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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진명식
“허허, 그 아이들은 술사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단다. 하나 정령이 머무는 장소는 이렇듯 신비로운 경관을 만들어낸다. 순수하고 아름답지 않느냐.”
때마침 노랑에서 붉은색으로 물드는 강물이 보였다.
일반 자연물에선 쉽사리 볼 수 없는 신비로운 현상을 목격한 이상 보지 않고도 정령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낯설고 혼잡한 영지에 나와 필요 이상으로 긴장되었던 머리가 본래 자신의 페이스를 찾기 시작했다.
쥬다스가 의도한 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에단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호오? 이거 우연이구나. 나는 홀로 나올 산보를 적적하지 않게 따라와 준 네게 감사하고 있었거늘.”
씩 웃는 금안을 보고서야 그 의도를 확신했다.
몸은 작을지 모르나 그 안에 품고 있는 그릇은 과연 황가의 핏줄답게 큰 인물이었다. 이는 일종의 현인이었다.
‘이런 자가 어찌 백로황자라 불리며 조롱을 받는단 말인가.’
에단이 1황자의 정보를 수정하며 의문을 품던 찰나, 근처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도둑이야!”
“저놈 잡아라!”
와 하고 일어난 소동에 마찬가지로 강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죄 돌아보았다. 소란이 일어난 곳은 한 빵가게였다.
도둑이라 몰린 이는 순식간에 붙들렸다. 샤를로가 치안 유지에 힘을 쏟는 영지답게 소란을 감지한 경비병이 바로 달려온 덕이었다.
웅성거리며 몰려든 인파가 둥글게 주변을 에워쌌다. 쥬다스와 에단도 그 맨 앞줄에 서서 상황을 살폈다.
경비에게 덜미를 잡혀 바닥에 엎어진 청년은 코피를 줄줄 흘리며 사지를 버둥대고 있었다.
“아, 아니에요. 훔치려던 게 아니라.”
“이 자식! 네가 크리스티나 님의 브로치를 훔쳤잖아?”
“떨어진 걸 주웠을 뿐인데……. 바로 돌려드리려고 했어요!”
한 학생의 분노대로 도둑의 손에는 고급 브로치가 들려 있었다.
금을 녹여 방패의 모양을 만들어낸 브로치에는 자잘한 보석이 박혀 있어 그 값어치가 상당해 보였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도둑은 정말로 억울한지 코피를 닦을 생각도 못하고 달달 떨고 있었다.
경비병이 도둑의 손에서 브로치를 빼앗고 그를 포박했다.
“똑바로 일어서!”
“흐, 크흑.”
손목을 묶은 수갑 탓에 억울함이 몰려왔는지 급기야 도둑은 눈물까지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경비병의 질타에 간신히 일어서긴 했으나 똑바로 서지 못하고 절뚝거렸다.
그는 절름발이였다.
“떨어진 걸 주웠다는 저치의 말은 아마 맞을 게야.”
쥬다스가 턱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곁에 있던 에단이 조용히 물었다.
“왜 그리 생각하십니까?”
“크리스티나 그 아이의 곁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느냐. 발을 저는 낯선 이가 다가와 브로치를 뜯을 때까지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 분명 브로치를 떼어내고 그걸 바닥에 흘린 일까지는 다른 이가 했을 것이야.”
“그렇다면 그자는 왜 가져가지 않고 굳이 바닥에 흘려두었단 말씀이십니까?”
“흐음. 혹 목적이 브로치가 아닌, 사람을 곤란하게 하고자 함이었다면 어떨 것 같으냐.”
쥬다스의 금안이 담담하게 울고 있는 도둑을 향했다.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는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존재했다. 마찰이 생겨서 싫어하는 경우는 나름의 이유라도 있으니 차라리 양반이었다.
너무 잘난 재능을 질투하거나, 너무 못난 인간을 꼴 보기 싫어 무시하기도 했다.
단순히 재미로 비수를 꽂는 이도 있었다.
상당수의 인간은, 무리가 생기면 누군가 하나를 따돌리게 된다.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글쎄, 브로치같이 몸에 직접 지니고 있는 귀중품을 훔치는 건 충동만으론 어렵단다. 한낱 도둑질이긴 하나 기술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야.”
“재미있네. 그럼 진짜 범인은 누구란 소리지요?”
불쑥 끼어들어 쥬다스에게 말을 건넨 건 다름 아닌 크리스티나였다.
언제부터 그 곁에 다가와 있었는지 오만한 눈으로 쥬다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쥬다스는 놀라지 않고 턱을 매만지던 손을 내렸다.
“허허, 듣고 있었는가. 그저 짧은 소견이었다만, 이 이상 함부로 끼어들 일은 아닌 것 같으이.”
“……그래요? 그럼 다른 걸 묻지요. 당신이 말씀하신 ‘누군가가 곤란하게 하고자 한 사람’은 나 크리스티나와 저 도둑 중 누굴 뜻한 거죠?”
“…….”
포박당한 도둑 청년의 눈길도 그들 쪽을 향했다.
갑작스러운 크리스티나의 관심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시선이 집중된 쥬다스는 잠시 침묵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억울함보단, 곤란함을 느낀 사람이지 않겠느냐.”
***
도둑이라 몰린 청년은 그대로 경비병에게 잡혀갔다. 별 반전 없이 사건이 마무리되자 구경꾼들은 싱거워하며 자리를 떴다.
타인의 불행을 단순한 구경거리로 취급하는 사람이란 어디에나 많았다. 그 사실을 실감하며 쥬다스는 씁쓸하게 강변을 따라 걸었다.
문득 에단이 물었다.
“왜 억울한 자를 끝내 도와주시진 않으셨는지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결국 그치는 도둑이 맞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지.”
“예?”
의외의 답변에 에단이 미간을 좁혔다. 쥬다스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떨어진 걸 주웠다’……. 거기까진 진실일지 모르되, 제 코가 깨져 피가 흐르면서까지 손에서 물건을 놓지 않았다는 건 그만한 탐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 주운 물건이라도 돌려줄 생각이 없다면 이가 도둑이 아니고 무엇일꼬.”
그 말에 에단은 쥬다스가 마냥 부드럽기만 한 인간이 아님을 깨달았다.
죄는 죄,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은 받도록 한다. 처벌에 있어서는 제법 단호한 면모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황자로서 나쁘지 않은 가치관이었다.
다음 날, 세 사람은 다시 포탈 앞으로 모였다. 이번엔 전날과 달리 크리스티나가 늦지 않고 시간 맞춰 나타났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에단을 향해 코웃음 친 크리스티나는 그들의 곁에서 함께 대기 시간을 기다렸다.
오만하고 도도한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었기에 지나가다 이를 목격한 다른 루바흐 학생들은 놀라 저들끼리 수군거리기도 했다.
포탈을 타고 이동한 두 번째 거점은 비교적 수도와 가까운 편에 속하는 산트리안이었다.
산트리안은 타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온갖 정보와 물자가 오가는 무역 도시이다.
거대한 상단이 본진을 설치하고 주둔하는 것만 수십 군데였다. 뿐만 아니라 정보 길드나 암적인 거래처 역시 이곳 산트리안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밤에만 열리는 야시장이라든지, 여타 불법적인 거래 현장도 이곳에선 암묵적으로 허용되었다.
하나하나 통제하기에는 그 규모가 굉장했으며, 때로는 위험한 거래가 필요할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트리안은 샤를로보다 방문자 수가 훨씬 많았고 제국민뿐 아니라 타국 사람의 비율도 눈에 띄게 높았다.
“그럼, 오늘도.”
어차피 다음 포탈은 또 하루가 지나야만 이용이 가능했다.
크리스티나는 귀찮다는 듯 고개만 까딱하곤 돌아섰다. 오늘은 에단 역시도 들를 곳이 있다며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비웠다.
홀로 남게 된 쥬다스는 머리 위에서 뒹굴거리는 정령들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자, 이제 어쩌면 좋을까.”
「좀 쉬어두는 게 어때? 어제 많이 걸어서 피곤하지 않아?」
유니의 호들갑스러운 걱정에 그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처음 깨어났을 때보다야 체력이 늘었다.
축축 늘어지는 몸을 이끌고 착실히 수업에 참석했으며, 그중 봉술을 단련하기 위해 여기저기 쓸리고 까지면서도 열심히 연습했던 시간들이 헛되진 않은 모양이다.
금방 피로해지고 제 나이에 비해 나약한 건 여전했지만, 어느 정도 견딜 만한 수준까진 되었다. 체력이 붙는다는 것은 좋은 징조였다.
「그럼 이그레트! 놀러 가자요!」
토니가 해맑은 어조로 외치며 붕 얼굴 옆으로 날아왔다.
땅 속성 정령은 다른 속성에 비해 호기심이 무척 많았다. 바람 속성인 유니가 감성이 풍부하고 수다쟁이인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바깥 구경을 갈 생각에 벌써부터 신이나 함빡 웃고 있던 토니의 뒷덜미를 유니가 홱 채어 잡았다.
「너란 애는 진짜, 그만큼 놀았으면 됐지! 왜 이그레트까지 꼬드겨서 놀려고 하니?」
「히잉, 그치만 궁금한데.」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지 궁금할 게 뭐있어? 뭐, 정 가고 싶으면 혼자서 놀러가든가. 이그레트는 지금 무리하면 안 된다구.」
「싫어어어! 이그레트가 함께가 아니면 안 갈 거다요!」
유니의 조곤조곤한 설명에도 토니는 빼액 떼를 썼다.
소환된 정령이라 해도 술사와 어느 정도 일정 거리까지는 멀어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두 정령이 쥬다스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는 건, 그만큼 그를 아끼고 있다는 마음의 증빙이기도 했다.
뒷덜미를 잡힌 채 훌쩍거리는 토니를 보는 유니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얘가 진짜, 너 자꾸 고집 부릴래?」
“그만하련, 유니. 가만히 방 안에 누워만 있는 것도 좀이 쑤셔서 힘들단다. 모처럼 셋이서 나들이를 가보는 것도 좋겠지.”
「나…… 들이?」
「웅, 웅! 나들이 완전 재밌겠다요!」
4속 정령을 모두 다루던 이그레트 시절에는 그의 주변에 늘 정령이 바글바글했다.
직접 계약을 맺은 정령왕은 물론이고 일반 자연계 정령들조차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토니가 끼어 있는 건 거슬리긴 했어도, 유니의 기억상 지금처럼 오붓하게 그와 나들이를 갈 수 있는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매력적인 제안에 유니의 ‘안 돼’가 허물어지고 말았다.
신이 난 두 정령을 양 어깨에 각각 얹고서 쥬다스는 밖으로 나섰다.
무역 활동이 집중되어 있는 산트리안에는 예전에도 한 번 와본 적이 있었다.
당시 이그레트가 여기서 구하고자 한 것은 물건보다는 정보였다. 정보상은 보통 훤히 드러난 거리보다는 골목 안쪽 작은 펍에 주로 위치해 있었다.
아직 그때 그 펍이 운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번 방문은 딱히 목적을 가진 게 아니었기에 상관은 없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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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