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25화 (25/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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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통과의례

시험 주간이 종료되고 주말이 지난 첫 등교일이 밝았다.

어느 정도 휴식을 통해 피로를 풀긴 했어도 루바흐 학생들의 몰골은 여전히 초췌했다.

말라죽은 화초처럼 비실거리는 학생들 사이에서 푹 쉬어 말끔해진 쥬다스만이 여유롭게 모습을 드러냈다.

“좋은 아침이구나, 바이칼. 휴일 동안 평안하였는고?”

언제나와 같은 인사에 피곤에 쩔어 책상에 늘어져 있던 바이칼은 인상을 팍 구겼다.

“하……. 남들이 다 당신 같다고 착각하지 마시지요. 시험에 열과 성을 다한 학생이라면 휴일이 아니라 지옥이었을 테니.”

“……?”

으르렁대듯 쏘아붙인 말을 들은 쥬다스는 눈을 한 번 깜빡이더니 이내 푸근하게 웃어주었다.

“그런가. 열과 성을 다해 시험을 치른 모양이야. 고생했겠구만.”

“제대로 하지도 않을 거면서 대체 루바흐에는 왜 오셨는지 모를 일이군요.”

한 번 찌푸려진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끝까지 당신을 믿고 계신 폐하 생각은 안 하는 겁니까? 왜요, 이것도 잘 안 되니까 포기하시게요? 그럴 거면 다 그만두시죠. 말마따나 어차피 여기가 마지노선이니, 어쩌면 폐하께서도 이제 당신을 더는…….”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야 바이칼은 아차 싶었다.

제 구실 못하는 황자를 위해 황제가 최후의 수단으로 루바흐를 선택했다는 사실이야 제국의 귀족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걸 당사자 앞에서 입 밖으로 꺼내기엔 도를 넘은 내용이었다.

공공연히 무례를 범하는 바이칼이었지만 이번만큼은 큰 실수였다.

시험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더불어 황자의 태평한 얼굴을 보자 치밀어 오르는 화기를 다스리지 못함이 화근이었다.

자존심에 차마 사과도 못하고 굳어 있는 바이칼을 향해 쥬다스는 물끄러미 시선을 주었다.

“무례하구나.”

“……!”

늘 조용히 당하던 이에게서 처음으로 책망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큰소리를 내지도 않았으며 특별히 감정이 실린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오히려 그 담담함이 더 서늘하게 다가왔다. 웃음기가 사라진 금안이 가만히 바이칼을 향하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하자 바이칼의 등에서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자신보다 작은 체구의 소년인데, 체감하기로는 큰 어른에게 꾸짖음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무례를 범하고도 사과하지 않을 셈이더냐.”

“죄…… 죄송합니다.”

“그래, 잘못을 안다면 응당 사과해야지. 다신 그러지 말거라.”

홀린 듯 사과하고 난 바이칼은 뒤늦게 민망함으로 얼굴을 붉혔다.

잘못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저 백로황자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모멸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위화감이 찾아왔다.

‘역시 이전과는 뭔가 다르다. 뭐지? 대체 무엇이…….’

그 위화감의 정체는 경제학 수업이 끝나고 성적 순위표가 칠판에 공개된 후에야 드러났다.

성적 순위를 확인하기 위해 우르르 몰려든 학생들 틈에서 한차례 감탄인지 비명인지 모를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바이칼이 새파랗게 질려 기함했다.

“말도 안 돼……!”

“…….”

충격을 받은 건 바이칼뿐만이 아니었다.

제일 앞에서 자신의 순위를 확인한 크리스티나가 황망한 눈으로 책을 끌어안은 손아귀에 꽈악 힘을 주고 있었다.

학원 루바흐에 입학해 지금껏 전 과목에서 단 한 번도 1등에서 밀려나 본 적 없는 그녀였다.

크리스티나는 이번 시험도 역시 어렵긴 했으나 수강생들 중 최고의 점수를 받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어처구니없는 상대에게 그 믿음이 박살났다.

<1등: 쥬다스(12), 100점>

<2등: 크리스티나(14), 92점>

<3등: 첼피(15), 87점>

.

.

“-풋!”

이내 크리스티나의 입에서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주변에서 그녀의 눈치를 보던 학생들이 흠칫 놀라 일제히 시선을 보내왔다.

이제 크리스티나는 아예 시원스레 청명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늘 얼음장같이 싸늘하던 그녀가 웃는 모습에 대부분 깜짝 놀랐으며 뭇 남학생들은 얼굴을 붉혔다.

가문이나 성적을 떠나 조각 같은 미녀로도 유명한 크리스티나였다.

‘하아, 분하긴 하지만, 차라리 이 편이 훨씬 재밌게 됐잖아?’

그녀는 힐끗 쥬다스가 있던 자리를 돌아보았다.

여타 학생들과 달리 성적 순위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쥬다스는 이미 자리를 떠나고 없었다.

그마저도 그녀의 눈엔 자신감으로 보였다. 크리스티나는 미소를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서늘한 표정을 덮어썼다.

“과연, 어떻게 될까.”

오만한 눈으로 성적 순위표를 훑어 내린 크리스티나는 미련 없이 홱 돌아섰다.

바다처럼 빛나는 투톤의 긴 머리카락이 찰랑이며 내려앉았다.

수많은 학생에게 경악을 안겨준 쥬다스의 ‘성적 순위표’ 사건은 경제학에서 그치지 않았다.

총 5과목, 그가 신청한 문과 과목이 몇 안 되기는 했으나 그렇다 한들 거기서 전부 100점을 기록하여 1등을 차지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행보였다.

유일하게 무예과 수업인 봉술에 한해서만 평균에 해당하는 점수를 받았다.

사실 그의 신체 조건을 생각하면 그마저도 굉장한 일이었다.

최하 중의 최하, 겨우 낙제만 면하곤 하던 모질이 황자가 보여준 변화는 수많은 관심을 불러 모았다.

시험 문제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루바흐 학원에서 부정행위란 있을 수 없었다.

아예 교과서를 펼쳐 놓고 시험을 치른다 한들 그에 대한 완벽한 이해와 활용도 없이 채점 기준에 부합하기란 어려웠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철통같은 감시 체계가 잡혀 있었기에 부정행위 자체가 아예 불가능했다.

온전히 그의 능력으로 1등을 거머쥔 것이다. 그 사실이 퍼져 나가자 학생들 사이에 파란이 일어났다.

잘 빚어진 인형처럼 아무것도 못하던 ‘백로황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갑자기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처음부터 숨기고 있었던 건가……?”

“아무튼 굉장해. 입학해서 이때까지 100점은 처음 봤어!”

학교에서는 결국 성적이 능력을 말해준다.

단순한 1등이 아니라 100점이라는 점수를 거머쥠으로서 뭇 또래를 상회하는 능력을 보여준 황자는 더 이상 무시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던 학생들의 경우엔 은근한 기대마저 갖곤 했다.

타고나기를 황조의 적통을 타고난 황자가, 실은 그 능력마저 갖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가능성만으로도 귀족 자제들의 선택은 불판 위의 팬케이크처럼 쉽게 뒤집혔다.

그중 몇몇은 직접적으로 쥬다스에게 다가가기까지 했다.

“……저기.”

“으음?”

“으, 응원할게요. 쥬다스 님!”

“그거 고맙구나.”

부드럽게 웃어주는 모습에 더욱 호감을 갖게 된 학생도 더러 생겨났다.

백로황자가 무시받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마치 인형처럼 표정이 없던 우울함에 있었던 만큼 그는 여러모로 변화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반면, 초조하게 그의 변화를 인정하지 못하는 무리도 존재했다.

“그래 봤자 몇 과목 안 듣잖아.”

“쳇, 조금 똑똑한 걸로 뭐라도 될 줄 아나.”

자신들이 배척한 존재가 실은 가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그들을 묘한 두려움과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그 감정들은 음습한 성질이 강하여 곧 다른 쪽으로 변질되어갔다.

쥬다스를 바라보는 몇몇 학생의 눈에 잔인한 분노가 어렸다.

그들에게 있어 백로황자란 영원히 한심한 종자로 남아야 할 대상이었다.

악의적인 시선을 귀신같이 눈치챈 유니가 팔짱을 끼며 눈을 흘겼다.

「꼭 있지, 저런 녀석들.」

「? 누구? 어딜 말하는 거다요?」

「저 뒤에서 쳐다보는 놈들 말이야. 아으, 거슬려. 눈에 시커멓게 ‘나 꿍꿍이 있소’라고 써 붙여놓고 말이야. 확 날려 버리고 싶다니까!」

“허허. 진정하거라, 유니.”

쥬다스 또한 자신을 향한 적개심 가득한 시선들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이그레트’로 살아오면서 지긋지긋하게 받아 온 시선이었다. 그러니 자연 예민하게 잡아낼 수 있었고 동시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그쪽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평소대로 성실히 수업에 출석했다.

교사는 물론이고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 대다수가 그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늘 자애롭고 부드러우며, 심지어 완벽한 성적까지 받아 낸 그를 새롭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지금껏 무시했던 게 있어 먼저 말을 걸어오거나 아는 척하는 이는 없었지만 적어도 예전처럼 무시하는 일은 깨끗이 사라졌다.

빈정거리거나 비웃는 일 역시 씻은 듯 종적을 감추었다.

쥬다스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고 우중충했던 옛날의 모습 대신 따뜻하고 부드러운 분위기가 늘 주변을 감쌌다.

그러나 이는 그를 배척하고자 하는 소년들의 반감에는 더더욱 불을 지폈다.

황자의 긍정적 변화로 인해 지나치게 과열된 반감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마저 불러일으켰다.

“……엉?”

마침 지나가다 수상쩍은 모습을 목격한 바이칼이 슬쩍 문이 열린 빈 교실을 향해 다가갔다.

“그건…… 하는 편이…… 겠는데.”

“……는 건 어때? ……처리할 필요…….”

“차라리 황자를…….”

빈 교실에 둘러앉아 작은 소리로 의견을 교환하는 학생은 총 5명이었다.

그 5명 전부 학원 내에서 발이 넓은 바이칼에겐 전부 모르는 얼굴들이 아니었다.

집안도 웬만하고 성적도 그럭저럭 좋으면서 놀기도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들이었다.

바이칼도 한참 놀기 좋아할 신입생 시절 저들과 어울리고 다닌 적도 많았다.

그런데 그냥 지나치기엔 미심쩍은 단어가 몇 가지 귀에 들어왔다.

‘처리? 황자?’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쥬다스는 성장이 멈췄을 뿐 아니라 선천적으로 약체 중에 약체입니다. 아마 성장이 정상적으로 진행되더라도 이 부분은 오래 안고 갈 리스크로 남을 겁니다.ㅎ

게임으로 따지자면, 메딕없이 스팀팩을 3연타한 마린이랄까...

노셔극공 빅터라거나 도둑작한 엘프 같은.... (농이니 모르셔도 됩니다.)

사족으로 소제목이 '통과의례'인 만큼, 이번 장에서는 한번쯤 학생들과 겪어야할 마찰을 다루고 있습니다. 저렇게 극단적인 파가 아니더라도 쥬다스를 꺼려하는 학생들은 아직 많습니다.

2황자, 3황자 등 견제하는 대상도 많고요. 어린아이들 뿐 아니라 이미 성년인 귀족들에게도 어필을 해야할 거고... 이그레트 갈 길이 머네요. ㅎㅎ

...아참, 그리고 정령왕들 본체(어른모습) 따로 있는 건 어떻게 아셨답니까;; 이것 말고도 독자님들 중에 코난 분들이 계셔서 종종 움찔하네요. 덜덜;

선호작, 추천, 코멘트 등 보여주신 응원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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