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4화 (4/252)

0004 / 0240 ----------------------------------------------

1장. 백로황자

‘그런데 어째서 기척을 느낄 수가 없는 거지.’

소년은 속으로 몹시 당황했다. 그가 어릴 적부터 가문으로부터 전수받은 무예는 현재 상당한 수준이었다.

눈앞의 꼬마 하나 기척을 읽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야 했다. 그러나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도 눈치채지 못했다.

심지어 눈으로 확인한 지금 역시도, 그 기척을 제대로 짚어낼 수가 없었다. 이대로 눈을 감는다면 앞에 아무도 없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당황한 소년에게 쥬다스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반가우이.”

“……?”

아이답지 않은 말투에 소년은 두 배로 당황했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검 손잡이에서 손을 떼어냈다.

“……실례하였습니다. 이곳은 처음인지라.”

“아니, 괜찮다. 이 늙은이도 처음이나 다름없으니 말이야.”

쥬다스의 자애로운 대답에 소년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훑어보았다.

“늙은이?”

아무리 봐도 7살 수준, 좋게 봐줘도 10살을 넘지 못하는 외향이었다.

툭 치면 쓰러질 듯 허약해 보이면서도 가진 금안만큼은 생기 있게 반짝였다.

기분 좋은 듯 머금고 있는 미소가 그를 더욱 아이답게 보이게 하고 있었다.

‘어디 모자란 건가.’

소년이 아무 말 없이 쳐다만 보고 있자, 쥬다스는 ‘아’ 하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엇차……? 말이 헛나왔구만. 허허허.”

나이를 먹으니 종종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는 더욱 영문 모를 소릴 해대는 쥬다스를 쳐다본 소년은 금방 그의 정체를 유추해 냈다.

노인의 센 머리와는 다르게 자체적으로 빛을 발하는 것 같은 긴 은발, 그리고 아까부터 생기 있게 반짝이는 금색 눈동자.

마치 하나의 보석을 보는 듯한 색의 조합은 제국 내에 유일한 혈통뿐이다.

‘제1황자.’

황제가 총애하는 적통의 후계자.

그러나 너무나도 유약하여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잘 빚어진 인형 같은 존재.

그 소문 무성한 백로황자다.

소년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유약? 아닌 것 같은데.’

기척을 읽을 수 없는 것은 고사하고, 분위기부터가 남달랐다.

어딘가 나른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게으름이 아니라 지니고 있는 여유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육신이 허약한 것은 맞으나, 그 눈빛에서만큼은 결코 유약을 느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보게 된 것도 인연이겠지. 반가우이. 이름이 뭔가?”

“……에단.”

“에단, ‘영원의 아이’. 네게 잘 어울리는구나.”

태연스러운 대꾸에 에단은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쥬다스가 말한 의미는 고대어였다. 일반적으로는 알려져 있지 않은, 에단 스스로조차 가문으로부터 유일하게 전달받은 이름.

고대어를 전부 아는 자는 대현자 이그레트뿐이다.

그렇지만 황조 적통의 피를 이은 자라면 고대어에 대해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긴 했다.

눈앞의 유약해 보이는 아이에겐 소문과는 다르게 비상한 면모가 있었다.

“그렇지, 내 소개를 안 했구나. 내 이름은…… 쥬다스. 쥬다스라 한단다.”

“…….”

“어디 찾는 곳이라도 있는 게야?”

쥬다스는 그가 들고 있는 책자를 눈짓했다. 에단은 저가 들고 있던 책자를 쥬다스가 보기 쉽게 밑으로 내려 보여주었다.

학원 지도였다.

“교무처를 찾고 있었습니다.”

쥬다스는 지도를 쳐다보곤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학원 루바흐는 몹시 넓고 시설이 여러 종류라 길을 찾는 게 어려울 수는 있으나, 이처럼 명확한 지도를 가지고 헤맬 만한 공간은 아니었다.

「이번에 입학하는 신입생이래. 나이는 올해로 15살.」

유니가 알려주는 정보를 들으며 쥬다스가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네가 찾는 장소는 아마도 이쪽인 것 같구나.”

후웅-

쥬다스의 손끝을 타고 초봄의 찬바람이 불었다.

아이의 주변을 휘감는 바람을 따라 에단은 고개를 돌려 방향을 확인했다. 교무처로 추정되는 하얀 건물이 하나 보였다.

에단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덕분에 더 헤매지 않아도 되겠군요.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다행이구나. 그럼 또 보자, 에단.”

부드럽게 웃어 보인 쥬다스는 그를 지나쳐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바람을 타고 살랑이는 은발을 물끄러미 쳐다본 에단 역시 교무처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특이한 꼬마…….’

처음 걷는 길이어도 바람이 알려주는 대로 가면 되었기에 쥬다스에게 길 찾기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약해질 대로 약해진 신체는 호흡부터 제동이 걸렸다.

목선을 타고 흐른 땀을 손등으로 닦아낸 쥬다스는 자리에 멈춰 호흡을 가다듬었다.

“체력이 원 늙은이보다 약한 것 같누…….”

이그레트로서 죽기 몇 달 전 상태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나이 90 먹은 노인보다 허약한 체력은 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쥬다스는 안타까운 눈으로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단순히 운동 부족은 아니다. 타고나기를 약하게 태어난 몸이었다. 뛰기는커녕 장시간 걷는 것도 무리인 모양이었다.

「무리하지 마, 이그레트.」

유니는 걱정 어린 말과 함께 그의 주변을 빙글 돌았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 땀을 식혀주자 조금 숨통이 트였다.

쥬다스는 허허로이 웃어 보였다.

“괜찮단다. 이제 다 왔으이.”

그 말대로였다. 이미 수업이 시작된 지 한창인 건물은 돌아다니는 이 없이 조용했다.

쥬다스는 아주 천천히 층계를 올랐다. 몸 이곳저곳이 삐걱삐걱 쑤셔왔다. 그는 머릿속으로 자신의 움직임에는 한계가 있음을 정리해 두었다.

[경제학 Class A : 301호.]

교실 앞에 선 쥬다스는 고급스러운 글씨체로 쓰인 팻말을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드르륵.

목재끼리 마찰하는 소리가 유독 크게 났다.

수업을 진행하던 교사와 듣고 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동시에 그를 향했다.

나이 지긋한 50대 경제학 교사가 안경을 고쳐 쓰며 그의 신상을 확인했다.

“……쥬다스 님. 몸은 좀 괜찮나?”

그의 신분이 황자라고는 하나, 학원 내에서는 일개 학생일 뿐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시켜 주듯 거침없이 하대를 행하는 교사의 발언에 쥬다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교사가 더 뭐라 하기도 전에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성당에서나 울릴 법한 대종 소리에 교사는 펼쳐 든 책을 접었다. 교실을 나가기 전, 그는 쥬다스를 향해 당부의 말을 남기는 걸 잊지 않았다.

“아무리 고귀한 혈통이라 하더라도, 결석이 잦으면 낙제를 줄 수밖에 없네.”

교사가 자리를 비웠으나 학생들은 여전히 책상을 떠나지 않았다. 경제학 특성상 필기량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칠판에 빼곡히 적힌 필기를 옮겨 적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쥬다스는 흥미로운 눈으로 칠판으로 다가가 적힌 내용을 훑었다.

“이거, 황자 전하 아니십니까?”

“……?”

그의 주변으로 한 무리의 학생이 다가왔다. 쥬다스가 돌아보자 먼저 말을 건 학생이 입꼬리를 올려 조소했다.

“아~ 아니지, 학원 내에서는 정통 예법 대신 학우 간 전부 이름을 부르게 되어 있지요. 그것이 룰이니까, 쥬다스 님.”

언뜻 옳은 말이었으나, 굳이 한 번 더 그 상식을 확인시켜 가며 호명한 것은 명백한 조롱이었다.

쥬다스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고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체구가 작은 쥬다스에 비해 소년은 14세 나이에 걸맞은 성장 속도를 보였다.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와 다부진 체격이 제법 사나운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그도 이어지는 쥬다스의 태연한 대꾸에 왈칵 일그러지고 말았다.

“……허어. 이름으로 불러도 되는 겐가? 이런 친절할 데가. 그래, 네 이름을 알려주지 않으련?”

실제로 이그레트가 아니더라도 쥬다스와 바이칼이 따로 통성명을 한 적은 없었다.

말을 걸어봤자 대답다운 대답이 돌아오는 일도 보지 못했다.

자주 아프고, 수업에 빠지다 결국 무리에서 소외당하면서 쥬다스는 아무하고도 얘기하지 않게 되었다.

분명 그랬었는데.

“……하긴, 그동안 출석도 변변히 하지 못하셨으니 기억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죠. 바이칼입니다.”

“어감이 좋구만.”

뭔가 이상했다. 바이칼과 다른 학생들은 서로 의문스러운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제1황자는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통칭 백로황자.

표정이 없고, 늘 창백하게 질려 말 한마디 하지 않았기에 마치 인형 같았다. 매사에 소극적이며 조롱이나 비웃음을 받아도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점이 더욱 만만히 여겨져 황자로서의 근엄함이나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잘 부탁한단다. 바이칼.”

창백한 안색으로도 부드럽게 웃을 줄 안다. 묘하게 말투가 거슬리는 걸 빼고는 흠 잡을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힘 있는 금안과 마주한 바이칼의 표정이 움찔 흔들렸다.

‘이게 정말 그 백로황자가 맞는 건가?’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