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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진명식
‘설마, 이 내가 잘못 판단했다고?’
순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의 그라면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 또한 엄습해 왔다. 그가 제대로 마음먹고 숨기고자 했다면, 크리스티나의 시선에서쯤은 도망갈 수 있으리라.
크리스티나가 제아무리 또래보다 우수하고 예민한 아이라 할지라도, 이제 겨우 14살 난 소녀였다.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가 옅은 수치감을 담고 파르르 흔들렸다.
“알려주실 수 있다면.”
“…….”
“……당신이 숨기고 있는 진실은 무엇이죠?”
찌르는 듯한 질문에 쥬다스는 난처하게 턱을 매만졌다.
눈치는 채고 있었으나 감이 좋아도 보통 좋은 아이가 아니었다. 아마 이대로 죽 자란다면 귀족 세력을 휘어잡는 제국의 큰 축이 될 법도 했다.
“흠, 물론 숨기고 있는 게 없지는 않단다.”
지금도 그들 눈에 보이지 않는 두 정령이 쥬다스의 양어깨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사실대로 말할 생각이 없었다.
쥬다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의 크기를 알았다. 자연의 4대 속성을 전부 그의 뜻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정령술사란, 재능을 넘어 마치 재앙과도 같았다.
그가 바라기만 한다면 모든 걸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다. 자연 법칙을 깨뜨려 생명을 앗아가고, 이윽고 생지옥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거대한 힘은 늘 화를 부른다.
큰 희생을 대가로 뼈저리게 깨달은 진리였다. 그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쥬다스는 시든 잎사귀처럼 웃었다.
“거창한 것은 아니다만, 뽐낼 필요가 없는 재주라 생각했다.”
그가 살짝 들어 올린 손바닥 위로 산들바람이 모여들었다.
겨우 머리카락 정도나 흩날릴 수 있을 법한 세기의 약한 바람은 작은 원을 그리며 그의 손바닥 위로 뭉치기 시작했다.
사방이 막힌 예배당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에 크리스티나와 에단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이건.”
“설마……?”
후우웅.
쥬다스의 손바닥에 모여들던 바람이 짤막한 파공음과 함께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에 따라 그들의 머리카락도 이리저리 휘날리다 천천히 가라앉았다.
수식 계산도, 시동어도 없었으니 마법은 아니었다. 여전히 주위를 감돌고 있는 바람을 가늠하며 에단이 입을 열었다.
“정령술…… 입니까?”
쥬다스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다. 그의 바람에 따라 쇼에 동참하게 된 유니가 팔짱을 끼며 비웃음을 날렸다.
「이깟 게 무얼 대단하다고. 하여간 이그레트 빼고 인간들은 다 바보야.」
“……허허.”
유니, 유니.
차마 정령의 존재를 볼 수 없는 둘 앞에서 대화할 수는 없었기에 그는 부름을 속으로 삼켰다.
그러자 크리스티나가 살짝 고양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정령술사의 자질은 찾아보기 힘든 것일 텐데……!”
어찌나 놀랐는지 크리스티나는 그녀답지 않게 속으로 할 생각을 내뱉어 버렸다.
실제 정령술사의 비율은 전체 인구에 비해 매우 적었다. 약 천만 명 중 하나.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지만 이론상으로는 그랬다.
정령술사의 자질이란 마법처럼 머리로 익히고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게 결코 아니었다. 그야말로 천부적인 재능이 필요했다.
심지어 정령술사의 재능이 있다고 한다면 학원 루바흐에서 먼저 입학권고할 정도였다.
「에에! 치사하게 유니만 논다요.」
「어머, 이그레트가 지목한 게 나인 걸 어쩌니? 번거로운 땅 속성과 다르게 나는 자유롭거든? 이거 봐.」
아직 쥬다스가 힘의 사용을 거두지 않은 상태였기에 유니가 장난스럽게 바람을 일으켰다.
휘이이잉
“……!”
겨우 산들바람에 해당하는 풍속이었지만 예배당을 가득 메울 정도의 양이 몰아치자 더 이상 가볍게 볼 수만은 없었다.
쉴 새 없이 펄럭이는 교복 치마를 부여잡은 크리스티나가 당황한 눈으로 쥬다스를 쳐다보았다.
“그만.”
담담한 한마디에 뚝 바람이 멎었다. 방금 전까지 바람결에 덜컹거리던 창이 고요해졌다. 거짓말 같은 변화에 에단과 크리스티나는 동시에 허 하는 한숨을 뱉었다.
‘이것이 자연의 힘 중 하나, 바람.’
굉장했다. 술사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자연현상이란 보통의 인간에겐 경외감마저 실어주었다.
에단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째서 숨기고 계셨습니까.”
이 또한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본래의 1황자에겐 정령술사로서의 재능이 없던 게 사실이다.
쥬다스는 그저 자신이 답할 수 있는 진실만 언급하기로 했다.
“힘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란 말을 이해하느냐. 나는 그 책임을 질 자신이 없구나.”
“……회피하는 건가요?”
크리스티나의 탐색적인 질문에도 그는 여유롭게 답해 주었다.
“그럼. 회피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지.”
“피한다고 될 상황이 아니시잖습니까.”
이번엔 에단의 질문이었다. 본래의 황자가 어땠는지 직접 보지 못한 에단으로서는 더욱 답답함이 강했다.
그가 본 쥬다스는 자애롭고, 현명했으며, 또 심성이 올곧으면서도 한편으론 단호한 면까지 있었다. 거기에 뛰어난 재능까지 갖추고 있다니 금상첨화인 셈이다.
이제 허약한 육신만 제대로 관리하여 평범한 또래 수준까지만 끌어 올려준다면, 그 이상으로 군주의 자리에 어울리는 자질은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은 정도까진 아니어도 크리스티나 역시 엇비슷한 생각이었다. 이대로 묻히기엔 아까운 재능과 성품이다.
에단과 크리스티나가 뭐라고 생각하든 쥬다스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높은 자리가 필요 없는 사람이야. 그럴 그릇도 되지 않으이. 지금도 이 사실을 가급적이면 다른 이들이 모르길 바란단다.”
“…….”
두 아이가 침묵했으나 그 표정만큼은 생생히 자신들의 감정을 담아내고 있었다.
눈빛만으로도 ‘어째서’냐 물어오는 이들을 마주보며 쥬다스는 그저 빙긋 웃어주었다.
“그럼 크리스티나야.”
정겨운 부름에 크리스티나가 여전히 혼란스러운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어찌, 그럭저럭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는고?”
“……하아. 예, 정말 여러모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크리스티나가 예배당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녀는 빠르게 생각을 가다듬었다. 황자가 정령술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아직 부족했다.
그는 아직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나약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고, 다른 두 황자에 비해 의지와 카리스마 등 부족한 면이 많았다.
더군다나 실제 그의 진가가 어떻든 간에, 세간에 알려진 ‘백로황자’에 대한 소문만큼은 바닥을 칠 정도로 형편없었다.
자신의 뒤를 지지할 세력 기반 없이는 군주가 될 수 없다.
물론 엉뚱하게도 정작 본인이 군주에 뜻이 없는 게 제일 심각한 문제라면 문제였다.
‘조금 더 지켜봐야…….’
섣불리 판단하기에는 그녀가 쥬다스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
반면 에단은 진심으로 그가 지닌 자질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두 관찰자의 시선이 뚫어져라 자신을 향하자 쥬다스는 모르는 척 턱을 짚었다.
‘어차피 감이 좋은 아이들이니 한번 의심한 이상 늦든 빠르든 결국엔 눈치챘을 일이긴 하나.’
아무래도 입맛이 썼다. 그를 둘러싼 흐름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진 않을 모양이었다.
온전히 그의 인생이었다면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본래 다른 이의 삶이었다.
‘이그레트’로서 쌓아온 지식과 가치관들이 ‘쥬다스’의 몸으로는 써먹기 어려운 부분이 상당했다. 한평생을 살고 죽었어도 인간이란 또 모를 존재였다.
서로 다른 삶이란 이렇게나 큰 차이를 느끼게 했다. 그에게 현자라 불릴 정도의 특별함이 없었더라면 아마 진즉에 내면에서 붕괴가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세 가지 상념이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이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갔다.
“크륵.”
저녁 무렵, 성녀가 데리고 다니던 수호견 헤브가 그들을 찾아왔다.
이마에 뿔이 달린 집채만 한 개의 형상은 다시 봐도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살짝 벌린 주둥이 사이로 촘촘하게 돋은 이빨들이 번뜩였다.
다가와 문을 향해 고갯짓을 하는 폼이 영락없는 따라 나오라는 제스처였기에 세 사람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에단이 지나갈 때엔 얌전히 앉아 있던 헤브가 나머지 두 사람이 나가려 하자 몸을 쭉 펴서 입구를 막아섰다.
“차례를 지키란 뜻인가 보구나.”
“……그런 것 같군요.”
두 사람이 멈춰 서자 헤브는 얌전히 몸을 말고 예배당 문 앞에 누웠다.
쥬다스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아 헤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헤브는 그의 자그마한 손을 피하지 않고 얌전히 받아들였다.
“꼭 뉘와 닮았구나.”
가만 올려다보는 금안에 크리스티나는 싸늘한 눈길로 헤브를 훑었다.
“지금 설마 이 크리스티나 델피아를 저런 개 따위와 비교하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그래, 그 얼이 꼭 닮았다. 쉽사리 관심주지 않고 오만하면서도 살근히 말 붙일 틈을 주는 고 표정이 말이야.”
“……무, 무슨…….”
나긋한 어조로 적나라한 묘사를 하는 쥬다스 때문에 크리스티나는 뭐라 할 말을 잃고 떠듬거렸다.
쥬다스의 표현 방식은 종종 이렇게 지나치게 솔직하곤 했다. 한 번도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누어본 적 없는 크리스티나의 얼굴이 민망함으로 살짝 달아올랐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여기서 이그레트가 보여준 힘은 매우 일부입니다. 무언가 감추고 있음을 눈치챈 사람에게 어줍잖은 거짓은 소용없으니 진실을 보여주되 가려서 보여줬을 뿐.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남겨주신 정성 모두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