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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진명식
학원 루바흐에서는 진명식에 참가신청을 낸 학생 명단을 취합하여 교황청으로 향하는 날짜를 지정해 준다.
학생 개개인의 능력을 고려하여 3인 1조로 배정해 주기 때문에 딱히 따로 인원을 모을 필요는 없었다.
무작위로 결성되는 팀에는 불만을 가질 수 없다.
이 기회에 뭉치는 사람끼리만 뭉칠 게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세우라는 학교 측의 뜻도 섞여 있었다.
친한 사람과 떨어지게 된 학생들은 그 사실에 아쉬워했지만 쥬다스로서는 이 편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친하다고 부를 만한 사람도 없었거니와, 오히려 피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출발 당일 교무처에서 만난 이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쥬다스 님?”
“허어, 이거 참 반가운 우연이로구나. 에단.”
시간보다 한참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던 쥬다스가 반갑게 손을 들어보였다.
에단은 묵묵히 고개를 숙여 보이곤 다가왔다.
“진명식을 이번 절기에 신청하셨을 줄은.”
12살인 쥬다스에겐 아직 3년의 기회가 더 남아 있었다.
진명은 15세가 지나기 전에만 받으면 된다. 실제 많은 이가 충분히 뒤로 미룬 뒤에 교황청을 방문하곤 했다.
특히나 몸이 약한 그라면 당연히 미룰 것이라 예측했던 것이다.
쥬다스는 에단의 말뜻을 이해하고 부드럽게 웃었다.
“기회란 주어졌을 때 잡지 않으면 곤란하니 말이야. 왜 그러누? 혹, 주책 같아 보이느냐?”
“……그런 뜻은 아닙니다.”
“하면?”
알면서도 물어오는 짓궂은 금안을 마주보며 에단은 하는 수 없이 마주 미소 지었다.
“강인해 보이십니다.”
“원 녀석도.”
그를 괴롭히는 체력의 한계에 굴하지 않고 진명식에 참가하는 모습이 강인하게 느껴진 건 에단의 진심이었다.
에단은 눈앞의 백로황자가 하루 빨리 건강을 회복하길 고대했다.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무시받기는커녕 제국의 1황자로서 전혀 무리 없는 위용을 떨칠 수 있으리라.
아직 같은 조원 한 명이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교무처 로비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구성이 모두 모인 팀들이 속속들이 출발하는 모습이 보였다.
오늘 출발하는 팀은 이제 몇 남지 않았다. 이대로 마지막 조원이 오지 않는다면 자동으로 일정은 취소였다.
학원 측에서 교황청 방문을 허가하기 위하여 요구하는 조건이 반드시 3인 1조를 유지하도록 함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출발 대기 시간이 거의 끝나가자 에단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진득하니 기다려 보거라. 여직 시간이 남았으이.”
“곧 끝납니다.”
에단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엄격한 무예가에서 자란 그는 매사에 칼 같은 면모가 있었다.
절대 꾀부리지 않고 맡은 바를 충실히 수행하며, 시간 관리에 철저했다.
대기 시간이 끝났을 때 와봤자 허가증을 받지도 못할뿐더러, 그런 불성실은 염두에 두고 싶지도 않다.
그리 생각한 에단은 1황자를 흘끗 돌아보았다.
저보다 오래 기다렸을 쥬다스의 표정은 오히려 느긋하기 그지없었다.
“아직 좀 더 남았지 않느냐.”
“……올 것이라면 진작 왔어야 합니다. 이 이상 기다리는 건 무의미하다 봅니다.”
그때였다.
그들 뒤에서 얼음장처럼 차가운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멋대로 떠들다니, 교양 없긴.”
그들의 마지막 조원인 크리스티나 델피아였다.
크리스티나는 말하자면 루바흐 학원의 여왕이었다.
14살 소녀라곤 생각하기 어려운 차갑고 도도한 태도와 루바르잔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델피아 공작가 출신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학생들 사이 거대한 팬층을 보유했다.
길게 늘어뜨려 끝으로 갈수록 연해지는 특이한 바닷빛 머리카락과 더불어 청순형 미인이라는 사실도 그에 한몫했다.
같은 수업을 들어도 말 한마디 못 붙여 본 학생이 수두룩했다.
평소 그녀를 따르던 추종자 없이 홀로 나타난 것 자체가 이례적이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에단은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원래 주로 무표정이라 티가 나진 않았으나 적어도 여기 모인 두 사람은 알아볼 수 있는 변화였다.
그의 입에서 크리스티나 못지않은 서늘한 음색이 흘러나왔다.
“……팀 전체에 민폐를 끼치는 자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군요.”
“이 내가 그런 것까지 신경 써줄 가치가 있을까.”
금방이라도 쩌적 갈라질 듯한 팀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는 건 쥬다스뿐이었다.
쥬다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껄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얘야. 에단 이 아이가 네가 오길 많이 기다렸단다.”
“……당신.”
또래로부터 들어본 적 없는 말투에 크리스티나의 도도하던 표정이 잠시 허물어졌다.
“그럴 땐 솔직하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되지 않겠누.”
잠시 그를 내려다보던 크리스티나는 작게 숨을 들이켜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후……, 그래. 틀리지 않은 말이네. 늦은 건 미안하게 되었어.”
그녀의 깔끔한 사과에 에단 역시 덤덤히 답했다.
“괜찮습니다.”
공작가 자제 둘과 황자의 조합이란 무작위 배정치고는 굉장히 부자연스러웠다.
쥬다스는 이 3인의 조합이 우연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에단을 보자마자 의도된 구성임을 눈치챘다.
황제의 총애대로 1황자가 황태자위에 오른다면, 이 세 사람은 반드시 친밀한 유대감을 가져야 마땅하다.
설령 황자로서 구실을 못한다 할지라도 쥬다스는 황실에 꼭 필요한 말 중 하나였다.
그는 학원 역시 인간 사회의 일부임을 실감하며 쓰게 웃었다.
‘겉으로는 파벌을 만들지 말라 하며 결국은 이리 짜임새를 틀어놓다니, 모순이구나.’
3인이 모인 것이 확인되자 확인증이 발부되었다. 그들은 안전한 이동을 위해 학원 내 포탈로 안내되었다.
포탈은 제국의 넓은 땅덩어리 곳곳에 설치된 원소형 이동 장치였다.
마법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만들어 낸 최고의 발명품으로, 이 포탈이 없었더라면 거대한 영토를 소유한 루바르잔 제국이 지금처럼 단결력을 보이지 못했을 터였다.
영토 전쟁 당시에도 유용하게 쓰였으며 지금처럼 귀한 가문의 자제들이 학원을 벗어나 이동할 상황에 필요한 시설이기도 했다.
물론 포탈만으로 단번에 루바흐 학원에서 수도의 교황청까지 이동하지는 못한다.
포탈이 인체에 무해한 한에서 닿을 수 있는 최대 비거리는 약 2천㎞.
잘 훈련된 병사라면 2만 킬로도 버틸 수 있다고 하나,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학생들은 안전 수치인 2천에 제한되었다.
때문에 교황청까지 가려면 하루에 한 번씩 특정 지방 포탈을 거쳐 이동해야 했다.
이 포탈의 원리를 확장시켜 보다 장거리 이동이 가능하게 만든 데에 이바지한 최고 공로자는 역시 이그레트였다.
단순 마법학만을 적용시키던 포탈에 그가 연구한 자연 4대 속성을 더해 최대한 인체에 해로운 영향을 주지 않도록 안전 설계를 더했다.
그래서 제국의 포탈은 그 후유증이 없기로 유명했다.
포탈 앞에 선 쥬다스는 예전에 비해 또 많이 발전한 장치를 눈으로 훑었다.
“외출 확인증을 제출해 주십시오.”
“여기 있습니다.”
에단이 확인증을 내밀자 이를 확인한 포탈 관리자가 그들에게 주의 사항을 다시금 언급했다.
“외출 기간은 열흘입니다. 무단으로 어길 시 해당 기간 수업의 학점에 반영됩니다.”
관리자는 사무적인 태도로 포탈을 작동시켰다.
마치 커다란 전신 거울처럼 생긴 포탈은 물결치듯 일렁이더니, 먹물에 물들 듯 새까맣게 변질되어 갔다.
마법력에 의한 공간의 분리였다.
“미성년자의 포탈 이용 가능 횟수는 하루 1회입니다. 최종 목적지는 교황청 엘리시움이며 총 3일에 걸쳐 제1, 제2, 최종 목적지까지 이동하게 됩니다. 지금 향하실 제1목적지는 샤를로 영지입니다.”
쿠오오.
포탈에서 마치 괴수가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났다.
학생들은 물론 성인들마저 꺼려하는 굉음이었다.
그러나 세 사람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깔아보는 듯한 크리스티나의 도도한 눈빛과 무표정한 에단, 거기에 평안하기 그지없는 쥬다스의 표정까지 확인한 포탈 관리자는 내심 감탄하며 포탈을 향해 손짓했다.
출발 신호였다.
세 사람이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먹물 같은 에너지가 그들을 집어삼켰다.
“학우 여러분의 안전한 외출을 기원합니다.”
***
검은 장막이 사라지고 다시 시야가 밝아졌을 때는, 출발할 때와 마찬 가지로 포탈 앞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샤를로 영지의 포탈 관리자가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신분에 따른 공식 방문이 아닌 루바흐 학원 학생의 견학이나 다름없는 방문이었기에 그 외에 따로 예를 갖추는 이들은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여기는 샤를로 영주성입니다. 포탈 재이용 시간은 내일 오전 10시부터이니 이전까지 성에 머무시면서 자유 시간을 가지시다 복귀해 주시면 됩니다. 그럼 샤를로에서 편안한 하루 보내십시오.”
관리자는 간단한 설명과 함께 그들을 안내하여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포탈 관리실 바깥쪽은 계단과 이어진 영주성 외곽이었다.
포탈 발전에 이바지했으나 정작 스스로는 장거리 포탈 이동 경험이 별로 없었던 쥬다스는 신기한 마음에 외곽 복도를 빙글 둘러보았다.
뻥 뚫린 난간에 손을 짚어 내려다보자 샤를로의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샤를로 영지라.”
훅 불어온 봄바람에 가볍게 그의 은발이 휘날렸다.
그 뒤로 크리스티나가 휙 몸을 돌려 지나쳐 갔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정령들 이름은 계약할 당시 이그레트가 지었습니다. 본래는 따로 이름이 없다는 설정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은 술사가 부리는 정령의 이름을 모릅니다.
그리고 선추코, 감사드립니다! 저도 얼마전까지 독자입장이었던지라(물론 지금도)... 추천이나 코멘트 남기는 게 얼마나 번거로운 작업인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ㅠㅠ 이 감사는 진심입니다. 완결까지 죽 함께 달려주실 수 있다면 좋겠네요. ㅎㅎ
BlindSpot 님, 나쯔히보시 님, 오르비 님, 차은하수 님, abcdxyz 님, 저겨꾼 님, 초코라양 님, 시르에리안 님, 불적절포지션 님, 쩡쩡쩡 님, 오남사여 님, windeuria 님, 마을청년1 님, Ylvis 님, 검은위습 님, 내가개뽕 님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