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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통과의례
‘설마, 그 밑에는 호수가 있었다. 튀어나온 암석 따위에 부딪히지만 않았다면……!’
우르릉!
막 마지막 계단을 딛고 내려가려던 에단이 휘청하며 벽을 짚었다.
갑작스레 지진이라도 일어나는 듯 땅이 울렸기 때문이다. 크게 들썩이던 땅은 이내 잠잠해졌지만 여전히 작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에단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곧장 호숫가로 뛰쳐나갔다.
휘이이잉.
바깥 상황도 좋은 편이 아니었다. 마치 태풍이라도 온 듯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그의 머리며 옷자락 등이 거칠게 펄럭였다.
에단은 즉시 이 현상이 자연적인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는 쥬다스를 따르는 정령의 힘이 분명했다.
마치 분노하기라도 하듯 거칠게 몰아치는 바람결에 날아온 나뭇가지가 그의 볼을 핏 스치고 지나갔다.
“……제길!”
땅이 울리고 바람이 휘몰아치며 그에 따라 호수의 물도 들썩이고 있었다.
그 상황에 물속으로 뛰어들기란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에단은 망설임 없이 교복 재킷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그가 철썩이는 물에 뛰어들려던 찰나, 거짓말처럼 자연현상이 뚝 멈췄다.
“……?”
정령의 힘이 발현을 멈추었을 때는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하나는 정령술사가 직접 그 힘을 멈췄을 때이고, 다른 하나는 술사가 숨을 거뒀을 때였다.
에단의 안색이 급격히 굳어졌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세상에, 방금 봤어? 분명 백로황자가 저 창문에서…….”
“비켜 주십시오, 신고를 받고 왔습니다! 여기 학생 간 폭력 사건이 발생했다고……!”
그의 뒤로 웅성거리며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학원 경비대와 교사들, 그리고 근처를 지나다 뜬금없는 자연 재해에 몸을 숨기고 있던 학생들이었다.
상황은 비로소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
끝없이, 끝없이 가라앉는다.
차갑던 물살은 밑바닥으로 가라앉을수록 점차 평온함을 가져다주었다.
쥬다스는 보글보글 떠오르는 기포 소리가 마치 어린애들 웃음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결국 또 내 손으로…….’
허탈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같은 결론뿐이었다.
최대한 피하고자 애쓴 보람도 없이 인간관계란 머리로 계산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의 마음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그랬다.
달리 살겠다고 결심했었다. 언제까지가 될진 몰라도, 이 ‘쥬다스’란 아이의 몸으로 살아가는 이상 다른 삶을 산다면 좋겠거니 여겼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이전의 삶이나 지금의 삶에서나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 있었다.
그는 이를 가지치기 내지는 ‘타작’에 비유하여 불렀다.
나무를 잘 자라게 하려면 해가 되거나 불필요한 가지는 잘라내 버리는 게 좋다.
또 알곡을 걷는 타작을 할 때 속이 빈 쭉정이는 걸러내어야 한다.
이 과정 없이는 나무도 곡식도 무엇 하나 제대로 관리할 수 없게 된다.
인간관계도 이와 같아서, 모든 사람을 전부 이해하고 포용하며 살아갈 수만은 없었다.
살다 보면 비뚤게 자란 가지나 쭉정이처럼 걸러내야 할 관계도 생기는 법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은 그 본인이 홀로 원한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때로는 자르고자 한 가지가 날카롭게 살을 후벼 팔 때도 있기 때문이었다.
「…….」
파아앗-
물속에서 가장 공명이 쉬운 존재는 당연히 물의 정령이었다. 그의 부름을 느낀 정령은 단숨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두 정령왕과 달리, 발끝에 지느러미가 달린 푸른 늑대의 형상을 띤 물의 정령왕은 쥬다스의 볼에 제 주둥이를 살며시 비볐다.
「……기다렸다.」
이그레트, 네가 불러주기만을.
굳이 소리 내어 말하지 않더라도 정령의 마음은 똑똑히 전달되어 왔다.
부드럽게 쥬다스와 그가 놓지 않고 있는 크리스티나를 감싸 안은 정령이 훅 그들을 수면 위로 끌고 올라왔다.
촤악!
봄기운을 머금어 차가운 물줄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이 물 위로 모습을 드러내자 구조 작업을 준비하던 사람들이 놀라 탄성을 내질렀다.
‘따뜻한 바람…….’
크리스티나는 제 볼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흐린 눈을 깜빡였다.
푹 젖은 교복 자락을 타고 물기가 뚝뚝 떨어졌다. 어쩐지 발밑이 서늘했다.
크리스티나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인 후에야, 자신이 물 위, 그것도 물에는 발조차 닿지 않는 허공에 떠 있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의 곁에서 단단히 손을 잡아주고 있는 쥬다스의 얼굴을 확인하자 놀람보단 안심이 찾아왔다.
황조의 적통을 상징하는 은빛 머리카락이 저녁 달빛을 받아 환히 빛을 발했다.
쥬다스가 고개를 들자 창백한 볼을 따라 눈물처럼 물방울이 주륵 흘러내렸다.
“…….”
스륵 내려다보는 금안을 마주한 자는 그가 다루는 힘과 위압감에 눌려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몰려들었던 앞줄부터 시작해서 점차 호수 주변을 에워싼 모든 이가 그를 향해 무릎을 꿇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가장 앞에서 그를 마주한 에단은 무릎을 꿇은 채 탄성 같은 침음을 흘렸다.
‘……이건, 단순히 자질 정도가 아니다. 자연의 2속성을 동시에 다루며 저리도 완벽한 제왕의 상징이라니.’
그 자리의 모두가 최악의 상황에서도 멀쩡히 살아남은 황자를 향해 경의를 표했다.
황자의 곁에는 흐릿하게 제 형체를 드러낸 푸른 늑대의 형상, 물의 정령이 함께인 채였다.
쥬다스는 차분히 크리스티나를 데리고 지상에 착지했다. 발을 딛자마자 어지럼증이 몰려왔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정황을 묻기 위해 다가온 에단과 경비대를 향해 곧장 입을 열었다.
“펠리엇 앨런, 리즈 마르셀, 닐 넥시스, 크레비 아놀드, 랠리 덴. 이 다섯은 나 쥬다스 E.루바르잔 아르키디온을 루바르잔의 후예로 인정하지 않음을 밝혔다. 그로써 고의적으로 해하고자 하였으며, 그 과정에 여기 크리스티나 델피아를 휘말려들게 한 바.”
이것은 단순히 루바흐 학생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쥐죽은 듯 학원생활을 하던 쥬다스가 처음으로 제 위치를 드러내놓고 죄인들을 호명하는 순간이었다.
후우웅.
그들의 눈앞에 녹색 기운을 띤 바람이 원을 그리며 일었다.
흡사 회오리를 연상시키는 바람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 어리둥절한 표정의 다섯 학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의 정령술사만이 사용 가능하다는 ‘바람의 소환’이었다.
멍하니 주저앉아 두리번거리다 쥬다스를 올려다본 펠리엇이 경악했다.
“포박하여 재판소로 끌고 가 이에 마땅한 처분을 받게 하라.”
“……황자 전하의 명을 받듭니다.”
“자, 잠시, 잠시만요!”
바람에 정령에 의해 강제로 소환된 다섯은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위기감을 느꼈는지 손을 휘저으며 일어섰다.
사태를 지켜보던 수많은 학생의 눈이 그들에게로 향했다.
“그, 그러려고 한 게 아니라.”
“우린 그저…….”
어째선지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다섯 가해자는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는 군중의 눈이 익숙한 감정을 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혐오, 그리고 무시.
그들이 늘 황자를 바라보던 바로 그 눈이었다.
더 이상 어떤 말을 꺼내도 그들은 혐오스러운 눈빛에서부터 벗어날 수 없을 테였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펠리엇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저, 장…… 난으로.”
탁!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경비대들이 다가와 그들의 팔을 붙들어 포박했다.
얼빠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펠리엇을 향해 쥬다스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장난이라 하였느냐.”
“……!”
“하면 그 장난에 얼마만큼의 무게가 실려 있었는지를 네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면 되겠구나. 이제 더 이상 학교라는 울타리도 너희를 죄로부터 지켜주진 않을 터이니.”
재판소는 학교 안에 있는 시설이 아니다.
그야말로 자신의 이름을, 가문을 걸고 그 죄를 판결받는 엄중한 장소였다.
여기에 학생이라는 신분이 어느 정도 감형을 시켜주긴 할 테지만, 지금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죄가 드러날 경우엔 얘기가 달라졌다.
쥬다스가 굳이 물에 빠진 것도 이를 드러내기 위한 증거 중 하나였다.
“바이칼 B.드레이크, 증언하겠습니다.”
“……에단 R.헤이가, 증언하겠습니다.”
두 소년이 증인으로 나섰다. 그것만으로도 빼도 박도 못할 지경이었는데, 웅성거리던 군중 틈에서 하나 둘씩 손을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저들이 빈 교사(校舍)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두 분이 창문에서 떨어지는 걸 보았습니다.”
“저도 목격하였습니다.”
아무리 루바흐에 재학 중이던 미성년 귀족 자제라 한들, 황자의 목숨을 건드린 이상 처벌을 피해갈 수 없었다.
단순히 퇴학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판결 여하에 따라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사안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다섯 학생들은 사색이 되어 부정하기 시작했다.
“그,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린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진짜예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도 여전히 결백을 주정하는 학생들을 물끄러미 바라봐준 쥬다스는 그저 묵묵히 그들이 끌려가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어린 날의 혈기가 가져온 결과치고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처분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쥬다스는 그들을 처벌하는 데에 있어 전혀 개의치 않았다.
차라리 죄질이 얕은 단계에서 진정어린 사과를 표했더라면 무난히 넘어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쥬다스는 충분히 기회를 주었다. 그 기회를 그들 스스로 걷어찬 셈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이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쥬다스는 ‘황자’였다. 끊임없이 시시비비에 휘말릴 것이며, 그를 짓누르려는 자들과 깎아내리려는 자, 혹은 조종하려는 자들 사이에 자의든 타의든 간에 뒤섞이게 될 신분이었다.
‘군주의 길.’
결코 가고 싶지 않은 길이었다.
다스리는 자는 반드시 손에 피를 묻히게 되어 있다. 많은 것을 가진다는 건 즉 그만큼 많은 것을 짓밟아야 한다는 말과도 상통했다.
황조의 적통을 품고 태어난 제1황자인 만큼 둘 중 하나는 선택하게 되어 있었다.
자신이 짓밟히고 숨을 죽일 것인가, 타인을 짓밟고 살아남을 것인가.
가만히 선 채 땅을 내려다보던 쥬다스의 몸이 순간 허물어졌다.
“……쥬다스 님!”
“……!”
가장 곁에 있던 크리스티나가 쓰러지는 그를 받아 안았다.
도저히 또래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작디작은 몸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술사가 정신을 잃음과 동시에 곁을 지키던 푸른 늑대 형상의 정령도 함께 이슬로 화해 사라져 버렸다.
은은하게 주변을 감돌던 녹색의 바람 역시 후욱 움직임을 멈추었고, 무서울 정도의 고요가 호숫가를 감돌았다.
물과 바람, 듀얼 속성의 정령을 수족처럼 다루며 처음으로 자신의 지위를 사용해 죄인을 처벌함에 이어 더 이상 숨지 않고 황족으로서의 위엄을 드러낸 그날.
죽은 듯 잘 빚어진 인형처럼 당하기만 하던 그가 숨겨 놓았던 발톱을 꺼내든 순간.
이는 바로,
루바흐의 그 누구도 백로황자를 무시하지 못하게 된 시작점이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4장 소제목은 '유명세'입니다. 이번 장을 통해 쥬다스(이그레트)의 작은 변화가 잘 전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애정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