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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통과의례
어쨌든 시험은 잘 마무리되었으니 쥬다스는 페어인 에단과 함께 양호실로 보내졌다. 짓무른 손 뿐 아니라 가격당한 어깨도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는 동안 치료사는 내내 혀를 찼다.
“쯧. 이런 식으로 무리하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쥬다스님. 이거 여전히 몸의 기능이 정지해있다시피 한데 여기다 상처까지 늘리시다니요. 차라리 무예과 수업을 철회하십시오.”
“…….”
쥬다스는 그저 묵묵히 치료사의 말을 경청했다. 표정은 온화했으나 그 금안에 깃든 고집에 치료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치료사이기 이전에 루바르잔 제국민으로서 충언드리는 겁니다. 이대로라면 생명에도 위협이 올 수가…….”
“그건 무슨 뜻입니까.”
“아이고, 이것 보세요. 따로 뜻이 뭐가 있겠습니까? 말 그대롭지요.”
거기까지 말한 치료사는 날선 에단의 표정을 보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리이나.”
“네, 네! 선생님.”
“네가 마무리를 해드리렴. 난 처방전을 내드려야겠으니.”
“네에.”
치료사가 비켜주자 리이나가 쥬다스의 손을 붙잡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일전에 봤던 것과 같은 분홍색 기류가 그녀의 손을 타고 쥬다스에게로 흘러들어왔다.
“지금 쥬다스님의 상태는 아시다시피 정상이 아닙니다. 이해하기 쉽게 저 화분을 예로 들어볼까요.”
치료사는 볼펜을 들어 양호실 창가에 놓인 작은 화분을 가리켰다. 작은 꽃나무를 심어둔 화분은 손질을 잘 받았는지 생기가 가득했다. 이파리는 무성했지만 아직 꽃은 피지 않은 나무를 보며 치료사가 설명을 시작했다.
“저게 보통 사람들의 상태라고 칩시다. 물을 주면 싹이 나고 잎이 자라 꽃열매를 맺는 게 저 화분의 순리입니다. 하지만 쥬다스님은 지금 사계절 내내 싹만 틔우고 있는 셈입니다. 몸이 순리를 거스르고 있죠. 그러니 자주 아프실 수밖에요. 이걸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지금보다 큰 상처라도 입으시는 날에는…….”
쥬다스의 맑은 금안을 바라보며 치료사가 약을 가득 담은 봉투를 내밀었다.
“최악의 경우, 유지되고 있던 생명활동까지 정지되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치료사가 잔뜩 겁을 주어 내보낸 이후로 에단의 표정은 굳어 풀릴 줄을 몰랐다. 정작 당사자는 태연스레 붕대를 감은 손으로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걱정해주어서 고맙다. 에단.”
“……당신은, 스스로가 걱정되지 않으시는 겁니까.”
에단은 심적으로 매우 복잡한 상태였다.
그는 1황자를 군주에 어울리는 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유한 성격이 조금 걸리긴 했으나 아직 나이도 어렸고 본래 성정을 숨기고 있느라 그런 거라면 좀 더 지켜보면 될 일이라 여겼다.
그래서 최근 쥬다스의 일과에 맞추어 가급적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과연 생각대로 황자는 충분히 총명했으며 일부러 힘을 감추고 지내는 상태였다. 에단은 아마 자신이 보지 못한 부분이 더 있을 거라 판단했다.
지금껏 보아온 쥬다스의 성격 상, 지난 번 드러냈던 ‘바람의 정령술사 자질’은 그저 맛보기용 수준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에단은 어쩌면, 황자가 정령을 다루는 힘이 이미 수준급이거나, 듀얼 속성을 다루는 굉장한 자질이 숨어있을 지도 모른다고까지 생각했다. 만일 그렇다면 그건 정말 기대되는 힘이었다.
더구나 그런 힘을 가지고서도 늘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 연령대 소년들은 과시욕이 강하다. 하다못해 남들보다 뒤쳐져 무시 받는다는 일 자체를 극도로 꺼려했다. 하지만 쥬다스는 늘 일관된 태도를 취했다. 자기를 무시하는 자들을 원망하거나 우습게 여기지 않고, 그저 허허롭게 용인했다.
에단은 그 태도를 정말 모자라서가 아니라 또래보다 월등히 타고난 자애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겼다.
거기다 12살에게서 보기 힘든 현명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지난 번 크리스티나의 브로치 절도사건을 비롯해 차분하게 프리드를 쫓거나, 일부러 힘을 감추고 있다든지 하는 점만 봐도 보통 영민한 것이 아니었다.
이 모든 걸 통틀었을 때 신체적 능력치가 또래보다 확연히 떨어진다는 약점만 제외하고는 군주로서 모든 게 완벽했다.
그랬는데, 하필이면 그 약점이란 게 생명이 위험할 정도였을 줄이야. 이 정도면 세간에서 떠드는 것처럼 도저히 제왕으로 세울 수 없는 인물인 셈이었다.
어쩐지 잠시나마 기대를 걸었던 스스로가 멍청하게 느껴지면서 분하기도 하고, 또 정작 태연해 보이는 쥬다스가 답답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여전히 이 백로황자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지 못하는 자신이 더욱 답답했다.
에단이 복잡한 심경을 감추지 않고 드물게 표정으로 드러내자, 쥬다스도 그 일렁이는 검은 눈동자에 똑바로 시선을 맞추었다.
“이런, 이런. 내 어찌 걱정이 되지 않겠느냐. 생각을 좀 하고 있었다. 특별함에는 마땅히 그리 된 원인이 있을 게야. 나는 그 원인을 찾을 생각이란다. 아마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게야. 못미더워보여도 숨겨진 답을 찾는 일에는 능통하니까 말이다. 당연히….”
그리고 말을 맺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살아야지.”
“…….”
에단은 그제야 깨달았다. 걱정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쥬다스는 충분히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할 자신과 그에 걸맞은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그를 티내지 않는 게 익숙할 뿐이었다.
아마도 홀로 싸워온 시간이 길었을 탓이리라.
그리 생각이 미친 에단은 눈앞의 황자에게 가만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 뜻을 믿겠습니다. 지켜주십시오, 반드시.”
이것은, 완벽주의에 길들여져 자란 ‘에단 헤이가’가 처음으로 내보인 타인에 대한 신뢰였다.
시험이 끝난 한 주간은 휴일이 주어졌다.
과목별로 시험 일자가 달랐으니 학교 측에서 아예 시험 주간을 정해놓고 통째로 수업을 비워버린 것이다. 극악한 난이도를 자랑하는 루바흐 학원 시험에 시달렸을 학생들을 배려한 일종의 포상개념이기도 했다.
모처럼 푹 쉴 수 있게 된 쥬다스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방안에서 지친 몸을 뉘였다. 확실히 이대로는 곤란했다. 쥬다스는 침대에 걸터앉아 손바닥을 펼쳤다.
두 정령이 포르륵 그 위로 내려앉았다.
“흐음. 신체가 허약한 건 이 아이가 타고난 부분인 것 같은데……. 이것 참, 아예 성장을 멈춘 이유는 무엇일꼬?”
「바람이 가져오는 정보에는 이렇다 할 내용은 없어. 미안해, 이그레트.」
「후에에, 미안하다요. 이그레트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요…….」
쥬다스는 풀죽은 두 정령의 머리를 애정을 담아 쓰다듬어주었다.
“너희는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큰 도움이자 기쁨이란다. 아이들아.”
「정말? 헤헤, 나도 기뻐!」
「이그레트으으.」
단순한 말 한마디에도 정령들은 순수하게 즐거워했다. 금세 화색을 띄는 유니와 토니를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낸 쥬다스는 이내 턱을 짚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닌 인위적인 현상이야. 헌데 만일 마법의 힘이 작용했다면 너희가 눈치 채지 못했을 리 없으니…….”
「그럼 뭐다요? 약이라도 먹은 거야요?」
“그 가능성도 염두에 둘 필요는 있겠구나. 아니라면 혹 정신적인 문제일 수도 있겠지.”
「정신?」
“내가 아닌 이 아이의 정신 말이다.”
쥬다스는 손가락으로 제 머리를 톡톡 두들겨보였다. 본래 황자가 가지고 있던 정신적인 트라우마가 육신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아차린 유니가 고개를 갸웃해보였다.
「그럼 이그레트. 만일 원인이 정신에 있다면 루니를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
“으음…….”
쥬다스는 선뜻 그러마 답하지 못하고 침음했다.
확실히 물의 정령왕인 루니는 ‘정신계’에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은 인체와 가장 적합한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물의 정령은 사람의 심리를 읽거나 파고들어 조절할 수 있는 특이한 힘을 발휘했다.
“…….”
그는 제 손위에서 반짝반짝 눈을 빛내고 있는 두 정령을 가만 응시했다.
영락없이 고목나무에 들러붙은 매미 꼴이었다.
실제 쥬다스가 정령을 불러낸 이후부터 지금까지 죽, 두 정령은 그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건 ‘이그레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무엇이 자유롭기로 소문난 정령들을 매료시켰는지는 몰라도 마치 둥지안의 새끼 새처럼 그에게 머물렀다.
특별히 이그레트가 바라지 않는 이상 정말 한날한시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쥬다스로서는 다른 정령을 또 불러내기를 주저했다.
정령은 본디 자유를 누리는 존재.
자연을 다스리며 그 안에서 노닐기를 즐기는 이들이다. ‘이그레트’는 그런 그들에게 있어 처음으로 집착할 대상이 되었다. 4속의 정령왕들은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그레트가 죽는 순간까지 소중히 그 곁을 지켰다.
그랬기에 기왕 죽음으로 떨어진 지금, 가능하다면 오래 부르지 않을 생각이었다.
쥬다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껏 짐작한 유니가 파다닥 날아올라 그의 코끝을 매만졌다.
「뭐어~ 나는 지금이 좋지만. 루니랑 카니, 지금쯤 무진장 서운해 하고 있을걸.」
“허허, 그런가.”
「당연하잖아. 나랑 토니가 뻔~히 정령계에서 사라졌는걸. 아무리 그 둘이 둔탱이라지만 지금 정도면 알아차렸을 테고?」
한쪽은 둔하다고 하기보단 아예 매사에 관심이 없는 축에 속했지만, 어쨌든 유니의 말에는 틀림이 없었다.
쥬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찾을 만치 찾아보고도 방법이 없으면 그때 부르자꾸나.”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이그레트, 진짜 황소고집이야.」
「와아! 루니도 오는 거다요? 언제? 언제?」
물과 가장 궁합이 좋은 땅 속성 정령왕 토니가 흥분한 얼굴로 날개를 파닥거렸다.
“글쎄다. 아마 머지않아 다들 한 자리에 모이게 되겠지.”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에라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지금 그 말은 두 정령이 듣기에 흡사 예언과도 같았다. 유니는 귀찮다는 듯 턱을 괴었고, 토니만 신이나 주변을 날아다녔다.
그렇게 평화로운 휴일이 지나갔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잠깐씩이지만 이그레트가 계약 당시 지은 정령의 이름이 모두 언급되었네요. 정리하자면...
바람의 정령왕 : 유니.
불의 정령왕 : 카니.
물의 정령왕 : 루니.
땅의 정령왕 : 토니.
...인데, 초성모티브는 이름순서대로 야-쿠-르-트입니다. 얘들 이름 지을 때 야쿠르트를 먹고 있었던지라. 초코파이라도 먹었더라면 초이, 케이, 파이, 유이 정도가 됐으려나... (믿으시는 건 자유)
언제나 글을 즐겁게 쓰고 있긴 합니다만 가끔은 '오늘만 쉴까' 싶다가도, 기다리시는 분들 떠올리며 다시 키보드를 잡습니다. ㅠㅠㅎ 늘 힘이 되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지적해주신 오타/비문도 늘 감사히 고치고 있습니다! 일일연재라 그중 빠뜨린 건 나중에 한꺼번에 다듬으면서 수정하겠습니다 ㄷㄷ)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여주신 사랑에 감사드리며,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