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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백로황자
쥬다스를 바라보는 학생들이 혼란에 빠진 사이, 정작 혼란을 끼얹은 장본인은 다시금 칠판을 눈으로 훑고는 몸을 돌렸다.
수업에 제대로 참석하지 못한 점은 아쉬웠으나 어쩔 수 없었다.
학원 루바흐는 이동 수업제였다. 과목마다 배정된 관과 교실이 달랐다. 필기를 마친 학생들은 이동을 위해 저마다 가방을 챙겨 들었다.
한발 먼저 휑하니 나가는 쥬다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또 다른 무리가 있었다.
바이칼이 중심인 무리와는 다르게 이들은 여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놓고 나서진 않았으나 그녀들 역시 그간 쥬다스를 좋지 않게 보던 편이었다.
“봤니? 그 뻔뻔한 표정.”
“꼴에 황족이라는 걸까? 여전히 기분 나쁜 어린애야.”
“어머, 어린애라니. 실제로는 12살이라며?”
“그게 더 기분 나빠!”
12살은 어린 나이긴 해도 귀족 사이에서 어린애 취급받을 나이까진 아니다.
실제 학원 루바흐에 입학할 수 있는 최저 나이 제한이 10살인 걸 감안하면, 아직 10대인 그녀들과 큰 차이 없었다.
하지만 이미 최악으로 떨어진 평판은 쥬다스를 위치에 걸맞지 않는 유약하고 기분 나쁜 어린애로 몰고 갔다.
조잘거리던 여학생들은 조용히 책을 챙겨 품에 안는 한 소녀를 향해 동의를 구하듯 시선을 보냈다.
“차라리 수업에 나오지 말았으면 좋겠어. 그렇죠, 크리스티나?”
“내 앞에서 천박하게 떠들지 마.”
여학생들의 가볍던 입이 순식간에 닫혔다. 차갑게 그녀들의 입을 다물린 크리스티나는 흘러내린 바다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크, 크리스…….”
“관심 없어. 그딴 품격 떨어지는 이야기.”
크리스티나 델피아.
그녀는 델피아 공작가의 장녀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기품을 잃는 법이 없고, 얼굴 또한 조각같이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이제 갓 14살이 된 소녀였지만 웬만한 레이디들로는 엄두도 내지 못할 품격과 절도를 갖춘 탓에 그 누구도 그녀 앞에서 고개를 뻣뻣이 들 수 없었다.
집안과 외모, 재능까지 고루 갖춘 그야말로 지체 높은 소공녀였다.
“아, 그리고 그 애.”
크리스티나는 교실 밖으로 나와서는 멈칫 앞을 응시했다.
걸음이 느린 쥬다스는 먼저 나갔음에도 멀리 가지 못한 채였다.
그 뒷모습에 시선을 힐끗 준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돌리며 작게 덧붙였다.
“마냥 어린애는 아니야.”
“에……?”
그 말에 소녀들은 그저 영문 모를 얼굴을 할 뿐이었다.
자신이 선택한 수업 시간표에 따라 학생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쥬다스 역시 부지런히 걸어 체육관에 도착했다.
허약한 몸을 단련시키고 싶기라도 했는지 쥬다스의 본래 시간표에는 ‘봉술’이 들어가 있었다.
길고 가벼운 봉을 주로 다루는 봉술은 일단 배우기 쉬운 무예에 속했다.
검술과는 다르게 반대 손의 대칭성을 고려하지 않아도 될뿐더러, 동선이 크고 선명하기에 따라 하기 쉽다.
체육관에 미리 도착한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나누거나 미리 봉술 대련을 해보는 등 제각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봉이라…….”
쥬다스는 쌓여 있는 훈련용 봉들 중 하나를 양손으로 들어 올렸다.
다른 무구류에 비해 가볍다지만 체력이 약한 쥬다스가 들기엔 이마저도 무거웠다.
대현자였던 이그레트는 봉술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건 아니어도 취미 삼아 익혔던 전투 기술들은 몸이 바뀐 지금까지도 여전히 뇌리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무겁군.”
쥬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봉술의 꽃은 쌍봉이다. 한 손에 하나씩 봉을 들고 총 두 개의 봉을 휘두르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겉보기에 7살 남짓으로 보이는 작은 체구에 허약하기 그지없는 팔다리는 훈련용 봉 하나의 무게조차 제대로 견뎌내지 못했다.
봉을 양손으로 잠깐 들고 있는 걸로도 벅차 벌써 어깨가 아려오고 있었다.
쥬다스는 들고 있던 봉을 땅에 꽂다시피 세워둔 채 난감한 얼굴을 했다.
‘이 몸으로 잘도 봉술을 신청했구나. 쯧쯧, 하고 싶었던 건 많은 아이였던가 본데.’
안타깝게도 전혀 체력이 받쳐 주지 않았다.
쥬다스는 무리해서라도 본래 몸 주인이 하고 싶어 했던 봉술을 계속 지속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지금에라도 다른 수업으로 변경해야 하는 건지에 대해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봉술 교사가 체육관에 들어섰다.
“오?”
들어오자마자 단연 교사의 눈에 띈 건 쥬다스였다. 교사는 놀란 얼굴로 쥬다스 앞으로 다가왔다.
“이게 웬일이야? 이번 학기 통 얼굴 비추지 않던 학우님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기까지 하다니.”
쫙 붙는 트레이닝 복장에 긴 고동색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은 교사가 씩 웃으며 허리에 한 손을 얹었다.
무예과 봉술 교사 메이란, 그녀는 무예과에서 보기 드문 여성 교사였다.
“드디어 할 마음이 생긴 건가? 쥬다스 님.”
“…….”
쥬다스는 꽤나 놀란 상태였다. 여자 스승이라니, 남녀차별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상당히 의외였다.
문과도 아니고 무예학에서는 더욱 그랬다. 아직까지 제국 내에서 여성은 무예 쪽에 많이 진출한 편이 아니었다.
평민은 물론이고 귀족가 여식들도 보통 문과나 마법계에서 특성을 드러내곤 하지, 몸 쓰는 험한 일에는 잘 참여하지 않았다.
일단 그녀의 여기저기 자리 잡은 잔근육과 탄탄한 몸매를 보아서는 운동을 게을리한 것 같진 않았다. 아마도 상당한 실력자이리라.
메이란은 메이란대로 대답하지 않는 쥬다스를 내려다보며 씁쓸하게 입꼬리를 내렸다.
‘조금 변화가 있는가 싶었더니, 여전한 모양이군. 하아, 이래서야 폐하께서도 걱정이 크시겠…….’
거기까지 생각하던 메이란은 쥬다스가 공손히 머리를 숙이는 모습을 보고 눈을 홉떴다.
“심려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스승님. 가르쳐 주시는 대로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어……? 어, 그래.”
빙긋.
늘 소극적이고 그늘져 있던 쥬다스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메이란은 놀란 표정을 순식간에 지웠다. 대신 훈련용 봉을 하나 꺼내들고 학생들을 집합시켰다.
“봉술의 훈련은 회전에 대한 감각을 키우기에 매우 적합하지. 이 회전에 대한 감각은 다른 무술에도 적용된다. 다른 무술을 배운 학생이라면 느꼈겠지만, 이 감각을 잘 다져 둔다면 모든 무예에 써먹을 수 있을 거야.”
휘릭, 탁!
마치 동전 굴리듯이 가볍게 봉을 휘둘러 잡은 메이란은 먼저 간단한 시범을 보였다.
봉술이라 하나 초급 과정인 만큼 그다지 복잡성을 요구하진 않는다. 봉을 다루는 감각과 기초적인 휘두르기 정도가 현재 가르치는 내용의 전부였다.
쥬다스가 수업을 오래 빠지긴 했어도, 아직 학기 초였던 만큼 다른 학생들도 봉술에는 서투른 모습을 보였다.
“자, 이제 둘씩 짝을 지어서 타격을 주고받는 연습을 실시한다.”
메이란의 신호에 따라 학생들은 우르르 흩어졌다. 저마다 친한 친구나 아는 얼굴을 찾아 이동하는 모습을 보며 쥬다스는 잠시 자리에 서 있었다. 이럴 때는 가만히 있으면 남는 인원과 자연스럽게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자신처럼 멀거니 자리에 서 있던 학생과 마주보게 되었다.
“음?”
“……당신은.”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낯이 익은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였기 때문이다.
쥬다스는 반갑게 그를 향해 다가섰다.
“또 보는구나, 에단.”
에단은 작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두 사람의 덩치 차이는 상당히 차이 났기에 마치 형이 어린 동생과 놀아주는 모양새처럼 보였다.
“찾던 곳은 어찌, 잘 찾았느냐?”
“덕분에. 곤란하던 참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주변 학생들이 그들을 힐끗거리기 시작했다.
에단은 이번이 첫 수업이었다. 정식 입학 날짜가 아닌 중도 편입으로 들어온 학생이었기에 아는 얼굴이 있을 리가 없었다.
신분을 밝히지 않는 것이 원칙이긴 하나, 학생들은 저마다 서로의 신분을 추측하여 파벌을 형성하곤 했다.
새로운 얼굴의 등장에 에단의 가문을 추측하려는 시선이 따갑게 쏟아졌다.
“한데 봉술이라, 첫날부터 특이한 수업을 신청했구만.”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부분이었습니다만.”
교사의 지시대로 준비 자세를 취하면서도 둘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봉술이 무예 중 가장 쉬운 편이라 수강 학생이 꽤 많은 편에 속하긴 했다.
하지만 쥬다스는 그가 이미 검술을 익힌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첫 만남에서부터 보란 듯 검을 소지하고 있었고, 어린아이치곤 풍기는 기세가 꽤나 절제되어 있었다.
더구나 입학 첫날부터 다른 흥미로운 과목을 뒤로하고 봉술을 시간표에 넣는 경우는 드물었다.
학원 루바흐에는 이보다 젊은 학생들의 흥미를 끌 만한 무수한 과목이 개설되어 있었다.
반면, 에단은 쥬다스의 의문과는 그 계기가 조금 달랐다. 그로서도 백로황자에 관한 소문은 그간 질리도록 들어왔다.
타고나길 몸이 허약하게 태어나고, 심신이 전부 유약하여 나이에 비해 제대로 자라지도 못한 약체 중의 약체.
그런 그가 아무리 봉술이라 한들 무예과를 신청해 들어왔으리라곤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아까도 그랬지만, 이분은. 생각했던 것보다 강단이 있는 편인 건가.’
에단은 자신이 들어왔던 1황자에 대한 소문을 점차 수정해 나가기 시작했다. 적어도 지금 눈앞의 황자는, 아주 못써먹을 인물은 아니었다.
그 생각에 약간 흠집이 난 것은 잠시 뒤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사족으로 '이그레트'에 로맨스는 없습니다.
주인공을 사랑하는 인물들은 늘어나겠지만요. ㅎㅎ
오늘 밤이나 내일 중으로 또 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