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6화 (6/252)

0006 / 0240 ----------------------------------------------

1장. 백로황자

터엉!

요란한 소리와 함께 훈련용 봉이 바닥을 굴렀다.

그다지 세게 맞부딪친 것도 아니었는데, 시늉만 한 타격에도 쥬다스는 버티지 못했다. 봉을 놓친 것은 고사하고, 들고 있던 손바닥이 까져 빨갛게 부어올랐다.

“이런! 괜찮나?”

담당 교사 메이란이 부리나케 달려와 쥬다스의 안위를 살폈다. 아무리 형편없다 하더라도, 쥬다스는 제국의 1황자였다. 약간의 상처에도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호들갑을 떠는 것은 교사뿐이 아니었다.

「이그레트, 많이 아파? 응? 저 인간 놈이 감히 이그레트를.」

“……하하.”

쥬다스는 손바닥을 감싸 쥐고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에단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잔뜩 분이 찬 유니가 씩씩거리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이내 그의 손바닥으로 포르륵 날아가 울상을 지었다.

「이그레트…….」

“이거야 원, 많이 다친 것도 아닌데.”

“그래도 연습은 중지해야 해. 얼음주머니를 줄 테니 쥐고 앉아 있도록.”

정령에게 중얼거린 말을 용케도 캐치해 낸 메이란이 쥬다스의 어깨를 살짝 떠밀었다.

하는 수 없이 쥬다스는 부어오른 손바닥 위에 얼음주머니를 댄 채 한쪽 구석에 쪼그려 앉았다.

비어버린 에단의 연습 상대는 교사인 메이란이 직접 맡았다.

“에단 학생, 신입생이라 했지? 보아하니 무술을 익힌 몸인데, 왜 하필 봉술을 선택했나?”

“……무구를 다루는 감각을 익히기 위해서입니다.”

“검술 반에서 더는 익힐 게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자만은 하지 않습니다. 다만…….”

교사의 도발에도 에단은 크게 감정적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저 이성적인 어투로 자신의 견해를 그녀에게 밝혔다.

“제 검에 완벽을 더하고 싶을 뿐입니다.”

휘리릭, 탁!

배운 자세를 완벽하게 구사해 내며 봉을 돌려 잡는 에단을 본 메이란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확실히 무장 가문답군. 그사이 벌써 원리를 몸이 익혔나.’

루바흐의 교사는 모든 학생의 가문과 출신 정보를 전달받는다.

난 배경을 알아야 싹을 기르는 법.

대다수의 학생은 자신의 출신지에 맞추어 자질을 드러낸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그럴 경우 어느 것에 더 재능이 있는가를 판별해 양분을 더해 주는 건 각 교사의 몫이었다.

에단의 경우엔, 철저한 전자였다.

“완벽을 추구하는 자세는 학생으로서 합격이야. 그런데 말이지.”

메이란은 찔러오는 에단의 봉을 가볍게 쳐 냈다. 그리고 일반적인 연습과는 다르게 훅 치고 들어가 그의 복부를 노렸다.

놀란 에단이 황급히 봉을 들어 이를 막아냈으나, 봉은 스프링처럼 튕겨 올라 반대로 그의 등을 가격했다.

퍽!

꽤 큰 타격음이 울리고 에단이 휘청거렸다. 그러나 끝까지 제 봉을 손에서 놓지는 않았다. 이를 눈여겨본 메이란이 생긋 웃었다.

“봤지? 앞으론 주의하는 게 좋아. 봉이란 무기는 검과 그 성질부터가 다르거든.”

수업이 끝나고 에단의 주위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교사가 호명하는 ‘에단’이란 이름과 짧지만 그가 보여준 무(武)에 대한 익숙한 태도, 그리고 그의 흑발, 흑안을 보고도 그 정체를 유추해 내지 못할 루바흐 학생들이 아니었다.

“안녕, 신입생.”

“메이란 선생의 일격 기습을 한번이라도 막아낸 학우는 처음 봤어. 선배들도 반응하기 어려웠을걸!”

“과연 헤이가 가문인걸.”

에단 헤이가.

델피아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국의 양대 산맥. 즉, 공작가 도련님이란 소리였다. 가문에서 전수하는 검술은 그야말로 제국의 자랑으로 알려져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대다수의 학생이 그에게 선망을 가진 채 다가왔다.

“흠.”

그들에 비해 유독 키가 작은 쥬다스는 아예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인사라도 건넬까 하던 쥬다스는 턱을 긁적이곤 돌아섰다. 와글와글 몰려든 아이들을 헤치고 지나갈 힘도 없을뿐더러,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과 다르게 입학 첫날부터 모두에게 환영받는 에단을 뒤로한 채 쥬다스는 느릿느릿 걸었다.

몸이 약해 그 이상의 시간표를 짜지 못한 쥬다스의 오늘 일과는 이것이 끝이었다.

체육관을 빠져나온 쥬다스는 고개를 들어 아직 저녁노을도 채 지지 않은 늦은 오후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달라진 게 없구나. 난.”

「응? 왜 그래, 이그레트? 손이 아파서 그래?」

“이런, 유니. 아직 신경 쓰고 있었어? 손은 괜찮단다.”

쥬다스가 손바닥을 펴 보이자, 붓기가 많이 가라앉은 모습이 보였다.

유니는 그 위로 살포시 내려앉아 쥬다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표정이 안 좋아.」

“……내가? 그랬던가. 허허……. 이거 주책이군, 나도.”

「뭐야. 대체 왜 그러는데?」

“이래서야 전혀 달라진 게 없지 않나 해서.”

유니를 손바닥에 얹은 채로 쥬다스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후 수업이 종료되어 저녁 수업을 들으러 이동하는 학생들, 쉬는 시간을 즐기는 학생들, 혹은 자신처럼 숙소로 돌아가는 학생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같은 교복을 입고 비슷한 또래였지만, 그 누구도 쥬다스를 향해 아는 체하지 않았다.

「그건, 몰라서가 아닐까?」

유니가 손가락으로 녹색 머리칼을 살살 꼬며 말했다. 그 말에 쥬다스는 어? 하고 눈을 깜빡였다.

“몰라서? 하기야 그럴 수도 있겠구나. 사람들은 익숙하지 않은 존재를 경계하곤 했으니.”

「물론이지. 네가 어떤 인간이라는 걸 알고 나면, 누구라도 분명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거야. 우리가 그랬듯이.」

어느샌가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다음 날, 바이칼은 어김없이 쥬다스와 마주쳤다.

이번엔 경제학이 아닌 역사학 시간이었는데 우연찮게 그들의 수업 경로가 겹쳤던 탓이었다. 이는 어차피 알고 있던 사실이라 딱히 놀라울 사실은 아니었다.

그러나 바이칼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변수가 하나 있었다.

“좋은 아침. 너희는 늘 같이 다니는 것 같구나.”

특이하게도 이번엔 쥬다스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지금껏 한 번도 그로부터 인사를 받을 거란 생각해 본 적 없는 바이칼은 주변 무리와 똑같이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침 겹치는 수업이 종종 있으니 앞으로 잘 부탁한단다.”

“뭔…….”

하마터면 황자를 향해 쌍소리를 해버릴 뻔한 바이칼은 가까스로 이성을 챙기고 입을 닫았다.

쥬다스의 여유로운 표정이 그를 더 열 받게 만들었다. 바이칼은 조소를 지으며 이죽거렸다.

“하! 쥬다스 님은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군요. 같은 수업을 듣는다고 해서 그 수준까지 같으리란 발상은 거두시지요.”

“으응? 내 그리 말하진 않았다만.”

“분명히 말해둘까요? 역사학을 너무 만만히 보시는 거 아닙니까? 출석보다 결석이 잦은 당신은 이 수업을 제대로 따라올 수 없을 겁니다. 당장에라도 돌아가서 철회 신청하시길 권해드리고 싶네요.”

킥킥.

지켜보던 학생들이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명백히 깔보는 말이었다.

황자라 하더라도, 학원 루바흐에서는 일개 학생. 그 고귀한 혈통을 인정해 존대를 해주더라도 형편없는 자질까진 억지로 인정할 필요가 없었다.

툭하면 쓰러져 결석을 일삼는 황자를 그 누가 인정할 것인가. 그것도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 본 적 없는 이름뿐인 황자였다.

그 타고난 외향이야 인형처럼 고고했지만 그게 백로황자의 크나큰 허물을 덮어주진 못했다.

“…….”

쥬다스는 그저 멀거니 바이칼을 쳐다보았다. 원망도 분함도 담겨 있지 않은 금안을 직시한 바이칼은 쳇 혀를 차며 이를 외면했다.

마침 들어온 교사가 출석을 호명했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그걸로 끝날 것 같던 쥬다스의 이상 행동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마치 수모를 당한 적 없는 사람처럼 끊임없이 인사하고, 말을 걸어왔다.

비단 바이칼에게만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쥬다스는 마주치는 모든 학생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탐탁지 않은 반응에도 그 미소를 잃는 법이 없었다. 실로 끈질기다 싶을 정도의 작태였다.

일주일이 지나자 쥬다스를 몰라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동안 부진한 존재감으로 유명했다면 지금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다니는 쥬다스의 행실에 학생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적당히 받아주며 그를 재관찰하거나, 여전히 껄끄러워하며 무시하거나. 전자보다는 후자가 대다수였다.

그중 소수자의 한 축에 속해 있는 에단은 어김없이 봉술 수업에 참석한 쥬다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제법 봉을 잡는 자세에 자신감이 붙은 쥬다스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마주 올려보았다.

“내 그간 팔 힘 단련에 힘썼네. 오늘은 좀 다를 것이야.”

라고 큰소리를 친 것이 무색하게, 쥬다스는 요란하게 넘어지며 봉을 놓쳤다.

손뿐 아니라 무릎에까지 얼음주머니를 올려놓게 된 그는 미안한 듯 에단을 향해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에단은 신경 쓰지 말라는 의미로 손을 들어 보이곤, 이내 교사 메이란과 함께 연습을 빙자한 대련을 이어나갔다.

이런 패턴을 지속한 지도 벌써 일주일째였다.

다른 수업과 달리 실기 중심인 봉술은 매일 오후 시간에 일정이 잡혀 있었다.

확실히 가만히 숨쉬기 운동만 하는 것보다야 체력 향상에 도움이 되겠지만, 봉술 실력은 딱히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봉을 휘두르기는커녕 예정된 타격을 제대로 막아내지도 못하는데 연습이 될 리가 없었다.

그래도 쥬다스는 차곡차곡 스승의 가르침을 머리에 집어넣었다.

체력적으로 한계가 있기 때문에 써먹지 못할 뿐, 그가 원래 알고 있던 무예의 지식과 결합하여 이론적으로는 완벽히 봉술을 체득하고 있었다.

실제로 사용할 만한 체력이 뒷받침된다면, 가르친 메이란조차도 감당하지 못할 굉장한 성과를 보일지도 몰랐다.

“……호리병 속 음식이나 다름없구만.”

쥬다스는 까진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피식 웃었다.

동화 속 여우가 기다란 호리병 속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지식이 있어도 써먹지를 못하다니, 꽤나 아쉬운 일이었다.

어쨌든 쥬다스는 머리로나마 이를 배울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대현자라 불리던 삶을 살았으나 아직 그가 모르는 지식은 무궁무진했다.

기껏해야 92년간의 삶이었다. 인간으로서는 누릴 만큼 누린 세월이었지만 세상 모든 지식과 이치를 깨우치기엔 짧디짧은 시간이었다.

대현자라 불리긴 했어도, 쥬다스는 한 번도 그 호칭에 동의한 적 없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적월zero 님, BlindSpot 님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연휴에도 재밌게 글을 쓸

수 있었네요 ㅎㅎ

함께하는 독자님들이 계시다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입니다. 행복한 오후보내세요!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