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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백로황자
“자, 지금 나눠준 건 교황 성하의 전달 사항이야. 매년 이맘때쯤 있는 행사니까 다들 짐작은 하고 있었지?”
메이란은 허리에 한 손을 얹고는 씨익 웃었다.
“교황청 현장 학습이다.”
양피지에 적힌 내용은 학원 루바흐의 15세 이하 재학생이라면 매년 권고받는 사항이었다.
제국 제일의 인재 양성 학교인 루바흐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비단 황실이나 귀족 사회뿐이 아니었다.
황권보다는 뒤쳐져 있으나 충분히 그 영향력을 펼치고 있고 불가침 영역을 지정할 권한마저 가지고 있는 성전(聖殿) ‘엘리시움(Elysium)’.
[돌아오는 순행절에 진명을 받으러 오라.]
진명은 교황청에서 직접 내려 받는 이름을 뜻한다. 이를 받거나 받지 않거나 권고 사항일 뿐 강제는 아니었으나, 웬만해서는 이를 받으러 교황청 방문을 택했다.
이렇게 해서 내려 받은 진명은 앞날에 축복을 내려주며, 본래 가지고 있던 이름 사이에 알파벳 초성 형태로 자리 잡아 기록된다.
따로 발설하지 않는 이상 본인 이외에는 공개되지 않는 이름이 바로 교황청의 진명이다.
그러나 문제는 교황청의 위치에 있었다.
“아, 귀찮은데.”
“이거 15살까지 하면 된대. 내년에 가자.”
“미리 다녀오는 게 마음 편하지 않아?”
학생들 사이에 소란이 일었다.
제국의 서쪽에 자리 잡은 학원 루바흐와 달리, 교황청은 수도에 위치해 있었다.
한 번 다녀오려면 열흘은 족히 걸리는 일정이었다.
진명을 받으러 간다고 하면 학원 측에선 수업 출석 일수로 인정해 주긴 하였으나 그보다 시간이 아까운 게 문제였다.
시끄러운 학생들 틈에서 쥬다스는 조용히 양피지를 정독했다.
양피지의 하단에는 루바흐 학원의 인장과 함께 주의 사항이 함께 붙어 있었다.
출석 일수 인정 요건 및 학원을 벗어나는 데에 필요한 여러 확인증에 관련해서였다.
[단, 신청자에 한해 배정되는 3인 1조로 움직일 것.]
“……3인 1조?”
보호자가 따라붙는 대신 조 편성을 하는 모양이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게 학원 측에서 알아서 조 편성을 해준다는 점이었다.
쥬다스는 턱을 매만지며 양피지를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숙소로 돌아온 쥬다스는 침대에 걸터앉아 손바닥을 펼쳤다.
“유니.”
「응, 이그레트.」
그의 부름에 정령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포로록 날아와 앉았다.
기분 좋은 듯 그 손끝에 뺨을 부비는 유니를 보며 쥬다스도 함께 미소 지었다.
“나는 언제까지 이 아해의 몸으로 살아가게 될까.”
「글쎄? 우린 네가 계속 있어주길 바라긴 하지만.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으음. 어느 수준까지 내 멋대로 행동해도 좋을까 하여…….”
난처한 듯 말끝을 흐리는 쥬다스를 빤히 올려다본 유니가 넌지시 찔러 물었다.
「……받고 싶은 거지? 이름.」
눈치 빠른 유니의 정곡에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교황청에서 준다는 진명.
이는 10세에서 15세까지만 받을 수 있는 특별한 세례명이었다. 일반적인 세례명과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는, 이름을 받는 이가 어느 정도 자기 의지를 가지되 아직 그 순수함이 남아 있을 시기만을 허가했다는 점이다.
더불어 성전에 기록되어 본인이 스스로 밝히지 않는 한 누구에게도 공개되지 않는 귀하고도 성스러운 이름으로 취급된다.
황권과 신권이 균형을 맞추고 있는 시점에서 교황청이 내리는 또 하나의 이름인 진명은 모든 귀족가 아이들에게 있어 필수 코스나 다름없는 선택지였다.
현황인 레위스 G. 루바르잔 아르키디온 역시 그 나이 때 교황으로부터 진명을 받았다.
이름 가운데 들어간 G는 진명의 초성에 해당하는 알파벳이었다. 그 G가 정확히 어떤 단어를 뜻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내가 여기 있었다는 이정표를 하나 세워 두었으면 하는 욕심이 드는구나. 허허, 다 늙어서 부리는 주책일꼬.”
「그 얼굴로 그런 말하면 되게 안 어울리는 거 알아?」
유니는 바람을 일으켜 그의 얼굴 옆선을 타고 흐른 땀방울을 식혀주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면 돼, 이그레트. 혹시 알아? 그대로 네가 평생을 살게 될지.」
“그건 좀 슬픈 일이지 않누. 이 아해는 하고 싶은 게 많았던 것 같던데…….”
「그-러-니-까! 넌 거기까지 걱정할 필요 없대도? 네가 사용하고 있는 이상, 지금 그 몸의 주인은 너야.」
정령들의 사랑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오로지 단 한 명을 향했다.
그 맹목적인 애정을 알고 있는 쥬다스는 작게 웃으며 뒤로 누웠다. 새의 깃털로 채워진 푹신한 베개의 촉감이 머리를 감쌌다.
고단했던 몸은 얼마 안 가 깊게 잠에 빠져들었다.
‘쥬다스’로 생활한 이래 처음으로 꿈을 꾸었다.
짧았지만 분명 쥬다스의 육신이 기억하고 있는 과거의 일부였다.
지금보다 훨씬 어린 쥬다스가 누군가와 함께 서 있었다. 아니, 단순히 가까이 있다고 해서 함께라고 칭하기는 어려웠다.
짝!
고개가 돌아갔다. 그럼에도 아이는 울지 않는다. 고통에 반응한 눈시울이 자연스레 붉어지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갑작스러운 손찌검에 놀라 작은 손을 들어 올려 뺨을 매만지자 꿈인데도 후끈한 통증이 밀려왔다.
“쓸모없는 것.”
“…….”
죄송해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사죄가 아이의 혀끝에서 맴돌았다. 뺨을 맞으면서 손톱에 긁혔는지 피가 새어 나왔다. 작은 손가락을 붉게 물들인 핏자국에 관심조차 주지 않고 상대는 휙 몸을 돌려세웠다.
“분하구나.”
쨍그랑!
평소 아끼던 화분이 맥없이 깨어져 사방으로 튀었다. 화분을 깨뜨린 여인이 붉은 입매를 고고히 휘며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 안심하려던 찰나, 이번엔 깨진 조각을 집어 들었다. 휙 허공으로 들리는 조각의 반사경에 하얗게 질린 아이의 얼굴이 비쳤다.
“……!”
안 돼, 막아야…….
어린 쥬다스의 마음과 동화된 이그레트의 염원이 누군가를 강하게 불렀다.
그리고 동시에 꿈에서 깨어났다.
잠이 든 쥬다스의 머리맡에 앉아 무언가 상념에 빠져 있던 유니는 심상치 않은 낌새에 놀라 반짝 고개를 들었다.
「이건? ……이그레트!」
드드득-
허공에 날아오른 유니의 시야에 가볍게 진동하고 있는 대지의 흐름이 보였다.
위태롭게 흔들거리던 책장에서 책이 우수수 쏟아졌고 선반 위에 올려 둔 찻잔이 몇 개 떨어져 깨어졌다.
때아닌 지진에 유니는 표정을 굳히고 쥬다스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이그레트.」
그 이마를 조심스레 쓰다듬는 순간, 거짓말처럼 진동이 멈췄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쥬다스를 보며 유니는 걱정스레 다시금 그를 불렀다.
「이그레트, 괜찮아?」
“……으응?”
잠에 취한 눈으로 멍하니 유니를 올려다보던 쥬다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물끄러미 덮고 있던 이불을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 유니의 고개도 돌아갔다. 유니는 걱정하던 것도 잊고 꺄욱 하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이불을 향해 삿대질했다.
「너, 너어!」
「……히끅…….」
거기엔 유니와 똑같은 날개를 단 작은 정령이 하나 주저앉아 있었다.
황토빛깔 머리카락이 덥수룩하게 자라 있어 눈까지 가려진 소년 형태의 정령은 어깨를 바들바들 떨며 이불에 파묻혀 울먹거렸다.
이를 본 쥬다스가 그를 향해 다정하게 손을 내밀었다.
“어서 오련, 토니.”
「우우…… 이그, 레트으으. 후아앙!」
흙색으로 빛나는 정령은 쪼르륵 내민 손에 달라붙어 서럽게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유니는 올 게 왔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땅의 정령왕 ‘토니’, 이그레트의 부름에 응답한 두 번째 정령이었다.
***
토니는 뭐가 그리 서러운지 한참을 울었다.
자다 깨어 난데없이 우는 정령을 직면한 상황에 놓인 쥬다스는 난처한 웃음을 지은 채 기다려주었다.
제풀에 지쳐 울음을 그친 토니는 쥬다스의 손에 껌딱지처럼 매달려 칭얼거렸다.
「보고 싶었다요, 이그레트.」
“나도 마찬가지란다. 허허.”
「죽 기다렸는데, 부르지 않아서. 이제 우릴 잊어버린 건가 했다요…….」
생김새부터 말투까지 4속성 정령왕 중 가장 아이 같은 토니는 어리광도 잘 부렸다.
시무룩한 얼굴로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토니에게 쥬다스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럴 리가. 내게 너희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친우들이었거늘. 한데 그 말인즉, 너희는 모두 내가 여태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게야?”
「웅?」
「당연하지, 이그레트. 넌 우리의 계약자잖아. 부르지 않는다면 먼저 찾아올 수야 없지만 너의 존재만큼은 느낄 수 있어.」
고개를 갸웃하는 토니 대신 유니가 도중에 끼어들어 답변했다. 그런 그녀를 이제야 발견한 토니의 표정이 밝아졌다.
「유니?!」
「어, 응.」
「요즘 갑자기 안 보여서 이상하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괜찮아. 내가 너보다 먼저 와 있었으니까.」
심드렁한 대꾸에 토니가 움찔 날개를 떨었다. 앞머리에 가려져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확실히 불편함을 드러낸 굳은 입매가 씰룩였다.
「……유니가 먼저?」
「어머, 왜? 이그레트가 제일 먼저 부른 정령이 나라는 데에 불만이라도 있어?」
「거짓말! 나보다 유니가 더 보고 싶었던 거다요?」
토니가 빼액 반발하자 유니는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마치 남매간 유치한 말다툼을 하듯 투닥거리는 두 정령을 바라보던 쥬다스가 부드럽게 그들을 달랬다.
“둘 다 그만하련. 보고 싶지 않아서 늦게 부른 게 아니란다, 토니.”
「훌쩍, 그럼 왜……?」
“…….”
그의 금안이 따뜻하게 정령들을 담았다.
“내가 부르면 너희는 결코 내 곁을 떠나려 하지 않을 테니까.”
그에게 있어 정령은 무엇보다 소중한 친우들이었다. 동족조차 외면하여 배신의 칼에 피 흘렸던 자신에게 친구이자 가족이 되어준 이들.
그런 이들에게 잠시라도 자유를 주고 싶었다. 언젠가 부르더라도 최대한 늦게.
그런 면에서 눈을 뜬 뒤 제일 처음 곁으로 불러낸 유니에게는 상당히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쥬다스의 마음을 알아차린 유니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당연하잖아. 그건.」
“……허허.”
쥬다스는 정령들을 손에 보듬은 채 다시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노곤한 육신에 몰려오는 수마를 이기기 힘들었다.
신뢰하는 이가 곁에 둘이나 있다는 것은 상당히 안심되는 일이었다. 예기치 못하게 토니를 불러낸 것은 미안했지만 이미 불러낸 이상 그 곁에서 다시 사라지는 일은 없을 터였다.
그는 수마에 저항하지 않고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악몽을 꾸지 않길 바라면서.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선작 200찍은 걸 발견하고 부랴부랴 들고 왔습니다. ㅎㅎ
응원 감사드리고, 선추코 모두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ㅠㅠ 신입글쟁이에겐 정말 가뭄의 단비와도 같네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BlindSpot 님, 김햇살 님, 오남사여 님, 애플앗쿠림 님, 초코라양 님, 에리나 님, 시르에리안 님, 우비짱구 님, 오르비 님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