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30화 (3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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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유명세

쥬다스는 그로부터 이틀을 꼬박 앓아누웠다.

가뜩이나 몸이 약한 그가 물에 빠지기도 했고, 또 날뛰려는 정령들을 제어하느라 상당한 정신 에너지를 소모한 데다, 그가 다루는 세 번째 정령왕인 ‘루니’를 불러내기까지 했기 때문에 그 충격을 전부 견뎌내지 못한 탓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푸른 늑대의 날카로운 두 눈이었다.

머리맡에 앉아 그가 깨어나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린 정령은 시선이 마주치자 콧김을 푸륵 뿜어냈다.

그 바람에 이마를 훤히 드러낸 쥬다스는 멍한 눈으로 정령을 응시하다, 이내 부드럽게 빙긋 미소 지었다.

“……부름에 응해 주어 고맙다, 루니.”

감사 인사를 들은 루니가 그럴 필요 없다는 의미를 담아 볼에 콧등을 비볐다.

겉보기엔 커다란 맹수가 어린아이에게 애교를 부리는 듯한 모양새가 연출되었다.

쓰다듬어주는 손길에 가만히 머리를 내맡긴 루니를 본 다른 정령들이 그 주변으로 몰려들어 쫑알거렸다.

「남 말할 처진 아니지만, 루니는 정말 이그레트 앞에선 양순한 개 같다니까? 우리한텐 가차 없으면서. 완전 이중인격이야, 이중인격!」

「무슨 소리다요? 그건 유니가 훨씬 더…… 우에에에!」

유니에게 볼을 잡혀 바동거리는 토니를 보며 쥬다스는 못 말린다는 듯 허허 웃었다.

웃음 끝에 이어지는 작은 기침 소리에 정령들이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

치료사가 경고했었던 대로 그의 몸은 상당히 위태로운 상태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가벼운 몸살이나 피로감 따위로 끝날 일에도 열이 끓어올라 움직이기도 힘든 통증이 전신에 찾아왔다.

포로록 그의 이마로 날아가 앉은 유니가 땀방울을 식혀주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그레트, 많이 아파?」

“……괜찮단다. 하나 이대로는 곤란하겠지.”

「응, 그렇다면 역시.」

「루니에게 맡겨보는 거다요?」

두 정령의 시선이 고요히 쥬다스를 내려다보고 있던 푸른 늑대에게로 향했다.

미동도 없이 앉아 있던 루니는 사뿐히 몸을 일으켰다. 그 움직임에 따라 반짝이는 물거품들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마치 물속에서 움직이듯 물거품을 일으키며 주변을 한 바퀴 돈 루니를 향해 쥬다스가 작은 손을 내밀었다.

“도와주겠느냐?”

「네가 바라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스르륵-

물의 정령이 힘을 개방하자 방 안이 온통 물에 뒤덮이듯 푸른색 기류에 휩싸였다.

실제 물은 아니었기에 젖거나 숨 쉬는 데에 지장이 생기지는 않았다.

물은 인간과 가장 친숙한 요소다. 물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에너지 파장이라면 인간의 정신 그 기저에 깔린 부분까지도 들여다보는 게 가능했다.

「……이그레트.」

툭.

내밀었던 손이 폭신한 이불 위로 추락했다.

그는 언제 눈을 떴었냐는 듯 깊이 잠들어 있었다. 창백한 얼굴 위로 흐른 식은땀만이 조금 전과 같았다.

정령들마저 자취를 감춘 방 안에는 소년의 가느다란 숨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금 고요가 찾아왔다.

한편, 루바흐는 온통 1황자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결석을 하였다 해도 그 누구도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없는 자리에서는 더더욱 소문이 잘 퍼지게 마련이었다.

소위 ‘황자 살해 미수 사건’으로 불리는 지난 사태는 루바흐 학원을 완전히 뒤흔들었다.

간 크게도 황자를 직접적으로 노렸다는 점에서도 충격을 받았지만, 대부분의 학생은 그 ‘백로황자’가 보여주었다는 이능에 대해서 가장 격렬히 반응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중간고사 성적을 전 과목 100점으로 기록한 백로황자가, 심지어 자연계 물과 바람 듀얼 속성의 정령을 수족처럼 부렸다는 이야기는 단순한 충격 그 이상이었다.

평범한 학생이 이능을 보인 것과는 달랐다. 그는 황자였고, 더군다나 반푼이 황자로 유명했던 한심한 존재였다.

지금까지의 오명을 비웃기라도 하듯 단숨에 씻어낼 능력이 밝혀졌다는 사실은, 즉 백로황자가 일부러 이를 숨기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무엇 때문에?’

학생들은 한 차례 큰 혼란에 빠졌다. 자신들이 그를 홀대하는 사이, 그는 자신들을 평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생겨났다.

백로황자는 더 이상 무리에서 동떨어진 모자란 백로가 아니었다.

황조의 적통을 상징하는 은빛 머리카락을 고고히 드러낸 채 숨겨 놓았던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이젠 그가 황태자 자리에 가장 근접한 위치에 섰다는 뜻이었다.

아직 미성년인 루바흐 학생들이었지만, 그 의미를 알게 된 이상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학생들은 황자가 자리로 복귀하기를 고대하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그에게 잘 보여야 한다.’

‘한살이라도 어릴 때 줄을 잘 서야 해.’

‘잘만 이용한다면…… 제국을 발아래 둘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소 깨끗하지만은 않은 바람과 함께.

물의 정령왕인 루니의 힘에 의해 깊은 수면 상태에 빠졌던 쥬다스는 그 상태로 하루가 지나고서야 다시 깨어났다.

눈을 떴을 때는 열도 가라앉고 고통에 삐걱대던 육신도 가볍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한결 나아진 몸 상태를 느끼고 일어나 앉은 쥬다스에게로 정령들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그레트, 괜찮아?」

「안 아프다요? 움직여도 된다요?」

「…….」

자신에게로 몰려든 정령을 고루 어루만져 준 쥬다스가 마지막으로 루니에게 시선을 주었다.

4속성 정령왕 중 가장 의젓한 성격인 루니는 평소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작은 어린아이 모습을 띠고 있는 유니, 토니와 달리 네 발 달린 짐승의 형태를 취한 것만 봐도 루니의 유별난 성향이 짐작 가능했다.

쥬다스의 시선을 받은 루니는 천천히 필요한 설명을 시작했다.

「그 몸에 쌓여 있던 기억을 수색하던 중 문제가 하나 발견되었다.」

“흐음, 문제라…….”

쥬다스는 턱을 짚으며 루니가 한 말을 되풀이했다.

정령왕, 그중에서도 특히 물의 정령왕 루니에게 있어 ‘문제’라 부를 만한 상황은 흔치 않았다.

루니는 제게 맡겨진 모든 일을 단순 명료하게 해결하길 즐겼고 그 과정에 오류가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 만큼 루니가 문제가 있다고 말했을 시엔 웬만해선 해결이 어려울 정도의 난관이란 뜻으로 해석이 가능했다.

「이그레트, 인간의 정신은 빙산에 비유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겠지. 표면이 드러난 의식과 물에 맞닿은 전의식, 그리고 물 아래로 가라앉은 방대한 무의식. 수면 위로 드러난 빙산의 상층은 살펴보았으나 아무런 특이점이 발견되지 않았다. 전의식도 마찬가지, 다른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

「하지만 정작 깊은 내면의 무의식은 막혀 있다. 다시 말해, 읽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며 들리지 않아.」

푸른 늑대의 눈이 찌르듯 쥬다스를 향했다.

「마치 이그레트, 너처럼.」

의외의 설명에 쥬다스는 눈을 깜빡였다.

본래 ‘이그레트’는 특이 케이스였다. 정령의 힘을 제어하고 활용하는 힘은 정신에 달려 있다.

자연의 4속성 정령왕을 전부 다루기란 평범한 인간이 가진 정신력만을 가지고서는 절대 불가능했다.

그의 정신 체계는 인간이라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고 복잡하게 구축되어 있었으며 루니가 관여하지 못하는 유일한 대상이었다.

그런데 ‘쥬다스’도 역시 그러한 정신 체계를 가지고 있었단 소리였다.

단순히 육신에 깃든 기억만을 조사하는 데에도 차질이 생길 정도였다.

그는 난감한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허어, 이거 참. 여러 모로 나와 닮은 구석이 많은 아이로구나.”

「……그리고 한 가지 더.」

“음?”

루니가 느릿하게 덧붙였다.

「그 몸의 ‘성장’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야말로 예기치 못했던 발언이었다.

하지만 물의 정령왕인 그의 말이라면 그 어떤 치료사보다 정확한 진단일 터였다.

쥬다스는 묘한 눈으로 제 손을 펴보았다. 여전히 어린아이같이 작고 여린 손이었다.

“그건 언제부터?”

「네가 그 몸에서 눈을 뜬 직후부터다.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오려면 멀었지만 조금씩 제 기능을 찾기 시작했다.」

그의 금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쩌면, 그가 1황자의 몸에서 눈을 뜬 것은 단순한 우연이나 운에 의한 결과가 아닐지도 몰랐다.

출신은 다를지언정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어 있던 상황이며, 유독 흡사한 정신 체계, 그리고 자신이 들어옴과 동시에 제 기능을 찾기 시작한 육신.

지금까지완 전혀 다른 새로운 가설들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설마…….”

낮게 중얼거리는 순간, 누군가 방문을 똑똑 두들겼다.

쥬다스가 대답하지 않자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고 판단한 방문객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한 발짝 들어선 이는 일어나 앉아 있는 쥬다스와 눈이 마주치곤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보였다.

“아, 일어나 계셨습니까? 치료사 ‘웨일’입니다. 상태는 좀 어떠십니까?”

“으음, 제법 평안합니다.”

“그러십니까?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치료사는 열을 재고, 동공을 살피는 등 간단한 진료를 마친 후 안심하며 물러섰다.

“참, 그리고 이것을.”

건네받은 봉투에는 황실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치료사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후 방을 나서자 쥬다스는 들고 있던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의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은 유니가 다리를 꼬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뭐야, 그거 루바르잔 황실에서 보낸 거네? 하여간 인간들이란 이용할 만한 거리가 보이기 시작하면 가만 놔두질 않지.」

“이런, 유니. 꼭 그런 의도만은 아닐 거란다. 어찌 되었든 이 아해는 제국을 다스리는 지도자의 혈족이니. 눈에 보이는 성과가 생긴다면 응당 확인하고자 함이 옳을 터.”

「……하지만 이그레트, 너는.」

말로 표현하진 않았더라도 그동안 쥬다스는 명백히 눈에 띄는 자리에 서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그는 곤란한 듯 한숨을 뱉으며 서신을 도로 봉투에 갈무리했다.

“당장 출발하란 얘긴 없었으니 조금 더 생각을 정리한 후에 움직이는 편이 좋겠지. 그리고…….”

잠시 감았다 뜬 금색 눈동자가 부드러운 힘을 담고 빛났다.

“좋든 싫든 부딪혀야 할 문제라면, 도망치기만 해서야 어느 무엇 하나 해결되는 게 없지 않겠누.”

결석한지 나흘째 되는 날, 드디어 쥬다스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교복을 챙겨 입었다.

여전히 품이 넉넉한 셔츠와 자켓 매무새를 단정히 정리한 후 밖으로 나오자 완숙한 봄 햇살이 내리쬐었다. 이젠 완전히 봄기운이 무르익어 아침공기마저도 따뜻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에단과 마주칠 수 있었다. 머무는 숙소가 가까운데다 같은 수업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그들은 최근 이렇게 자연스럽게 중간에 만나서 함께 이동하곤 했었다.

쥬다스가 수업을 빠진지 3일이나 지났음에도 같은 자리에서 묵묵히 기다리고 있던 에단은 그를 발견하고 작게 목례해보였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아주 건강하단다. 고맙구나, 에단.”

“…….”

에단은 조심스레 황자의 안색을 살폈다.

워낙 허약한 탓에 혈색이 돌지 않아 창백하긴 했으나 본인이 말한 대로 아주 편안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동안 지켜봐온 바 상태가 나쁜 편이 아님을 알아차린 에단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그 곁에 서서 함께 걸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오전 수업을 신청하여 그에 따라 이동하는 학생들은 상당히 많았다. 쥬다스의 발길이 향하는 곳마다 시선이 따갑게 몰려들었다.

예전에는 아예 눈길을 주지 않거나, 쳐다본다 해도 무시와 경멸이 담겨있기 일쑤였다. 그러나 지금 쏟아지는 시선은 그와는 정반대의 성향을 띄고 있었다. 놀라움, 호기심, 그리고 경애와 감탄을 담은 온갖 관심과 호의적인 눈길이 바늘에 꿰인 실처럼 따라붙었다.

쥬다스는 그 시선을 알아도 모른 척 평소처럼 움직였다. 느린 보폭으로 걸었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착실히 교실로 향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아, 궁금해하시던 불의 정령왕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요.ㅎ

사실 제가 기억하던 '판타지 소설연재'는, 드림워커나 모기 시절입니다. 당시엔 이북이나 유료연재 등이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쓰시는 분들은 즐겁게 쓰셨고, 저는 즐겁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글을 읽으면서 독자들과 함께 소통하는 작가님들이 참 멋지고 부러웠습니다. ㅎㅎ; 그래서 언젠가 저렇게 되고 싶다 란 생각을 늘 했었고... 지금이 그 결과인 듯 싶네요. 당시 작가님들과 비할 바는 못되지만 정말 즐겁습니다!

독자님들과의 소통이란 게 제 소소한 욕심이라면 욕심이었는데 흔쾌히 응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ㅠㅠ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사랑과 응원에 늘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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