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8화 (8/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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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백로황자

“말씀대로 어제 소나기가 내리더군요. 혹 기상을 읽을 줄 아십…… 음?”

“……좋은 아침이구나, 바이칼.”

부드럽게 웃으며 건넨 인사에도 바이칼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은 채 그를 훑어보았다.

열이 올라 벌게진 얼굴이며 식은땀에 젖은 앞머리 따위가 쥬다스를 충분히 병자로 보이게 만들었다.

바이칼은 이를 지적해야 할지 아니면 못 본 체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그저 입을 다물었다.

백로황자가 체질이 허약하단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안색은 원래 항상 창백했고, 잔병치레가 잦아 결석을 밥 먹듯이 해왔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딱 봐도 고열에 시달리는 환자인 상태로 수업에 나타난 적이 없었기에 생소하게 느껴졌다.

‘정말 여러모로 예측하기 힘든 자로군.’

바이칼이 혀를 차는 사이 쥬다스는 그가 덮어놓은 책 표지를 알아보고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일종의 루바르잔 제국 위인전이었다. 위인 범주는 대다수가 루바르잔의 황족과 귀족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아주 가끔씩 일반 평민 중에도 위인으로 칭송받는 경우가 있다.

큰 전쟁에서 공로를 세운 무예가나 제국 문물 발전에 이바지한 상인, 혹은 대마법사처럼 이능으로 이름을 떨친 자는 평민이라 할지라도 그 이름에 무게가 실렸다.

“그중에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인고?”

쥬다스의 시선이 책에 가 있음을 알고 있던 바이칼은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이그레트.”

“응……?”

정령이 아닌 다른 상대로부터 이름을 불린 게 얼마만인지 몰랐다. 물론 바이칼은 그를 알고 부른 것이 아니었다.

“대현자 이그레트입니다. 그가 가진 지성, 현식(賢息), 4대 속성 정령을 모두 부렸다는 그 능력까지 전부.”

겹치는 수업들만 놓고 봐도 짐작할 수 있듯이 바이칼은 무(武)보단 문(文), 즉 학구파였다.

그는 학문적으로 뛰어난 이들을 주로 인정했고, 그중 대현자라 일컬어지는 이그레트는 단연 최고였다.

“강한 자는 존경받아 마땅하니까요.”

마치 ‘너 따위는 그렇지 못하니 무시 받는 거다’란 어투였다.

일면은 존경받으면서 동시에 현재의 일면은 무시당한 셈이 되어버린 쥬다스는 그저 허허롭게 웃을 뿐이었다.

경제학 시간이 끝나고 이어서 그는 바로 봉술 수업을 위해 움직였다.

열이 전혀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어차피 평소에도 힘이 없던 몸이 좀 더 맥아리가 없어졌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한 쥬다스는 체육관 세트에서 차가운 훈련용 봉을 집어 들고 자리로 향했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에단도 그의 안색을 보더니 상태를 곧장 알아차렸다.

“……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거 참, 그동안 매번 쉬었거늘 또 쉬라는 게야?”

올 때마다 쓸리고 까져 구경만 하곤 했던 스스로의 모습을 뜻하는 농담 겸 사실에 에단의 표정이 살짝 난감함에 물들었다.

가뜩이나 유약했던 황자가 열이 올라 골골거리며 나타나기까지 하니 더욱 병약해 보였다.

툭 건드리면 쓰러질, 아니, 저대로 봉을 든 채 가만히 내버려 두기만 해도 제풀에 지쳐 쓰러질 것만 같았다.

요 며칠 봉술 수업의 파트너로 임하면서 쥬다스를 관찰해 온 에단은 이 백로황자가 사실은 제법 강단 있고 심지가 굳은 편임을 알고 있었다.

또 놀라울 정도로 솔직하며 매사에 긍정적이다. 그런 쥬다스의 모습은 에단이 보기에 좋은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썩 호의적일 건 없어도 어울릴 만한 상대라 생각하게 되었다.

때문에 에단은 그가 무리하는 모습이 조금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안색이.”

“괜찮단다. 고마우이.”

고개를 저으며 감사 인사를 건네는 쥬다스의 고집에 에단도 더 이상 말리지 못하고 봉을 잡았다.

당연한 수순대로 오늘도 연습 결과는 처참했다.

봉을 들고 휘두르거나 막는 자세까진 훌륭하게 시연했으나, 가볍게 맞부딪치는 타이밍에 그 전해져 오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봉을 놓치고 구르다시피 넘어지고 말았다.

에단이 놀라 다가가자 쥬다스는 비틀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떨어뜨린 봉을 주워들었다.

“미안하구나. 다시 해봐도 괜찮…….”

“세상에, 쥬다스 님!”

교사 메이란이 달려와 다시 연습에 임하려는 쥬다스를 붙잡아 세웠다.

그러더니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열을 재곤 심각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열이 상당한데? 치료사한테는 가본 거야?”

“…….”

말로 하진 않았어도 쥬다스의 태연한 표정에서 답을 읽어낸 그녀는 푸욱 한숨을 내쉬며 그 손에서 봉을 뺏어들었다.

“서둘러 가보도록 해. 에단 학생, 미안하지만 쥬다스 님과 함께 가주겠나?”

“예.”

사양할 틈도 주지 않고 메이란은 쥬다스를 떠밀어 에단과 함께 체육관에서 내보냈다.

루바흐 학원은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시설 곳곳에 양호실을 설비해 두었다.

특히 다치기 쉬운 체육관 바로 옆에도 고급 치료사가 상주하는 양호실이 존재했다.

“아, 안녕하세요.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 에?”

양호실에 들어서자마자 보조 업무를 맡은 여학생이 쥬다스를 알아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쥬다스 역시 그녀를 알아보았다.

“으음? 이렇게 또 보는구나. 반갑구만.”

“가, 감사했어요! 그때, 비율을 몰라 고생하긴 했지만…….”

일전에 쥬다스와 부딪히는 바람에 비커를 깨뜨렸던 그 소녀였다.

당시에 힐링 푸드를 만들고자 하는 그녀에게 팁을 알려줬었고, 이는 아마도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소녀는 수줍게 웃었다.

“성공…… 했거든요. 헤헤.”

“리이나? 환자가 온 게 아니었니?”

안쪽에서 들려온 치료사의 목소리에 소녀는 화들짝 놀라며 쥬다스와 에단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 그, 그으…… 어디가 아프신, 누가.”

방황하던 시선은 이내 자연히 쥬다스에게 고정되었다.

병색이 완연한 그의 모습에 소녀가 다시금 허둥대자 쥬다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허허, 그저 감기 때문에 왔단다.”

다독여지는 손길에 소녀는 진정하고 그들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치료사는 푸근한 인상을 가진 중년 남성이었다. 차트에 쥬다스의 이름을 받아 적은 치료사가 열을 재더니 곁에 선 소녀를 향해 고갯짓했다.

“리이나, 해열제C1과 종합 감기약, 그리고 강장제 3일 치.”

“네!”

약을 가지러 간 사이 치료사는 한 차례 더 쥬다스의 상태를 살폈다.

“쥬다스 님에 대해서는 전달받은 사항이 많아 익히 알고 있긴 하지만, 솔직히 놀라울 정도로 신체가 약하시군요. 어디, 요즘 생활하기엔 어떠신지요?”

“……으음, 괜찮습니다. 힘이 좀 없긴 하지만 점차 나아지고 있고.”

“나아졌다고 해봤자 몸의 기능 대부분 정지하다시피 한 상태예요. 절대 무리하지 마셔야 합니다.”

애초에 한참 성장해야 할 나이인 12세의 몸이 아니었다. 유아나 다름없는 쥬다스의 외형에 치료사는 주의에 주의를 덧붙였다.

그러던 사이 약을 봉투에 담아온 소녀가 쥬다스에게 이를 건네며 손을 내밀었다.

“저어, 손을.”

“……?”

악수하자는 의미인가 싶어 내밀어 잡자, 소녀가 이를 양손으로 감싸듯 쥐고 눈을 감았다.

우웅!

그 손길 아래 따스한 분홍빛 기류가 모여들었다. 생명력을 상징하는 맑은 분홍색이었다. 기운이 손바닥을 통해 흡수되자 몸이 한층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쥬다스가 눈을 끔뻑이며 소녀를 쳐다보았다.

“이건 치유력?”

“리이나, 이 아이를 여기 보조로 둔 큰 이유죠. 후후, 감기 정도는 금방 나으실 겁니다.”

치유력은 정령술만큼은 아니었으나, 꽤나 보기 드문 이능(異能) 중 하나였다.

일반 의학 지식만을 가지고 치료에 임하는 자들을 치료사라 부른다면, 타고난 치유력 순식간에 상태를 회복시켜 주는 이들은 치유술사라 부른다.

대현자라 불렸던 시절에도 자주 접해본 적 없는 생소한 능력이었던 탓에 쥬다스는 흥미로운 눈으로 리이나를 응시했다.

치유력으로 쥬다르의 치료를 마치고 눈을 뜬 리이나는 그 시선에 화악 얼굴을 붉히며 손을 놓았다.

“도, 도움이 되면 좋겠어요.”

“벌써 개운하구나. 고맙단다. 리이나.”

기특하다는 듯 빙그레 웃는 얼굴에 리이나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꼭 아빠 같아…….’

그렇게 생각하던 리이나는 제 생각에 놀라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실제 쥬다스가 그녀보다 2살이 많긴 했지만, 나이를 떠나서 저보다 작은 아이를 보고 아빠 같다니. 누가 들으면 대소할 이야기였다.

양호실을 나온 쥬다스는 에단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했다.

“……페어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내 얼른 힘을 길러 제대로 합을 맞추도록 함세.”

“무리하시면 안 된다고.”

“무리가 아니야. 이는 노력이라 하는 거란다.”

조곤조곤한 어투에 에단은 힐끗 그를 내려다보았다. 약하다곤 알고 있었지만 조금 전 치료사의 말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몸의 기능이 정지했다…… 라.’

순혈일수록 그 건강이 약하다는 말은 들어본 적 있었다.

하물며 짐승들도 잡종이 더 튼튼하고, 초대의 특성을 그대로 간직한 채 태어나는 순혈들은 대개 허약한 편이었다.

1황자는 그야말로 루바르잔 황조의 현신과도 다름없는 외형이었다.

티 없는 은발과 보석 같은 금안은 잡것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원색 그 자체였다.

색뿐이 아니라 생김새마저 초상에 그려진 조상을 그대로 빼닮았다.

그리하여 처음 황자가 태어났을 때 현 황은 크게 기뻐하며 그를 품에 안았다.

완벽한 외형에 가려 크나큰 결함이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에단이 이를 신경 쓰는 사이 체육관 앞에 도달했다.

약 3시간에 걸친 수업인 만큼 아직 반도 넘게 남아 있었다. 그래도 아파서 양호실까지 다녀온 판에 쥬다스를 연습 과정에 참여시킬 순 없었다.

이번에도 구경꾼 신세가 되어버린 쥬다스는 메이란이 학생들을 집합시킬 때까지 자리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학생들을 열 맞춰 세운 메이란은 양피지를 한 장씩 나눠주기 시작했다.

고급 가죽으로 제작된 양피지의 상단엔 커다랗게 성전의 마크가 찍혀 있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선작 100넘은 기념으로 한 편 더 들고 왔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꾸벅)

또 사족을 달자면 주인공은 노인답게(?) 한고집합니다. 이그레트 시절엔 그 황소고집에 정령들이 제일 고통받았다고....

그럼 오늘 밤이나 내일 중으로 다시 오겠습니다. ㅎㅎ

BlindSpot 님, kjs1885 님, 소라아카리 님, DSN 님, 오남사여 님, 이스센 님, 버츄얼 님 댓글 감사합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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