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6화 (16/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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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진명식

그녀는 티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헤브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말을 다 알아듣고 있는 헤브 역시도 불쾌한 눈으로 그녀를 슥 올려다보고 있었다.

남쪽 바다를 닮은 청록색 눈동자와 짐승의 고동색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

“…….”

그런 다음 짓는 떨떠름한 표정까지, 부정할 수 없는 동류였다.

잠깐 그렇게 눈씨름을 하다 헤브가 자리에서 스륵 일어났다. 그러더니 크리스티나를 향해 고갯짓했다.

아직 에단이 돌아오지 않았는데 나가라는 걸 보아 진명을 받고 나면 또 다른 장소로 보내는 모양이다.

크리스티나가 예배당을 떠나자, 쥬다스는 헤브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때 묻지 않은 새하얀 털을 살살 쓸어주자 헤브는 기분 좋게 골골 소리를 냈다.

“착한 아이로세.”

오직 성녀만을 따른다는 수호견 헤브니시우스가 꼬리를 흔들며 애교를 다 부렸다.

그 모습을 본 유니가 떨떠름한 얼굴로 딴죽을 걸었다.

「그 녀석도 너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이그레트.」

“너희보다?”

「……아니.」

애초에 정령을 아이 다루듯 하는 그였다. 유니는 딴죽 걸기를 포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근데 헤브니시우스도 여전하다요. 죽 이곳에 있었던 거야요?」

크르릉.

정령들과 헤브는 원래 서로 알던 사이였으므로 친밀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토니가 헤브의 커다란 앞발에 내려앉았지만 슬쩍 쳐다보기만 할 뿐 내치지는 않았다.

신성한 동물인 헤브니시우스와 자연체인 정령들은 타고난 기질이 같았다.

헤브는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그 대상을 좋아했다. 먼지 한 톨 묻히고 다니지 않는 그 새하얀 털처럼, 헤브가 고집하는 순수는 일종의 강박증에 가까웠다.

그래서 정령들에게 사랑받는 유일한 존재는, 이 까다로운 짐승의 마음도 순식간에 매료시켰다.

「한 장소에만 계속 있으면 지루하지 않아?」

그릉.

「아, 하긴. 여기에 위그드라실이 있구나.」

‘이그레트’의 삶에선 성녀나 헤브와는 전혀 접점이 없었던 그는 이들의 관계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무언가 재미있는 얘기를 들은 듯 유니와 토니가 서로를 마주보며 키득댔다. 그리곤 쥬다스에게 포로록 날아와 그의 머리카락을 소중히 끌어안았다.

「응, 있어. 우리에게도.」

「이그레트라면 계속 함께 있어도 괜찮다요.」

헤브에게 성녀 위그드라실이 소중한 존재이듯, 정령들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음을 피력하는 모양이었다.

대충 짐작으로 대화의 맥락을 이해한 쥬다스가 두 정령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 귀를 쫑긋한 헤브가 슥 일어섰다. 황소만 한 몸집이 일어서자 쥬다스의 머리 위로 길게 그림자가 졌다.

헤브는 코를 한 번 푸릉거린 후 먼저 주둥이로 문을 밀고 나갔다.

밖으로 따라 나가자마자 예배당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성녀 위그드라실과 마주쳤다.

눈이 보이지 않는 대신 소리와 기척에 민감한 그녀는 쥬다스를 향해 작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당신의 기척을 읽을 수 없으니, 잡고 따라와 주세요.”

그 말에 쥬다스는 망설이지 않고 위그드라실의 차가운 손바닥 위에 작은 손을 얹었다.

“고마워요. 느껴지지 않으면…… 불안하거든요.”

“허어, 불안을 느낄 정도라. 하면 지금 그 ‘느껴지지 않음’은 익숙한 일이 아닌가 봅니다.”

“네, 정말로 특별한 일이죠.”

성녀는 특별함을 강조했다. 하지만 정작 쥬다스로서는 딱히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일부러 기척을 죽이려들지도 않았고 그럴 이유도 없다. 다만 짐작 가는 이유는 몇 가지 있었다.

우선 정령왕들이 뿜어내는 기운이 너무 강해서 자신의 존재감마저 파묻혔을 수가 있다.

또는 본래 육신의 주인이 아닌 자가 그 몸을 사용하게 되어 일어나는 부작용 같은 것도 일리가 있었다.

짐작한 부분을 굳이 꺼내어 놓지 않고 그 이유를 묻자 성녀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내가 느끼지 못하는 건 상대가 보통 사람과 달리 아주 특별할 때뿐이지요.”

“…….”

“분명한 건.”

그녀는 활짝 웃으며 맞잡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헤브가 좋아하는 걸 보니, 당신은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일 거예요.”

해맑은 칭찬에 쥬다스는 그저 작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 걷지 않아 넓게 탁 트인 대강당에 도달했다. 하나의 돔처럼 펼쳐진 공간에 사제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그 제일 깊숙한 안쪽에 홀로 붉은색 의복을 갖춘 교황이 보였다.

“자아, 다 왔어요. 성하께서 직접 진명을 내려주실 겁니다.”

쥬다스의 방문을 알아차린 교황이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올해 66세로 알려진 교황은 나이에 비해 정정하여 겉보기엔 아직도 중년으로 보였다.

교황이 팔을 들어 올리자 붉은 옷자락이 한 차례 펄럭였다.

그 손끝은 정확히 쥬다스를 향해 있었다. 모여 있던 모든 사제의 눈도 따라서 그를 향했다.

“이리로 오라.”

크게 소리친 것도 아닌데 귓가에 선명히 와 닿는 음색이었다. 쩌렁쩌렁하진 않아도 강한 힘이 담긴 목소리였다.

쥬다스는 교황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신성이 황권보단 약하다 하지만 루바르잔 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성당 위에 집권하는 자였다.

그러니 엄중하기로 따지면 황제를 만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자리였다.

쥬다스가 그 앞에 서자, 교황은 물이 담긴 대접을 들어 한 손을 그 안에 담갔다. 그리고 물이 묻은 손으로 쥬다스의 양어깨와 머리를 차례로 눌러 축복했다.

“보라, 형제여. 너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함께할 진명을 내리노니.”

교황은 들고 있던 대접을 내려 쥬다스가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대접 안에는 맑은 물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여기에 오른손을 담가 새 이름을 확인할지라.”

찰랑.

차가운 물이 팔목까지 닿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대접 안의 물이 천천히 빛나기 시작했다.

하얗게 빛나던 물은 이내 먹물처럼 새까맣게 훅 물들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라 눈을 깜빡이자, 마치 빛으로 글씨를 쓰듯 한 글자씩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물 위의 글자를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쥬다스와 교황뿐이었다. 결과를 확인한 교황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E…….’

첫 글자를 본 순간 쥬다스는 직감했다. 이건 본래 황자를 위한 이름이 아니다.

이 이름은 그의 것이었다.

[Egret.]

결국 여기 내려진 진명이란 온전히, 처음부터 그를 가리키는 단어였다.

진명은 신이 내린, 오로지 자신만의 새 이름이었다. 스스로 원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그 이름을 강제로 알 권한이 없었다.

진명을 받은 자가 밝혀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그중 맨 앞 글자뿐이었다.

그래서 교황의 인장이 찍힌 확인서에는 E라는 글자가 큼직하니 적혀 있었다.

쥬다스는 확인서를 받아 든 채 자리에 못 박힌 듯 섰다.

진명식이 끝난 대강당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교황은 자리를 떠난 지 오래고, 뒷정리를 하던 사제들도 모두 할 일을 마치고 나갔다. 촛불이 타오르는 강당 안에서 쥬다스는 홀로 자리했다.

「이그레트.」

“……그래, 그것이 내 이름이지. 이 아해의 이름이 아니라.”

「기뻐? 아님, 슬픈 거야? 지금 네 감정이 어느 쪽인지 모르겠어.」

유니가 걱정스레 그의 뺨을 쓸었다. 정령의 말대로 쥬다스 역시 자신의 감정을 한 가지로 정의 내리기 어려웠다.

우선 기쁜 것도 있었다. ‘이그레트’는 분명 죽었다. 92년의 수명을 채우고 정령들에게 둘러싸여 편안하게 눈을 감았었다.

그리고 영문 모를 일이나, 제국의 1황자 몸에서 다시 깨어났다.

그러니 그는 스스로를 다시 ‘이그레트’라 부를 일이 없다 여겼다. 한 번 그 이름으로 맹약한 정령들이야 결코 약속을 잊지 않고 지켰지만, 이미 그 자신은 이그레트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1황자 본인도 역시 아니었다. 쥬다스의 육신을 사용하면서 이미 죽어버린 이그레트의 자아를 유지하기란 상당히 아슬아슬한 일이었다.

죽었는데 죽지 않은 인간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그에게 다시금 ‘이그레트’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잃어버린 소중한 이름을 되찾았으니 당연히 기쁘고 충족감이 들었다.

“내가 자리를 잡을수록, 어쩐지 점점 이 아이는 돌아올 곳이 없어지는 기분이 드는구나.”

「어차피 너만을 위한 이름을 받고 싶었던 거잖아.」

“그렇긴 하다만.”

그러나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쥬다스는 제 이율배반적인 사고와 감정을 인식하고 쓰게 웃었다.

이대로 계속 감상에 빠져 있을 순 없었다. 그는 길게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몸을 돌렸다.

강당 입구에는 줄곧 그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성녀 위그드라실과 헤브가 나란히 서 있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머무실 방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미안합니다. 원 실없이 생각이 길어진지라.”

“아뇨. 더 계셔도 괜찮았어요. 나도 종종 그러는 걸요.”

위그드라실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웃음에 배어 있는 감정의 조각을 눈치챈 쥬다스가 넌지시 말했다.

“……성녀님도 고민이 있을 때가 있나 보구려.”

“그럼요. 가끔은 궁금할 때가 있어요. 바깥세상은 과연 어떤 곳일까, 나는 왜 남들과 다른 존재일까 하는 그런 것들이요.”

소리를 들어 쥬다스가 가까이 온 것을 확인한 성녀는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주말에 연참 기대하셨던 독자님, 죄송합니다.ㅠㅠ 이번주는 여러모로 상황이 안되어서... 일일참(?)으로 너그러이 봐주세요 ㅎ

주시는 의견들 감사히 받고, 또 참고하고 있습니다. 함께 달려주시는 독자님들이 보실 때 이상하다면 그 시선을 참고하는 것도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지적해주신 어색한 부분이나 표현 등은 원본에서 먼저 수정후, 이후 연재란 수정을 거칠 예정입니다.

늘 응원해주시는 독자님들이 계셔서 즐겁게 쓰고 있습니다. ㅎㅎ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모두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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