀의 몸은 일반인들은 발견할 수 없는 정령체였다.
정령술사가 아닌 이상에야 정령을 직접 볼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정령술사란 흔한 존재가 아니었다.
‘딱히 뭐, 모습을 보인다 해도 상관없긴 하지.’
바람의 정령왕이 인간과 계약한 것은 역사서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먼 옛날의 이야기였다.
바람뿐 아니라 4대 속성 정령왕 전부가 그랬다. 마치 조부로부터 잠들기 전 전해 듣는 전설처럼 정령왕의 존재는 그야말로 신비였다.
평범한 인간이 알아보려야 알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도 이그레트는 특별했다.
무려 4속 정령왕의 사랑을 한 번에 독차지한 정령술사라니!
유니는 애정을 담은 손길로 쥬다스의 머리칼을 쓸었다.
‘나머지 녀석들에겐 당분간 비밀로 할까.’
그가 스스로 원치 않는 이상에야 정령이 먼저 그를 찾아올 방도는 없다.
그의 온화한 성품상 나머지 정령들도 곧 부르게 되겠지만, 유니는 당분간 가장 먼저 계약자에게 불린 메리트를 누리기로 마음먹었다.
이는 정령왕인 그녀가 가진 유일한 독점욕이었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 모르고 있는 쥬다스는 그저 평온한 얼굴로 숙소를 빠져나왔다.
몸이 원체 약하기도 했고, 본인 성격상 느긋하기도 했기 때문에 걷는 속도는 보는 이가 답답할 정도로 느렸다.
오전이라곤 하나 한창 수업 중일 시간이라 주변에 메이드 외에 다른 학우는 보이지 않았다.
쥬다스는 천천히 거닐며 경관을 구경했다. 산속에 틀어박혀 혼자 지내왔던 게 벌써 수십 년이었다.
메이드들이 고개를 숙이며 지나갈 때마다 잔잔히 웃으며 끄덕여 주었다. 이조차 생소하고 반가웠다.
숙소 밖에 펼쳐진 것은 고급스럽게 지어진 교사(校舍)와 각종 시설이었다.
고귀한 신분의 인재를 양성해 내는 학원 루바흐는 그 규모를 일반적 건물과 달리했다.
이는 마치 하나의 도시와도 같았다. 각 관마다 가르치는 학문이 달랐고, 운동장만 해도 종류가 7가지나 되었다.
일반 체육계와 검술을 연마하는 연무장, 행사를 뛸 수 있는 장과 승마장 등 장소마다 용도가 달랐다.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걷고 있던 쥬다스의 시야에 드디어 처음으로 같은 교복을 입은 소년이 하나 보였다.
“…….”
손에 책자를 하나 들고 들여다보며 고뇌하는 소년은 쥬다스보다 한참이나 체격이 컸다.
한창 성장기인 듯 훌쩍 큰 키와 잘 단련된 몸은 자기관리에 철저한 인상을 풍겼다.
평소 무예에 뜻이 있는 듯 허리춤엔 검이 하나 매어져 있었다.
단정한 검은 머리, 마찬가지로 검은 눈동자는 잘 관리받은 블랙 래브라도를 연상시켰다.
언뜻 칙칙할 수 있는 흑색은 입고 있는 남색 교복과 어우러져 고고함을 뽐냈다.
책자를 빤히 들여다보며 고심하던 소년은 어느 틈에 그 앞에 서 있는 쥬다스를 알아차리고 움찔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
기척을 읽지 못한 것에 놀라 검을 뽑을 뻔했으나, 눈앞에 있는 자는 너무도 작고 허약해 보였다.
그뿐 아니라 자신과 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 루바흐 학생이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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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