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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통과의례
그들의 표정을 확인한 쥬다스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사람은 종종 스스로 감당치 못할 행동을 저지르게 되기도 하지. 잘못을 들키고 싶지 않아 더 큰 잘못을 하려 하고, 이를 덮으려 더욱더 큰 잘못을 과감히 이행하려 한다. 이는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야.”
“지금, 무슨 말을.”
“너희 같은 어린아이에게는 더군다나 감당키 어려웠을지도 모르지. 모난 자갈처럼 여겨 무시하던 존재가 갑자기 힘이 생긴다는 일은, 그래. 두려울 만도 했겠구나.”
“…….”
쥬다스는 그들의 속내를 열어보기라도 하듯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말마따나 무시하던 존재가 이렇게까지 자신들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을 줄은, 게다가 직접 찾아와 차분히 담소를 나누려 할 줄은 몰랐기에 더더욱 뭐라 답하기가 어려웠다.
학생들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자, 쥬다스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하나 방식이 너무 과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누? 자칫 여러 사람이 해를 입을 수도 있는 문제였어. 하면 너희가 이곳에 모인 이유는 무엇이더냐?”
“그건.”
“잘못에 대한 사과를 하기 위함이더냐. 아니면…….”
쥬다스는 미소를 지우고 슬금슬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학생들을 힐끗 돌아보았다.
그들은 굳은 얼굴로 그를 에워싸 도망갈 곳을 막아서고 있었다.
“……여기서 더 큰 죄를 저질러 잘못을 덮을 생각인가.”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몰라도, 사실을 전부 알면서 혼자 이렇게 찾아오시다니. 배짱도 좋군요.”
펠리엇이 다른 학생을 대표해서 대답했다.
혐오와 무시가 뒤섞인 눈빛에 쥬다스가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인형처럼 살아왔으면 차라리 계속 인형 놀음이나 하시지 그랬습니까. 당신이 아니어도 훌륭한 인재는 많습니다. 이미 당신이 아닌 다른 황자 전하들을 지지하는 세력이 많다고요. 이제 와서 뭐 좀 있는 척하셔서 될 일이 아니란 겁니다.”
펠리엇이 손을 들어 올리자 다른 학생이 의자를 하나 가져다 앞에 놓았다.
억지로 앉히기라도 할 태세였으나 쥬다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들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 태연한 태도에 오히려 더 짜증이 솟은 것은 학생들이었다.
펠리엇이 막 쥬다스에게 손을 뻗던 찰나였다.
“이런 공개된 장소에서 감히 그분께 손을 대려는 너희야말로, 배짱도 좋군.”
“……?!”
싸늘한 음색으로 일침을 놓은 것은 다름 아닌 크리스티나였다.
그녀가 이 상황에 개입한 것은 쥬다스로서도 의외인 일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크리스티나는 성큼성큼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
사실 크리스티나는 안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만 조금 전 우연히 쥬다스가 교사 안으로 들어가는 걸 발견했고, 지금 시간에는 이 건물에 수업이 없다는 게 떠올랐을 뿐이었다.
최근 쥬다스에 대해서는 꽤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던 그녀로서는 드물게 에단도 없이 홀로 어딘가로 향하는 그 모습에 의아함을 느껴 뒤를 쫓았다. 그리고 의도치 않게 지금 장면을 목격하게 되어 나선 것이었다.
도도하기로 유명한 크리스티나가 직접 불미스러운 사건에 끼어듦이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랬기에 무리 중 가장 당당하던 펠리엇조차 말을 더듬었다.
“크, 크리스티나? 당신이 여긴 왜.”
“너 따위에게 대답할 의무가 있나. 비켜.”
차가운 명령조를 들은 펠리엇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그는 크리스티나의 매끈한 팔목을 붙잡고 돌려 세웠다.
“남의 일에 끼어들지 마시고 가던 길이나 가죠. 별로 어떻게 하려는 게 아니라……!”
휘익, 퍽!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혔다. 고꾸라진 펠리엇이 영문을 모른 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간단히 그를 잡아 땅에 매친 크리스티나가 불쾌한 시선으로 팔을 툭툭 털었다.
“함부로 건드리지 마, 저급한 것.”
“…….”
“…….”
학생들은 멍하니 그녀와 쓰러진 펠리엇을 번갈아 보았다. 뒤늦게 그들의 뇌리에 크리스티나에게 따라붙는 별칭 하나가 떠올랐다.
‘차가운 검의 여기사.’
늘 품위 있고 절도를 지키는 모습을 유지하는 고고한 그녀였다.
거기에 저런 별칭이 붙은 결정적인 이유는, 그녀가 무예에도 상당히 능통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기사들이 쓸 법한 묵직한 장검을 다루며, 무기 없이 권술만으로도 어지간한 학생 정도는 제압할 실력이 되었다.
같은 여성은 물론이고, 남성들도 함부로 상대하기 어렵다는 그녀였다.
거기에 언제나 냉랭한 분위기까지 품고 있으니 누구도 그녀에게 함부로 굴지 못했다.
굳어버린 다른 이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스쳐 지나간 크리스티나는 쥬다스의 앞까지 뚜벅뚜벅 다가가 손을 척 내밀었다.
“나가죠. 여기.”
쥬다스는 그녀가 내민 손을 가만 쳐다보았다.
뻔히 다수에게 둘러싸여 무시 받고 있는 상황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와 내민 손이다.
이는 90년가량을 살았던 지난 삶에서도 접해 보지 못한 생소한 경험이었다.
쥬다스가 묘한 눈으로 쳐다보자 크리스티나는 뭐하냐는 의미를 담고 고개를 기울였다.
“고맙구나.”
“뭐, 어차피 당신이라면 뭔가 생각이 있어 왔겠지만. 세상에는 워낙 저급한 부류가 많으니, 혼자 다니는 건 자제하세요.”
크리스티나는 곁눈질로 주변을 둘러싼 이들을 가리키며 시니컬하게 대꾸했다.
작게 웃은 쥬다스가 무어라 답하려던 찰나, 펠리엇이 벌떡 일어서며 그녀의 어깨를 잡아챘다.
“멋대로 끼어들지 마시죠. 그쪽이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상관하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할 생각이지.”
“무슨 짓이라뇨? 뭔가 오해하시나본데 먼저 찾아온 건 쥬다스 님입니다. 우린 그저 대화를 하고 있었다고요.”
쥬다스가 먼저 찾아온 것은 맞았지만, 단순히 ‘대화’ 선에서 끝낼 생각이 없던 것만큼은 분명했다.
분위기로 보아 그 사실을 눈치챈 크리스티나가 짜증스레 어깨를 잡은 펠리엇을 노려보았다.
“……이거 놔.”
“왜, 아까처럼 패대기라도 칠 생각입니까? 놀라서 당하긴 했는데 두 번은 안 봐줍니다.”
“하.”
“여자가 끼어들 일이 아니라고.”
다른 학생들까지 가세하면서 그들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아무리 크리스티나가 무예에 재능이 있다 한들 건장한 소년 다섯을 한 번에 싸워 이길 정도는 아니었다.
어깨를 잡아채고 사방에서 나가라고 밀어대는 통에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그들의 손을 쳐냈다.
“그냥 얘기만 한다니까? 예?”
탁!
실랑이 끝에 크리스티나는 그들에게 밀쳐져 휘청거리게 되었다.
거기에 하필이면 쓰러져 있던 책상에 발이 걸려 휙 뒤로 넘어졌다.
“어!”
“-!”
하필 그녀가 넘어지던 쪽에 창문이 열려 있었다는 게 문제였다.
앗 하는 사이 크리스티나는 창문 너머로 몸이 반쯤 넘어갔다. 당황한 학생들 사이로 쥬다스가 빠르게 달려가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
그러나 지금 그의 육신은 90살 먹은 노인네보다도 힘이 없는 약체 중의 약체였다.
급한 나머지 일단 손을 뻗고 봤지만 또래보다 성숙한 몸을 가진 14세 여자아이를 붙들고 지탱할 힘이 쥬다스에게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바람에 쥬다스도 크리스티나와 함께 사이좋게 창밖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그레트!」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쥬다스의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가정이 세워졌다 허물어지길 반복했다.
정령의 힘을 사용했을 때,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지는 여파를 전부 다른 방식으로 해결했을 때, 혹은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바람을 가르며 추락하는 시간은 불과 몇 초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유니가 살짝 힘을 사용하여 떨어지는 속도를 늦춘 상태였다.
“…….”
쥬다스는 놀란 나머지 눈을 질끈 감고 있는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았다.
그토록 도도하게 굴었어도 그녀는 역시 14살 어린 소녀일 뿐이었다.
공포에 떨고 있는 크리스티나의 손을 꾸욱 잡아준 쥬다스가 미안한 눈으로 작게 말했다.
“……괜찮을 거란다, 얘야.”
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납게 날뛰려는 바람의 힘을 의도적으로 저지했다.
풍덩!
그들이 떨어진 위치에는 다행히도 루바흐 학원을 따라 흐르는 거대한 호수가 자리해 있었다.
두 사람이 물속에 빠지는 것까지 똑똑히 목격한 펠리엇 무리는 창문에서부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어, 어떡하지.”
“신고!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야? 주, 주, 죽으면 어떡해……!”
“닥쳐. 신고하면? 이게 다 누구 잘못이 될 것 같아?”
펠리엇의 날카로운 말에 덜덜 떨며 우왕좌왕하던 나머지 학생들이 일동 침묵했다.
겁에 질린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는 그들을 향해 펠리엇이 다시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한 짓 아니지 않냐. 우린 그냥 얘기만 하려고 했던 거고, 발을 헛디뎌 떨어진 건 크리스티나잖아. 그걸 구하겠답시고 제 몸 생각 안 하고 뛰어든 백로황자가 멍청한 거지!”
“그, 그런가?”
“하지만 저대로 내버려 둘 수는…….”
“자기들끼리 멋대로 떨어진 거잖아.”
그들 사이에 묘한 자기 방어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한번 뒤틀린 생각은 일제히 한 방향으로 뻗어 나갔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어른들에게 알려야 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뛰어나가는 이가 없었다.
“일단 여길 벗어나자. 우리가 여기 있었다는 걸 아무도 알아선 안 돼. 다행히 오늘은 여기서 수업도 없었고, 딱히 찾아올 사람도…….”
“미친놈들.”
드르륵!
반쯤 열려 있던 문이 거칠게 열렸다.
혼비백산한 그들이 문 너머를 쳐다보자, 문을 열어 제친 채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진 바이칼이 버럭 소리쳤다.
“네놈들이 그러고도 긍지 높은 귀족이자 루바흐의 가르침을 받는 학생이라 할 수 있겠냐?! 이 개자식들아!”
“……뭐, 무슨. 우리, 나, 내가 안 그랬어. 이건 자기들이 알아서……!”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 학생들의 눈에 그들만큼이나 하얗게 질린 에단의 얼굴이 들어왔다.
바이칼은 혼자 있던 게 아니었다.
바이칼의 뒤에 서서 주먹을 콱 말아 쥔 그는, 이내 그대로 휙 몸을 돌려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이그레트'는 큰 시놉시스가 정해진 글입니다. 사랑해주시는 분들의 의견을 최대한 새겨듣고 참고하고자 노력하고는 있지만, 전부 반영하지 못해 아쉬운 점도 많습니다.
아마추어 글쟁이가 표현하는 세상이 여러분의 눈에 많이 부족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시간들여 읽어주시고, 소중히 남겨주시는 의견 한마디한마디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족으로 이번 사건으로 인해 쥬다스(이그레트)가 좀 달라질 예정입니다. 지금까지는 이런들어떠하고 저런들어떠하리~ 주의였던 주인공이지만, 착실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등 응원과 사랑에 감사드리며,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꾸벅)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