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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통과의례
바이칼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설마 아무리 생각이 어리다한들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교육받은 자제들로서 황자를 건드릴 생각을 할까 싶긴 했다.
하지만 일단 가만 놔두기는 영 꺼림칙했다.
그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교실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섰다.
“여기 모여서 뭐하냐.”
“……!”
심각하게 얘기를 나누던 5인조는 흠칫하고 일제히 그를 돌아보았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침묵이 감돌았다. 바이칼이 당황하자 그중 한 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어보였다.
“뭐야, 바이칼 너였냐. 거기 서 있지 말고 이리 와서 앉아.”
그가 다가가자 의자까지 끌어다 준 학생이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요즘 어때?”
“어떻긴, 똑같지 뭘. 시험 말아먹은 거 빼곤.”
“……똑같다고?”
누군가 코웃음 쳤다. 바이칼을 부른 학생이 킥킥거리며 거기에 덧붙였다.
“백로황자와 자주 부딪히는 모양이던데.”
“딱히? 부딪히는 정돈 아니고. 조금…….”
“왜? 조금 어떤데?”
떠보는 질문에 바이칼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많이 변하셨으니까, 그분도. 변한건지 원래 본모습을 속이고 있던 건진 몰라도 솔직히 감탄했다. 좀 반성도 되고. 그래도 우리 제국을 다스리는 군주의 핏줄이신데 그동안 너무 무례하게 군 건 사실이니.”
“……그래서, 홀랑 그 줄에 서보시겠다?”
묘하게 날이 선 질문에 바이칼은 허 하고 날숨을 뱉었다.
“줄? 그런 거 아직 생각도 안 했는데 무슨 소리야. 우린 아직 학생이다. 줄이니 세력이니 하는 건 성인식을 치른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아.”
“……완전히 ‘백로황자’를 인정하고 있군.”
그를 쳐다보는 5인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그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더니 동시에 주르륵 자리에서 일어섰다.
졸지에 불러서 왔더니 홀로 앉아 있게 된 바이칼은 어처구니없는 시선으로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부터 너희가 그렇게 백로황자에게 관심이 많았지?”
“거기엔 길이 없어, 바이칼.”
“뭐?”
“그자는 군주가 될 수 없단 소리다.”
얼마 전이었다면 두말할 필요 없이 동조했을 소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군주가 될 거라 장담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 가능성만큼은 진흙에 파묻힌 채 반짝이는 보석처럼 슬며시 엿보이고 있었다.
바이칼은 최근 쥬다스의 달라진 행적을 떠올리곤 표정을 굳혔다.
“이봐, 펠리엇…….”
“지금부터 증명해 주지. 똑똑히 지켜보기나 하라고, 허파에 쉬슨 놈 같으니.”
펠리엇과 그 무리들은 비웃음을 흘리며 교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바이칼은 난데없이 벌어진 사태를 이해하려 한동안 멍하니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러다 이내 벌떡 일어섰다.
“저 자식들, 대체 뭘 하려고.”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분명 쥬다스를 향한 강한 적대감이 그들 사이에 팽배했다.
바이칼은 황당함과 짜증이 뒤섞인 표정으로 거칠게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제길, 정말 모르겠네……!”
말과는 달리, 그날 이후 바이칼은 은근슬쩍 쥬다스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말을 건네진 않더라도 그의 옆자리에 앉는다든가, 수업을 마치고 나갈 때 거리를 두고 따라 나간다든가 하는 식으로 묘하게 자기 시야 반경에 쥬다스를 두려고 노력했다.
제 딴에는 티내지 않고 감시한다는 게 쥬다스와 에단의 눈에는 훤히 들어왔다.
“……저 정도면 명백히 수상하군요.”
“허허, 내버려 두어. 나쁜 뜻으로 저러는 건 아닐 테니.”
쥬다스는 그저 귀여운 아이의 재롱을 보듯 즐겁게 웃었다.
실제 바이칼의 작태는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징 하니 노려보고 있다가 시선이 마주칠까 하면 구석으로 시선을 돌리는 식이었다.
신경 쓰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지켜본다는 느낌이 풀풀 나는 태도였다.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니다만……. 기특한지고.”
쥬다스가 빙그레 웃어 보이자 다른 곳으로 가는 척하며 뒤를 쫓고 있던 바이칼이 움찔 고개를 돌렸다.
바이칼의 어설픈 감시는 그들이 봉술 수업을 듣기 위해 체육관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뼛속까지 문과생인 바이칼은 무예과 수업이랑은 담을 쌓고 살았으니 체육관까지 따라 들어올 일은 없었다.
그러나 묘하게 불안해 보이는 얼굴로 체육관 앞에 선 바이칼은 이내 성큼성큼 들어와 쥬다스 앞에 섰다.
“그…….”
“음?”
“조, 심…… 하십시오.”
“허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지만 분명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경고였다.
예상치 못한 적극적인 친절에 쥬다스뿐 아니라 함께 수업을 준비하던 에단마저 연습용 봉을 든 채 의외라는 듯 눈을 지그시 떴다.
기특한 어린애를 보는 듯한 두 시선에 바이칼은 울컥 항변을 늘어놓았다.
“이건 그러니까, 딱히 당신이 걱정돼서가 아니라, 어쩌다 보니 들은 게 좀 있어서.”
“들리는 것보다 스스로가 판단하기로 옳다고 믿는 쪽으로 움직였더냐. 그것 참, 쉽지 않을 텐데 네게 그만한 정의감이 있는 게로구나. 고맙다, 바이칼.”
‘……자신이 노려지는 걸 알고 있다?’
자신의 경고를 정확히 알아들은 데다 칭찬까지 해주는 쥬다스의 모습에 바이칼은 황망히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눈앞의 이 작은 황자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걱정할 필요도 없이 강했다.
바이칼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체육관을 빠져나갔다.
「……쟤 지금 걱정하면서 아닌 척 하는 거지?」
「우웅. 어렵다요. 이그레트를 싫어하던 거 아니다요?」
「글쎄~ 인간은 겉과 속이 따로 놀기도 한다나봐.」
「겉과 속이 따로? 와! 무슨 놀이하는 것 같다요!」
유니와 토니도 바이칼에게 흥미가 생긴 얼굴로 조잘거렸다.
두 정령은 수업이 진행되는 내내 쉼 없이 그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정령들은 대체로 바이칼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그간 못되게 군 면도 있긴 했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모나게 굴면서도 은근 쥬다스를 챙기는 모습을 재미있게 여기고 있었다. 정령은 인간이 가진 보다 본질적인 마음에 반응한다. 그런 정령들이 호감을 표했다면 바이칼은 악한 인물이 아니란 뜻도 되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지만, 토니를 불러온 건 잘한 것 같구만.’
즐거워 보이는 둘을 힐끗 보며 쥬다스는 푸근하게 미소 지었다. 만일 유니 혼자만 그의 곁에 두었더라면 지금처럼 쥬다스가 바쁜 상황에선 홀로 그림자처럼 뒤만 졸졸 쫓아다녔을 테였다.
정령도 엄연히 감정이 있고 이성이 있는 존재였고, 그에게 있어선 특히 가족이자 친구로 한 평생을 같이 지낸 특별한 이들이었다.
그런 유니를 쓸쓸하게 두지 않게 되었다는 점만으로도 그는 상당히 안심이 되었다.
한 편으론 나머지 두 정령에 대해서도 생각이 미쳤다.
“기왕지사 다함께 있는 편이 나을란가….”
“예?”
“아니다. 자, 마저 해보자꾸나.”
쥬다스가 방어자세를 잡자, 에단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새로 배운 동작은 공격과 방어의 연계기술이었다. 봉이란 무술의 기초라고도 불리는 만큼 동작의 폭이 넓고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 특징이 있었다.
공방이 물 흐르듯 전환되며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 심지어 무기가 막히면 이를 버리고 곧장 권법으로 전환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이 봉술의 장점이었다.
성실히 배운 대로 자세를 취하려던 에단은 문득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시선을 천장으로 향했다. 유달리 감이 좋은 그의 귀로 와이어가 끊어지는 미세한 소음이 잡혔다.
끼익― 끼이익.
실내체육관이었기에 천장에는 마법구로 내부를 밝혀주는 조명장치가 매달려있었다. 동그란 구 형태의 장치는 성인 둘이 팔 벌려 껴안으면 맞닿을 만한 크기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평소보다 조명장치가 조금 낮게 내려앉아있었다.
미세하게 흔들거리는 조명을 발견한 에단이 눈을 가늘게 뜨고 손을 들었다.
“무슨 일이지, 학우님?”
메이란은 지도하던 학생들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응답했다. 에단은 천장을 가리키며 이상을 고했다.
“조명장치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응? 뭐?”
다른 학생들의 자세를 체크하며 대충 대꾸하던 메이란은 멈칫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녀의 눈에도 확연히 위태롭게 보이는 장치가 눈에 들어왔다.
뒤늦게 이상을 눈치 챈 메이란이 기록지를 던지다시피 바닥에 내려놓으며 벌떡 일어섰다.
“전원 동작 그만! 물러서!”
“예?”
“설명할 시간 없으니까 일단 거기서 비켜!”
“……?!”
한창 연습을 진행하던 학생들은 의아한 얼굴로 동작을 멈추었다.
그러자 그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 조명장치가 천장에서 분리되었다. 동시에 학생들 사이에서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쿠웅!
낙하는 빨랐다. 미처 피하지 못한 두 학생이 그 밑에 남았다.
체육관 내부를 밝혀주는 조명장치는 그 크기가 그리 크진 않았지만 마법이 가동되고 있어 충격을 받으면 폭발의 위험이 있었다.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벌어진 일에 메이란은 사색이 되어 조명장치가 추락한 곳으로 달려갔다.
루바흐의 안전설계는 완벽했다. 매주 같은 시간 관리사가 점검을 나오고 있으며 특별히 큰 손상이 생기지 않으면 지금과 같이 사고가 일어날 일은 없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교사 뿐 아니라 학생들도 겁에 질린 얼굴로 지켜보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뒷편에 이어서 나오겠지만 범행을 저지른 학생들은 이 정도로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은 없긴 했습니다. 원래는 그냥 좀 놀래키고, 겁을 줄 목적이었는데 사태가 좀 꼬였을 뿐...
...초반부 학생들 태도에 대해 지적을 많이 받다보니 괜히 구구절절 설명하게 되네요.ㅠㅠ;
아무튼 이번 사건은 그때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므로..... 음, 어찌 될 지는 그냥 지켜봐주시면 되겠습니다.... (소심)
아, 그리고 이번주 주말에 또 집을 비우게 되었습니다.
가을이라 날이 좋아서 그런지 주말마다 나갈 일이 생기네요 ㅎ
그런고로 이번 토요일과 일요일은 연재를 쉽니다. (꾸벅)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응원에 감사드리며,
이틀 뒤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