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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통과의례
“…거기까진 나도 여직 모르겠구나.”
에단은 고개를 내저으며 굴러간 봉을 주우러 가는 쥬다스의 뒷모습에 물끄러미 시선을 주었다. 다른 건 몰라도 건강에 심각한 이상이 있다면 아무리 자질이 좋아도 높은 위치에 설 수 없다.
지금 쥬다스가 해결해야할 급선무는 시험이나 평판 따위가 아니었다. 에단은 그리 여겼다.
***
2주란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시험을 앞두고 있다는 조급함 때문인지 루바흐 학생들은 하나같이 이번 2주를 폭포로 향해가는 유수처럼 빠르게 체감했다.
과목을 많이 신청하면 그만큼 졸업할 때 이수증명이 다수 따라붙게 되어 유능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성적이 좋다면 조기졸업을 신청할 수도 있으며 거액의 장학금까지 걸려있어 학기 초엔 수강과목을 무리하게 늘리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 중간고사 시기가 지나가면 기력을 다한 파리떼처럼 우수수 나가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매 학기마다 반복하는 루바흐 학원에선 이번에도 어김없이 상당수의 학생들이 초췌해진 몰골로 시험대비에 찌들어있었다.
루바흐의 시험은 글로 쓰는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예과나 예술과는 실기시험을 통해 성적을 평가했고 약학의 경우 창의적인 포션을 개발하여 제출하라는 식의 과제를 내어주기도 했다.
그 중 쥬다스가 신청한 과목은 주로 문과영역이었고 예외로 무예과 봉술이 하나 포함되어있었다.
시험을 치를 무렵에는 바이칼도 교황청에서 풀려나 무사히 학교로 복귀했다.
남들보다 수업도 많이 빠지고 공부할 시간도 적었던 만큼 바이칼은 훨씬 지쳐있었다. 퀭한 눈으로 시험지를 받아든 그는 여전히 인자한 얼굴로 손을 흔들어주는 쥬다스를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뭐가 저렇게 여유로운 거야? 경제학은 절대 만만한 과목이 아니라고.’
바이칼은 찌푸린 얼굴을 펴고 시험지에 집중했다. 남 얘기할 처지가 아니었다. 당장 발등에 불 떨어진 사람처럼 급하게 암기해온 교과내용을 떠올리고자 애썼다.
하지만 그 자신이 말한대로, 경제학은 만만한 과목이 아니었다.
<제국력 841년, 역사적인 가뭄이 든 해였다. 우기가 적어 작물이 자라지 못했으며 동시에 ‘COS’라 불리는 전염병마저 돌아 전국민이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결국 이 시기에 시장구조가 한차례 크게 붕괴되었다.
…(중략)….
※시장순환에 영향을 미친 원인을 상세히 적고, 이에 따라 효율적으로 민생을 구휼할 방법이 있다면 이를 풀어 쓰시오.(단, 교과과정에 들어있는 이론을 2개 이상 포함할 것.)>
경제학교사는 배운 이론만을 문제로 출제하지 않았다. 아예 예시를 주고 이론을 응용하여 풀어내길 요구하는 지시문에 학생들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졌다. 아예 펜을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시험을 치르는 교실 안은 사각사각 글씨 쓰는 소리로 가득했다. 그 일정한 소음 사이로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드륵
가장 먼저 일어선 건 쥬다스였다.
시험이 시작된 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긴 했으나 벌써 답지를 제출할 만한 때는 아니었다. 그 바람에 몇몇 학생들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시험에 집중했다.
바이칼 역시 그 중 한명이었다.
‘무슨! 백지라도 낼 셈인가?’
아니 실은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이칼은 여유롭게 교실을 나서는 은색 뒤통수에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이를 부득 물며 시험지를 응시했다.
‘…조금 달라졌다 생각했더니. 쳇, 역시 그 백로황자로군.’
그의 녹색 두 눈에 다시금 혐오감이 어렸다.
물론 쥬다스는 그의 오해와는 다르게 지나칠 정도로 착실히 답지를 작성하고 시험장을 빠져나온 상태였다. 어깨에 걸터앉아 발을 까딱이던 유니가 헤~ 하고 신기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그레트, 대충 평범한 점수를 받을 생각 아니었어?」
“으음…. 그랬었지.”
「아까 그건 정령인 내가 봐도 절대 평범하지 않았는걸. 저대로라면 되게 주목받을 텐데? 이그레트는 그런 거 싫어하잖아.」
유니의 말대로였다. 처음 시험장에 발을 들일 때만 해도 쥬다스는 제대로 시험을 치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눈에 띄지 않도록 이상하지 않을 만큼만 성적을 받을 정도로 답안을 작성하고 나오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시험지를 받아둔 순간 다른 생각이 들었다.
“도망치고 싶지 않더구나.”
쥬다스는 빙그레 웃으며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그에 따라 긴 은발이 휘휘 허공에서 나풀거렸다.
“이 아이, 한 번도 제 목소리를 내본 적 없이 살았다 하였지.”
「으응. 워낙 유약해서 제대로 하지도 못했겠지만 뭘 해도 무시 받았다고 해.」
“그래, 유니.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이곳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려했던 아이라 생각이 들었다.”
이그레트와는 달랐다. 누구에게나 환영받고 누구보다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었지만 인간으로서의 삶에서 도망가 버렸던 자신과는 다른 아이였다. 그가 죽어가면서 가장 후회했던 면도 여기에 있었다.
본래의 황자가 언제 되돌아올지는 몰라도, 사는 동안만큼은 그 결심이 부끄럽지 않게끔 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이그레트답지 않게’ 처음으로 무리수를 두었다.
쥬다스는 그 뒤로도 모범적인 답안을 작성함으로써 대부분 과목의 시험을 끝마쳤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실기로 평가하는 봉술수업이었다.
“자, 학우님들 들어. 채점기준은 그동안 가르친 기초자세와 피격법, 방어법을 함께 볼 거야. 방식은 늘 그랬던 것처럼 페어와 대련으로 진행한다. 다들 배운 대로만 열심히 해주도록!”
교사 메이란이 허리에 한 손을 얹고 씨익 웃었다. 다른 엄한 교사와 다르게 털털하게 시험공고를 끝마친 그녀는 두 사람씩 나와 실기를 치르도록 진행시켰다.
넓은 체육관에 학생들이 둥글게 원을 그려 둘러앉았다. 그리고 교사가 호명한 두 학생이 가운데로 나와 대련을 펼치는 형식이었다.
그동안 학생들은 꽤 봉술에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실전이 아니라 배운 자세를 활용하는 대련이었기에 대부분 차분한 태도로 시험에 임했다.
슬슬 자신들의 차례가 가까워지자 쥬다스와 에단은 봉을 챙겨들고 자리에서 미리 일어섰다. 교사의 지시에 따라 중앙에선 이제 막 앞 순서 대련이 시작되고 있었다.
“…다음 차례군요.”
“그렇구나. 잘 부탁한단다, 에단.”
“저야말로……?”
에단은 고개를 꾸벅하다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쥬다스를 살폈다. 평소에도 건강해보이지는 않았지만 오늘따라 안색이 영 좋지 않았다.
그간 열심히 붙어 다닌 덕에 알아볼 수 있게 된 미세한 차이였다.
“괜찮으십니까?”
“허허, 가벼운 고뿔이야. 신경 쓸 것 없으이.”
본인은 가볍다했지만 핏기가 창백하게 가신 것이 썩 미덥지 못했다.
‘이상하군. 타고나길 유약하게 나신지라 자주 아프다하더니, 고통에 둔감해졌나.’
에단의 짐작과는 조금 방향이 달랐지만, 괜찮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노인이었던 시절엔 이보다 더 격하게 몸이 아팠던 적이 잦았다. 죽는 순간은 비교적 편안하게 갔지만, 눈을 감기까지 그는 오랜 시간을 홀로 앓아왔었다.
그에게 있어 손이 떨리거나 열에 들뜬 상태 정도야 가볍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자, 다음.”
차례는 금방 돌아왔다. 호명에 따라 둘은 나란히 봉을 들고 마주했다. 기초자세는 둘 다 흠잡을 것 없이 완벽했다.
시작을 알림과 함께 에단이 먼저 가볍게 획을 그었다.
퉁!
묵직한 효과음이 관내를 울렸다. 힘에서 밀리는 것이 확실한 쥬다스가 효과적으로 방어에 성공하자 메이란의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지어졌다.
‘호오, 생각보다 1황자전하는 영리한 타입인 모양이군.’
그리고 꽤나 노력파였다. 쓸모없다 여겨지던 황자에게서 일말의 가능성을 발견해낸 메이란은 흡족하게 기록지를 적어나갔다.
몇 번 합을 주고받지 않았지만 쥬다스는 지친 숨을 고르느라 바빴다. 그는 지금 연습 때 했던 것보다 수배는 집중하고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이미 놓쳤어야할 봉도 아슬아슬하게나마 손에 쥐고 놓지 않았다.
그의 지친 기색을 느낀 에단이 기운을 북돋아주기 위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
쥬다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그레트’로 살 시절에도 그는 육체파가 아니었다. 취미삼아 무예기술을 익히곤 했다지만 실질적으로 써먹지는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그레트는 4속성의 정령을 전부 수족처럼 부리는 정령술사였다. 그가 직접 움직이지 않아도 바라기만 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는 새삼 자신이 자만했음을 깨달았다.
쥬다스의 금안에 씁쓸함이 깃드는 순간 에단이 봉을 휘둘렀다. 서둘러 막는다고 막았지만 열이 오른 몸은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 탓에 오른쪽 어깨죽지를 내어주고 봉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털썩
“…?!”
연습용 봉이었던 데다, 에단이 크게 힘을 싣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다치지는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약해질 대로 약해진 쥬다스의 몸은 작은 충격에도 쉽게 허물어졌다.
에단이 놀라 다가가자 쥬다스는 어깨를 붙든 채 비틀비틀 일어섰다.
“쥬다스님.”
“괜찮단다. 이거 참, 미안하구나. 네 상대를 하려면 앞으로 좀 더 단련해야겠어.”
“……그보다 손이.”
에단의 안타까운 음색에 쥬다스는 어깨를 짚고 있던 손바닥을 펴보았다.
언제 그렇게 된 것인지 온통 시뻘건 핏기가 가득했다. 까진 게 아니라 아예 터졌다고 표현해도 손색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 탓인지 어깨에도 핏물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어쩐지 자꾸 데드플래그(?) 꽂는 것 같아서 난감해지지만...;
<이그레트>는 해피엔딩 지향입니다.ㅎ 적어도 제 기준에서는요.
현재 주인공에게 부족한 면이 제법 많은 만큼 착실히 성장할 예정입니다.
이제 몸도 마음도 전부 성장해야겠죠. ㅎㅎ
아, 그리고 이 글은 설정상 아직 초입부입니다.
긴 호흡으로 갈 예정이니 느긋하게 따라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등 보여주신 사랑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