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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백로황자
“앗.”
와장창!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작은 사고가 터졌다. 실험용 비커를 트레이에 잔뜩 쌓아 위태롭게 끌고 가던 학생과 부딪혀 물건이 쏟아진 것이다.
깨진 유리 조각과 기묘한 연기를 뿜으며 흐른 액체가 여기저기 뒤섞였다.
“이런, 괜찮으냐?”
“아…… 저, 저기.”
“다친 곳은 어디 없고?”
“네, 네에.”
트레이를 끌던 건 쥬다스와 체구가 비슷한 작은 여학생이었다.
암갈색 생머리가 허리께에서 찰랑였다. 쥬다스보다야 키가 컸지만, 이제 겨우 10살이 된 입학자였다.
어린 여학생은 쥬다스와 깨진 비커를 번갈아 보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미안하게 되었구나. 내 다른 생각을 하며 걷다가 앞을 제대로 보지 못했으이.”
쥬다스는 미안한 표정으로 소녀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따지고 보면 그의 실수는 아니었다. 트레이는 여타 물건으로 가득 차서 여학생의 키보다 훨씬 높게 쌓여 있었고,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뛰다시피 트레이를 끌던 그녀와 부딪히게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쥬다스가 피하려고 해도 피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어린 소녀에게 상처를 준 기분이었다.
그는 깨진 유리 조각들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일단 치워야겠단 생각에 쪼그려 앉아 손을 뻗자, 여학생이 그 손을 꼭 붙들었다.
“아, 안 돼요. 이거……. 그, 그냥 만지면 위험해서…….”
그 말에 다시 내려다보니, 유리 조각들은 정체 모를 연기를 뿜는 액체에 뒤덮여 있었다. 개중에는 이미 녹아내린 부분도 있었다.
그들이 멈칫한 사이 지나가던 메이드들이 이를 발견하고 다가와 대신 치워주기 시작했다.
전문가의 솜씨로 말끔히 쓸고 닦아지는 돌바닥을 응시하던 쥬다스는 미안함을 담아 여학생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미안하다.”
“아니, 아니에요. 다시…… 만들면 되니까.”
“만드라와 케티웁스 증류수가 섞여 있던데, 혹 맹독성 의약품을 연구하던 중이었나?”
비커에 담겨 있던 것은 대부분 산이나 독성분을 띠고 있는 액체들이었다.
일반적으로 의약품에 들어가는 성분이었기에 이를 알아본 쥬다스가 묻자, 여학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약에 대해 아세요? 그치만, 이건 힐링 푸드 재료였는데.”
힐링 푸드(Healing food), 말 그대로 치료를 돕는 음식이다.
급격히 저하된 체력을 증강시킬 때, 혹은 상처를 입는다든지, 중독되거나 탈이 났을 때 섭취하면 빠른 회복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환부에 바르는 약과는 다르게 자체적인 회복력을 촉진시키는 데에 그 의의가 있었다.
여학생의 말에 쥬다스는 볼을 긁적였다.
“흠, 힐링 푸드 재료치곤 좀 위험해 보였는데.”
“아직 연구 중이라서…….”
“아, 거기에 시톤 성분을 잘 섞으면 중화 작용이 일어나서 독을 와해하는 용도로는 쓸 수 있을 게다. 비율이 좀 까다롭긴 하다만.”
“에?”
여학생은 고개를 반짝 들었다.
해독에 효과를 보이는 힐링 푸드는 그 가짓수가 상당히 적었다.
특히 맹독 계열에는 같은 맹독이 필요하여 연구가 까다로웠다.
자연히 그에 대해 정보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쥬다스의 말이 사실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으나 성분 조합에 대한 힌트 정도는 될지도 몰랐다.
여학생은 실험 욕구에 휩싸여 눈을 빛냈다.
“시톤 성분이요? 해, 해볼게요!”
의욕이 과해 트레이를 놓고 달릴 뻔한 학생은 황급히 돌아와 트레이를 끌며 쥬다스를 돌아보았다.
“저, 고마워요!”
“…….”
급하게 달려가는 뒷모습에 대고 쥬다스는 멀거니 손을 흔들어 보였다.
뭔가 소심한 듯하면서도 정신없는 소녀였다. 재료를 쏟게 된 것보다도 힌트를 얻는 게 훨씬 중요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처음 보는 쥬다스의 말을 덥석 믿고 달려가는 게 상당히 순진해 보이기도 했다.
10살 소녀다운 모습에 쥬다스는 머리를 한 번 긁적이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음 날도 쥬다스는 어김없이 밝은 인사와 함께 바이칼의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바이칼, 오늘은 바람이 참 좋더구나. 아마 봄비가 올 모양이야.”
“……대체.”
질렸다는 얼굴로 바이칼은 제 옆자리에 앉은 쥬다스를 노려보았다.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최근 열흘 사이 단 한 차례의 지각, 결석이 없었다.
꾸준히 수업에 참석하는 걸로도 모자라 어미 쫓는 새끼오리마냥 졸졸 따라와 이렇게 나란히 앉기도 했다.
앉는 자리까지 이래라 저래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굳이 자신이 다른 자리로 옮겨가기엔 더욱 불쾌했다.
같이 다니는 무리가 있긴 했으나 굳이 몰려 앉고 싶지 않아 대충 자리를 잡았던 게 실수였다.
결국 쥬다스의 막무가내식 접근에 바이칼은 반포기 상태로 대응하게 되었다.
“비는 무슨, 구름 한 점 없었는데요.”
“허허, 구름은 없다가도 금방 또 생기는 것이란다.”
게다가 말을 섞게 된 이래로 알게 된 특유의 할배 말투.
바이칼은 눈을 가늘게 뜨며 쥬다스를 쳐다보았다.
“요즘 왜 그러시는 겁니까?”
“으응?”
“저한테, 아니, 그냥 전부 들쑤시고 다니는 것 말입니다. 그래 봤자 아무도 반가워하지 않는데요. 왜, 이제 와서 후회라도 드십니까?”
비꼬는 말에도 쥬다스는 턱을 짚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곤 이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구나, 후회.”
“…….”
당당하게 과오를 인정하는 모습에 바이칼은 또다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변한 백로황자는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예전 같았더라면 무시하거나 비꼬는 말 한마디면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져 꿈쩍도 못했을 터였다.
차라리 도망이라도 가면 덜 우스웠을 텐데, 그에겐 그마저도 버거운 행동이었던 듯 망부석처럼 한참이나 그 자리에 못 박혀 있곤 했다.
그러고 나면 한동안 크게 앓거나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오더라도 바이칼이나 다른 학생들과 눈도 못 마주치고 홀로 떨어져 구석에 앉아 있었다.
마치 있는 듯 없는 듯, 그림자처럼 조용히 존재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어떤가.
“포기하지 말아볼 걸 그랬다고 느꼈지. 하니 이번엔 그리 살아볼 생각이야.”
부드러운 힘이 깃든 금색 눈동자를 보며 바이칼은 생각했다.
‘달라. 예전의 백로황자가 아니다.’
변화 커브는 급격했다.
마치 당장에라도 죽음을 앞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를 움직이는 게 간절함인지, 아니면 단순한 변덕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대화 이후로 바이칼의 날선 태도는 한층 누그러졌다.
그렇다고 쥬다스를 좋게 보는 건 아니었다. 이전처럼 무시를 하지 않았다 뿐이지, 살갑게 대해 주거나 제국의 1황자로서 인정하진 않았다.
그래도 쥬다스는 이 작은 변화를 기껍게 받아들였다.
한평생 대현자로서 살아왔던 그에게 단 한 가지 어설프고 미숙한 점이 있다면 ‘대인 관계’였다.
사람과 어울려 사는 것을 포기하고 정령들과 함께 자연으로 도망치듯 등 돌렸을 때만 해도 분명 지치고 힘들었다.
아무리 해봐도 ‘가족’이나 ‘친구’라 부를 만한 관계는 성립되지 않았다.
이는 인간관계에 미숙한 ‘이그레트’로서 나름 불안 불안한 도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평생을 실패했던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는 없었다.
「이그레트!」
촤아악.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물끄러미 응시한 쥬다스가 고개를 들었다.
미술과 수업이 끝난 교실 창문틀에 미술에 사용한 붓 세척용 물통이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의도적으로 쥬다스에게 겨냥하여 쏟은 게 분명해 보이는 물통은 말끔히 비워진 채 방울만 떨구고 있었다.
위생적으로 더러운 물은 아니었지만, 물감이 뒤섞여 흡사 흙탕물과 같은 세척수를 뒤집어쓰게 된 쥬다스의 교복이 온통 얼룩덜룩해졌다.
난데없이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누가 봐도 고의였지만, 쏟은 가해자가 보이지 않으니 뭐라 따지기도 어려웠다.
이를 목격한 학생들은 저들끼리 눈짓을 주고받더니 이내 등을 돌려 쥬다스를 지나쳐 갔다.
“…….”
들릴 듯 말 듯 흘리고 지나간 비웃음에 쥬다스의 눈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작게 한숨을 뱉은 그는 홀딱 젖은 재킷을 벗어 팔에 걸쳤다. 다른 학생들이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쥬다스는 더 지체하지 않고 그대로 숙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왜 막아달라고 하지 않았어?」
“…….”
「이그레트!」
“진정하려무나.”
잔뜩 고양된 유니의 부름에도 쥬다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정령은 계약자가 원하지 않으면 그 힘을 사용할 수 없다. 설령 계약자가 큰 위기에 처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본래 자연이란 그 의지를 가지고 개입해선 안 되는 법. 계약자의 바람 없이 독단으로 움직일 권한은 주어지지 않았다.
만일 이를 어긴다면 그에 따른 큰 징벌을 받는다. 정령왕이라 할지라도 그 규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랬기에 유니는 분이 머리끝까지 차올라도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그녀의 기분을 감지한 바람이 거칠게 날뛰었다. 펄럭이는 옷자락을 살짝 쥔 쥬다스의 손에도 물감이 묻어 얼룩져 있었다.
“……무서워하게 만들어봐야 아무 소용없는 거란다.”
「그게 뭐야! 저딴 인간들, 뭐가 그렇게 소중하고 중요하다고. 나한텐 네가 다치는 게 훨씬 무서워.」
“이런, 이런. 유니.”
「네 바람이 어떤 건지는 알고 있어. 하지만 이그레트.」
똑-
이미 젖은 이마 위로 차가운 물방울이 하나 더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보자 맑았던 하늘이 거짓말처럼 먹구름으로 가득해 있었다.
아침에 그가 말한 대로였다. 그 한 방울을 기점으로 하늘에서 점차 많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네가 괴로운 건 싫어…….」
한바탕 비가 쏟아졌다. 마치 정령의 눈물과도 같은 녹색 봄비였다.
물감 세례로도 모자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소나기까지 쫄딱 맞고 숙소로 들어온 쥬다스는 그날 밤새도록 열감기에 시달려야 했다.
약해빠질 대로 약한 육체는 잠깐의 한기에도 금방 균형이 무너졌다.
그럼에도 아침이 되자, 쥬다스는 여벌의 교복을 차려입고 교사(校舍)로 향했다.
가는 도중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하는 그를 보며 유니가 초조하게 주변을 날아다녔다.
「정말! 오늘은 그냥 쉬라니까, 이그레트.」
“괜찮단다. 단순한 감기야. 이전에 앓았던 거에 비하면 말짱허이.”
「그땐 죽어갔던 거고-」
유니는 걱정스러운 한숨과 함께 그의 곁을 지켰다. 이미 수십 년간 그의 고집을 겪어온 정령은 소용없음을 알았기에 더 이상 만류하길 포기했다.
경제학 교실이 있는 건물은 평소에도 숨이 찬 거리였지만 오늘은 현기증이 다 일어날 지경이었다.
어찌어찌 교실에 무사히 도달은 했으나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털썩.
기대다시피 옆자리에 앉는 쥬다스를 발견한 바이칼이 읽고 있던 서적을 탁 덮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역시 사족을 덧붙이자면,
사실 쥬다스(이그레트)는 정령왕의 조력만으로도 충분히 사기급이긴 한데
마음은 상당히 여린 타입입니다. 그러니 한때 사회에 제대로 못섞이고 낙오(?)됐겠죠.
당시 이용하려던 사람들도 문제였지만 이그레트 자체도 문제가 많습니다. ㅎㅎ
아, 지금은 심지어 체력도 약해졌으니까... ...외유내유?(...)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