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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레트-21화 (2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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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진명식

씹어뱉듯 중얼거린 목소리에 쥬다스가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제게 달려드는 소돔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그 믿음대로 쥬다스의 주변을 바람이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콰직!

술사의 의지에 따라 정령들이 순식간에 견고한 방패막이를 형성했다. 손가락 하나 차이로 소돔의 칼끝이 쥬다스에게 닿지 못하고 강제로 멈추어졌다.

“기분 나쁘게 같은 말이나 지껄이고 말이야…. 생각이 바뀌었다. ‘고모라’.”

프리드의 부름에 이번엔 그림자 속에 웅크리고 있던 무언가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빠르게 형체를 갖추어간 소환수는 이내 거대한 늑대를 연상시키는 몸을 구성해냈다.

그림자로 이루어져있었지만 놈이 발을 구르자 발톱에 긁힌 자국이 바닥에 선명하게 남았다.

“그르르릉.”

사령술은 정령술과 매우 닮아있는 술법이었다. 정령술이 자연의 4대원소를 부리는 이능이라면, 사령술은 죽음과 혼돈을 권속으로 삼는다.

단, 정령술과 달리 사령술에는 제물이 필요했다. 죽음을 거스르기 위해선 그 무게의 수십 배에 해당하는 피를 흘려야지만 사령이 움직였다. 그러니 제물이 없다면 술법을 부릴 수 없다. 모든 나라에서 금기로 지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사령술사는 힘을 얻는 대신 산 생명을 앗아간다. 그들이 행하는 무분별한 살육은 마치 악마의 현신이나 다름없었다.

“재능은 아깝지만 여기서 죽어줘야겠구나, 황자전하.”

프리드는 놀이에 질린 아이처럼 손을 털었다. 그의 의지에 따라 고모라가 입을 쩍 벌리고 쥬다스를 향해 비호같이 달려들었다.

「웃기시네. 죽긴 누가 죽어?」

유니가 입을 삐죽이며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지금까지의 산들바람과는 차원이 다른 돌풍이 쥬다스를 중심으로 훙 퍼져나갔다.

그 바람에 검을 들이대고 있던 소돔은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이그레트, 나 저 인간 싫다요!」

「난들 좋다니? 제대로 막기나 해.」

토니 역시 기분이 상해 툴툴거렸다.

바닥에서 솟구쳐 오른 식물의 줄기들이 달려들던 고모라를 휘감았다. 그림자라 한들, 일반 물질이 아닌 정령의 힘이 담긴 속박에는 속수무책으로 붙들렸다. 꽁꽁 몸을 옭아맨 식물줄기에 잔뜩 화가 난 고모라가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

“키아악!”

드드드득

어찌나 힘이 센지 그 몸부림을 이기지 못하고 땅에 균열이 갔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프리드의 눈이 살짝 커졌다.

“……2속성? 게다가 사령을 제압할 힘이라고?”

쥬다스를 조금 특이한 장난감처럼 바라보던 시선이 완전히 뒤틀렸다. 황자는 고작 12살 난 소년이었다. 그마저도 또래에 비해 작고 병약하여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몸뚱아리였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윈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지금 무려 정령을 2속성이나 다루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부리는 사령을 단숨에 제압할 만큼 강력한!

이 사실만으로도 프리드는 그를 보석으로 평가했다.

소돔과 고모라는 제물을 먹은 지가 상당히 오래된 굶주린 상태였다. 지금은 본래 발휘할 수 있는 힘의 고작 5분의 1도 되지 않는다. 그 점을 감안한다손 치더라도 저 꼬마황자의 재능은 탐날만한 수준의 것이었다.

자신이 부리는 사령이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으나, 프리드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크게 광소했다.

“크, 핫하하! 대단하구나! 아이야, 내 너를 평범하지 않다곤 생각했으나. 이건 정말 상상 이상인데?”

닮은 것은 말뿐이 아닌 모양이지, 작게 중얼거린 프리드의 적안이 뱀처럼 휘었다.

그 순간, 때마침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순백의 짐승이 고모라의 목을 콰득 물고 흔들었다.

그르르륵

구멍 뚫린 목에서 피 대신 까맣게 죽은 흙이 쏟아져 내렸다. 고모라는 한번 크게 몸을 꿈틀거리더니 그대로 산산이 부서져 사라졌다.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큰 손상으로 인한 강제 역소환이었다.

고모라를 해치운 헤브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쥬다스의 앞을 막아섰다.

“…성전 안에서 폭력행위는 금지되어있습니다. 악마의 힘을 이용하는 사령술 역시 금기. 포탈을 훼손한 죄 역시 물어야할 것.”

화악

순식간에 사방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성녀 위그드라실을 중심으로 사방에 사제들이 포진해있었다. 신성력이 담긴 구체가 반딧불이처럼 둥실둥실 허공을 떠다니며 빛을 내었다.

성녀가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성 위그드라실의 이름으로 명합니다. 회개하고 투항하세요.”

“큭큭, 조용히 떠나긴 글렀나.”

전혀 투항의사가 없는 대답을 들은 위그드라실이 살며시 두 손을 모았다. 그녀의 손끝에 순백의 신성이 일렁였다. 반면 프리드는 자리에 선 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열세에 놓인 상황치곤 묘하게 여유로웠다.

“미련하긴. 회개 같은 걸 백날 해봐야 무슨 소용이지? 어차피 이 세상에 구원 따윈 없거늘.”

“감히 신성을 모독하다니!”

사제들이 분개하여 달려들려던 찰나였다.

쿠궁

소돔을 소환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기세로 땅이 울렸다. 제대로 서있기도 힘들 정도의 진동에 대다수의 사제들이 휘청거렸다.

정령들의 도움으로 멀쩡히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쥬다스가 땅을 가르고 올라온 형체를 확인하고 탄식했다.

“…프리드. 어찌 이렇게까지.”

꼭 신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모습이었다. 찢어진 가죽 사이로 훤히 뼈가 들여다보였다. 음산하게 드리워진 두 날개와 긴 꼬리, 군데군데 찢어지긴 했으나 파충류를 닮은 비늘이 번들거렸다. 마치 지옥에서 뚫고 올라온 듯했다.

‘드래곤’의 형상을 충실히 재현해낸 소환수는 프리드를 태운 채 날개를 퍼덕였다. 날개에서 일어나는 바람만으로도 일반 사제들은 저항이 어려웠다.

상급의 네크로맨서가 부리는 본 드래곤(bone-dragon). 저 괴물에 비하면 먼저 소환했던 소돔과 고모라는 장난 수준이었다. 몸체가 충분히 허공에 떠오르자 본 드래곤은 지상을 향해 입을 쩍 벌렸다.

고오오오

본 드래곤의 주둥이를 기준으로 새카만 기류가 응집되기 시작했다. 하나의 구 형태로 모인 기류를 확인한 사제들이 비명처럼 고함을 내질렀다.

“―브레스다!”

미처 피할 시간도 없었다. 순식간에 구체를 완성시킨 본 드래곤이 곧장 브레스를 내뿜었다. 응집된 사령 에너지가 굉음과 함께 지상으로 쏟아져 내렸다. 성녀가 다급히 신성을 사용했으나 워낙 급박하게 이루어진 일이었기에 준비가 모자랐다.

‘안 돼. 이대로라면 형제님들을 전부 지킬 수 없어……!’

성녀의 몸 안엔 무한에 가까운 신성이 잠들어있었기에 공격을 받더라도 그녀 자신만큼은 안전했다. 그러나 그 신성을 밖으로 끄집어낼 시간이 조금 모자랐다.

상대가 실력자임은 인지하고 있었으나, 설마하니 신성의 상징인 교황청에서 금기시된 사령술사가 나타날 줄이야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방심의 결과는 참상으로 이어질 뿐이다.

과오를 깨달은 위그드라실이 입술을 꾹 깨물던 순간이었다.

후웅

무언가 그녀의 검은 머리칼을 사라락 스치고 지나갔다. 눈은 보이지 않지만 찰나의 순간 강대한 존재감이 또렷이 느껴졌다.

「정말~ 이그레트는 너무 정이 많다니까.」

술사의 바람에 따라 정령왕인 유니가 직접 브레스를 막아서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을 벌기 위해 막을 뿐 상쇄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쥬다스가 원한 유니의 역할은 딱 시간벌이까지 만이었다. 그 사실을 알아챈 성녀가 최대한 빠르게 신성력을 끌어올려 대응했다.

유니의 존재감을 알아차린 건 성녀뿐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브레스를 막아선 상식 밖의 힘을 감지해낸 프리드가 흥미롭게 쥬다스를 슥 쳐다보았다.

“역시 이건……. 조만간 또 보지. 꼬마황자.”

콰아앙!

성녀의 신성력과 사령의 힘이 허공에서 맞부딪히며 큰 폭발이 일어났다. 그 여파로 교황청을 뒤덮고 있던 결계에 균열이 생겼다. 프리드는 그 균열 사이로 유유히 빠져나가 사라져버렸다.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는 쥬다스의 곁으로 에단과 크리스티나가 달려왔다.

“쥬다스님! 괜찮으십니까?”

쥬다스는 응답하지 않았다. 어딘가 멍한 시선으로 하염없이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그를 크리스티나가 재차 불렀다.

“쥬다스님……?”

“…….”

부름을 들은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사령술사를 정면에서 마주한 것치고는 지나치게 멀쩡한 상태였다.

상처는커녕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채, 그들을 돌아본 쥬다스가 평소처럼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많이 놀랐겠구나. 다치진 않았느냐.”

“아뇨.”

분명 평소와 같은데, 어쩐지 더 말을 걸기가 어려웠다. 머뭇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쥬다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주변을 감싼 바람이 유난히 차가웠다. 내내 꾹 쥐고 있느라 피가 통하지 않아 창백해진 주먹을 펴냈다.

‘이그레트님.’

‘어째서 막으시는 겁니까……! 당신은 분하지도 않습니까?!’

‘제기랄! 당신이 가진 그 힘이라면 못할 것도 없잖습니까!!’

과거, 젊은 시절의 프리드가 제게 따졌었다.

그는 탐욕이 큰 사내였다. 크게 바라는 것 없이 떠돌며 사는 이그레트와 달리 프리드는 끊임없이 열정과 패기를 불태웠다. 그리고 그 열정은 간혹 위험한 방향으로 불똥을 튀기기도 했다.

평화를 사랑하는 이그레트와는 정 반대되는 성미였다. 프리드는 점차 권력과 명예에 대해 지독한 정복욕을 내보였고 이그레트는 단호하게 이를 저지했다.누구보다 이그레트를 따랐던 만큼 한번 어긋난 관점은 삽시간에 그 차이를 벌렸다.

종래에 등을 돌리면서 프리드는 분노가 들끓는 붉은 눈동자를 들어 그를 저주했다.

‘하! 이해할 수가 없군. 당신이 싫다면 내가 하겠습니다. 이그레트님, 당신은 겁쟁이일 뿐이야.’

―그러니 평생 그렇게 살아.

마치 귓가에 고스란히 들려오는 듯한 옛 기억의 편린을 떠올리며 쥬다스는 다시 감았던 눈을 떴다. 과거와 다른 두 얼굴이 그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이 말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태도에서 충분히 배려심이 느껴졌다.

때로는 호들갑떠는 것보다 이렇게 조용히 기다리는 게 더 도움이 되기도 했다.

“성녀님의 신성에 경애를.”

그 사이 사제들이 성녀를 중앙에 두고 무릎을 꿇었다.

사제들은 성녀의 신성력이 그들을 지켰다고만 생각했다. 중간에 개입한 정령의 힘은 오직 성녀 본인만 알아차렸다. 성녀는 프리드가 사라진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달빛 한 조각조차 볼 수 없는 칠흑 같은 밤하늘이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예기치 않게 하루를 더 소요했습니다. ㅠㅠ 늦어서 죄송합니다! (꾸벅)

사족으로 이그레트(쥬다스)는 현재 최대한 자신의 힘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합니다. 과거 프리드처럼 자신의 힘을 노려 문제가 커진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물론 그를 제대로 공격하지 않은 건 '사령술사'라는 점에 놀란 것+옛 정 때문이 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등 보내주신 응원 전부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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