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1화 (1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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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진명식

“자유 시간마저 같이 지낼 필요는 없겠지.”

“어딜 가는 겁니까.”

에단의 찌르는 듯한 질문에 그녀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싸늘하게 돌아본 그녀가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어투로 답했다.

“내게 상관하지 마, 그대. 학원에서 요구하는 것 이상 해줄 의무는 없으니.”

“……내일 출발 시간, 늦지 마십시오.”

“흥, 사서 걱정이로군. 학원 수칙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아.”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다는 듯이 홱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가 버리는 크리스티나의 뒷모습에 쥬다스는 볼을 긁적였다.

“꽤나 날이 선 아이로세.”

“…….”

영 불쾌한 눈으로 그녀가 사라진 쪽을 보던 에단은 가볍게 한숨을 뱉었다.

여럿이서 한 조로 움직여 본 적 없는 건 에단도 마찬가지였다.

시작부터 삐꺽거리는 팀워크에 완벽을 추구하는 에단의 심기는 상당히 불편해졌다.

그런 에단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쥬다스가 손을 뻗어 난간 너머를 가리켰다.

“가본 적 있느냐?”

“……예? 아뇨, 샤를로 영지를 방문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보통은 그랬다. 포탈을 이용하는 것은 비용도 비용이거니와 그 절차가 까다로워 매우 급한 일이 아니면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루바르잔 제국은 쥐고 있는 강력한 국력만큼이나 그 보유 면적이 어마어마했다.

같은 루바르잔 사람이라 하더라도 평생 동안 가보지 못하는 영지가 수두룩하기도 했다.

그러니 그간 제국 동부 영토에서 머물러 온 에단이 서부 지역에 속하는 샤를로에 와보지 못한 건 비단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샤를로 영지를 처음 밟아보는 건 쥬다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옛 생각이 나는구나.”

“예?”

“아니. 그보다 이거 참, 산보하기 좋은 날씨야.”

92년간 살아온 ‘이그레트’는 평민이었다.

제국 어딘가, 기억도 나지 않는 이름의 거리를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어쩌면 샤를로 근방을 지났을 수도 있었다.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할 필요도 없이 그는 이리저리 흐르듯 살았다.

종래에, 믿었던 이들에게 배신의 칼날이 꽂히기 전까지는.

쥬다스는 곁에 있던 에단을 향해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그때와 같은 제안을 했다.

“어찌, 같이 가보련?”

무슨 생각으로 그 제안에 응했는지는 몰라도, 에단은 순순히 쥬다스를 따라 영주성 밖으로 나왔다.

따로 신분을 증명할 필요도 없이 그들이 입고 있는 고급스러운 루바흐 학원 교복이 그들의 신분증이나 다름없었다.

학원 루바흐에 다니는 학생은 주로 귀족 자제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시험을 보고 일정 범위 이상에서 뛰어난 두각을 드러낼 경우와 가문이 지닌 재력과 권력이 막강할 경우가 아니면 받아주지 않는다.

입학 기준이 까다로운 만큼, 학원의 이름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막말로 뛰어난 재능 없이 가문명과 돈으로만 입학하려 한다면 어지간한 영지 하나 값은 지불해야 한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두 사람이 밖으로 나오자 자연히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러나 시선은 그리 오래 붙지 않았다.

샤를로 영지는 매년 진명식에 참가하는 루바흐 학생들이 포탈을 타고 들리는 거점 중 하나였다.

그랬기에 영지에서는 지속적으로 보안을 강화했고, 곳곳에 경비들이 파견되어 있었다.

또한 포탈 거점으로 지정된 이래로 루바흐 학원생뿐 아니라 주요 인사가 제법 많이 지나다녔고, 이에 익숙해진 주민들은 자연히 학생들에게 크게 호들갑을 떨지 않게 되었다.

오늘만 해도 그들보다 미리 도착하여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이 여럿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편안한 분위기로구나.”

“……예.”

반박자 뒤늦게 돌아오는 응답에 쥬다스는 힐끗 에단을 올려다보았다.

“어째 그러는고?”

“……예?”

“긴장한 것 같으이.”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이었는데 그 안에서 긴장감을 읽어낸 쥬다스를 놀란 시선으로 마주한 에단이 이내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별 이유는 아니나.”

“이런 거리에는 처음인가?”

“……정말 쥬다스 님께는 숨길 수가 없군요.”

마치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 같다. 감탄인지 푸념인지 모를 말에 쥬다스는 늘 짓곤 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대현자라서가 아니라 누구라도 92년쯤 살다 보면 십 대 어린아이들이 하는 생각쯤 추측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된다.

상대가 설령 귀한 귀족가 도련님이든 아가씨든 아이는 결국 다 같은 아이였다.

그렇게 사실대로 대답할 수 없으므로 쥬다스는 미소를 지은 채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실은…… 호위 없이 무질서한 장소에 나와 본 일 자체가 처음입니다.”

재능이 분명하고 의지도 있으며 출신 가문까지 완벽한 공작가 도련님.

그의 인생은 태어나서부터 지금에 이른 15살까지 탄탄대로였다.

쥬다스는 왜 그런 에단이 굳이 학원 루바흐를 택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기척을 읽게 되는지라.”

에단 헤이가,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경험이었다.

그가 가문으로부터 피나는 노력을 통해 전수받은 검술은 나무랄 데 없이 훌륭했다.

헤이가가(家)에서 사용하는 검은 칼등과 날이 구분된, 엄밀히 따지면 검(劍)이라기보다 도(刀)였다.

일반적으로 검이라 하면 양날로 구성된 곧게 뻗은 무구이다.

반면 도는 외날이며 살짝 휘어 있어 보다 베기 기술에 적합하다.

여기서 적합이란 베었을 때 그 파괴력이 강한 쪽을 의미한다.

이러한 외날붙이, 도를 사용한다는 것은 확실히 적의 숨통을 끊어 제압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한다.

잔기교 없이 묵직하게 베어 넘기는 도의 특성상 이를 다루는 무인에게 허점이 있다면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잠깐의 방심이나 틈이 곧장 치명타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더욱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 15살 소년인 에단이 가문 내에서 실전과 흡사한 위협을 겪어봤을 리 없었다.

이건 에단에게 있어 상당한 단점으로 작용했다.

“그래, 불안할 만하지. 보호자가 없이 다닐 땐 어느 정도 경계를 하는 것도 필요하긴 하니 그 불안도 나쁘지 않다고 본단다. 하나 오늘은 걱정 말려무나.”

“……?”

“혼자 나온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래서 더 불안한데.’

허허 웃는 쥬다스를 향해 차마 속내를 밝히지 못하고 속으로 삼켰다.

그러고 보면 쥬다스는 작은 체구는 물론이고 실제 나이조차 에단 자신보다 어렸다.

황자씩이나 되면 아마 이런 경험이 더 없으면 없었지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러나 에단은 그의 여유로운 표정이 마냥 어린아이라서 나올 법한 종류가 아님을 알았다.

‘단순 성품이 그러한 건지. 아니면 무언가 믿고 있는 것이라도?’

어느 쪽이 되었든 평범한 황자는 아니었다.

에단의 관찰하는 시선에 두 정령은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참 희한해. 인간은 왜 모든 걸 겉모습으로 판단할까.」

「모르겠다요. 아마 다른 게 안 보여서?」

바로 코앞에서 알짱거려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놀리듯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유니 때문에 살랑살랑 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

우뚝.

때마침 에단이 걸음을 멈춰선 탓에 유니는 자동으로 찔끔했다.

술사가 아닌 인간이 정령을 볼 수는 없다지만 하필 시선이 향하는 방향과 타이밍이 절묘했다.

유니는 슬금슬금 옆으로 물러섰다.

당연하게도 그가 반응한 것은 정령들이 아니었다.

“크리스티나 님!”

“크리스티나 님 조원은 어떤 분들인가요?”

“누군지 몰라도 정말 복 받은 분들이군요.”

거리 한쪽에서 와글와글 몰린 학생들이 있었다. 그 중심에는 단연 크리스티나 델피아가 존재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루바흐에서 그녀를 추종하는 학생의 스펙트럼은 넓었다.

도도하다 못해 쌀쌀맞기까지 한 그녀였지만 그 인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지금도 대꾸 한 번 하지 않고 천천히 거니는 그녀의 주변으로 몰려든 학생들이 저들끼리 말을 걸기 바빴다.

맞은편에서 움직이던 크리스티나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마치 모르는 사람인 양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

“흠. 저길 보거라, 에단.”

말로 표현하진 않았어도 크리스티나의 오만한 태도가 거슬렸는지 빤히 쳐다보고 있던 에

단의 팔을 쥬다스가 툭 다독였다.

마치 뿔난 아이를 어르는 듯한 손길에 일어났던 짜증이 사라지고 다소 민망함이 찾아들었다.

에단은 크리스티나에게서 시선을 떼고 쥬다스가 가리킨 방향을 쳐다보았다.

“……강이군요.”

잘 다듬어진 강변을 따라 잔잔한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샤를로의 자랑인 풀문강이었다.

가까이서 내려다본 강물은 그 색이 오묘했다. 단순한 빛의 반사 작용이 아니라 짙은 남색에서부터 청록색을 지나쳐 연두, 노랑까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색을 차분히 지켜본 에단이 작게 감탄했다.

“놀랍군요. 색이 변하는 강물은 처음 보았습니다.”

“우리가 타고 온 포탈에 사용되는 물이란다. 여기엔 정령이 살고 있지.”

“정령……?”

그 말에 다시 내려다본 강물은 보석처럼 빛날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어... 그, 저 놀라도 됩니까?;;

어제 이후로 생각지도 못하게 많은 사랑을 받아서 정말 이 심정을 어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네요. 드림워커 시절 이후로는 처음 잡아본 판타지소설인데, 놀란 것도 놀란 거지만 독자님들의 기대에 다 부응할 수 있을까 걱정부터 드네요. ㅠㅠ;

닉네임이 '공든탑'인 이유는, 절대 무너지지 않겠다는 결심과도 같습니다. 보여주신 관심과 애정에는 완결로 보답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가장 질문을 많이 주셨던 '쥬다스(이그레트)의 할배말투'는,

현재 작중 인물들은 워낙 특이한 황자니까 그러려니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상하게 느껴도 '어린 황자가 황실어른들 말투를 따라하는 건가'정도...?

늙어가면서 한 평생 입에 익은 말투를 한순간에 바꾸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그레트 본인도 딱히 아무도 지적을 하지 않으니 바꿀 필요를 못느끼고 있고... 스토리라인이 진행되면서 말투가 어느 중간쯤으로 조정될 예정은 있으나, 싹 소년의 말투로는 바뀌지 않을 것 같습니다. ㅎ

사족이 길어졌네요.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추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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