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31화 (3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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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유명세

“……!”

그가 교실에 들어서자 길거리에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명백한 관심이 쏠렸다.

미리 와서 담소를 나누다 쥬다스를 본 학생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제히 침묵했고, 그가 자리로 가 앉을 때까지 죽 쳐다보았다.

평소처럼 자신의 옆에 와 앉는 백로황자를 힐끗 쳐다본 바이칼은 말을 걸어야 할지 가만있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 사건’ 이후로 모든 수업을 병결했던 황자이기에 안부가 궁금하긴 했으나, 어쩐지 자연스럽게 말을 걸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지금은 모든 학생의 관심이 집중된 상태였다.

괜히 줄을 서기 위해 일부러 말을 붙이는 꼴이 되는 기분이라 바이칼은 이도저도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그의 귀에 여느 때처럼 따뜻한 음성이 들려왔다.

“좋은 아침이구나, 바이칼.”

“……예?”

저도 모르게 바보 같은 얼굴로 돌아본 바이칼은 쥬다스와 시선을 마주치고 눈을 껌뻑거렸다.

“그간 수업은 잘 들었느냐.”

“……어? 아, 네. 뭐, 그야…….”

“제법 성실한 성미로구만. 껄껄.”

기분 좋게 웃는 쥬다스를 멍하니 쳐다본 바이칼은 민망함에 고개를 숙여 책상을 쳐다보았다.

고급스러운 원목 재질의 물결 따위를 세고 있던 바이칼은 뒤이어 들려오는 말에 어깨를 움찔했다.

“네가 이번 일에 도움을 주었다지.”

“아뇨, 별로 뭘 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제일 먼저 상황을 눈치채고 경비대에 신고를 하였다 하더구나. 에단에게 상황을 알려준 것도 역시, 게다가 재판소에서 증언을 해주었다고도.”

“그건.”

바이칼은 어쩐지 점점 더 민망해져 머리를 벅벅 긁었다.

“하아, 거기서 더 루바흐의 긍지를 더럽힐 수 없잖습니까. 솔직히 그놈들이 뭔가 일을 치겠거니 생각은 했는데, 제대로 막지 못한 제 잘못도 있죠. 그 점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깔끔한 사과였다. 아직 어린 나이인 만큼 진솔하고, 또 자신이 옳다 생각한 대로 행하는 올곧음이 있었다.

때로는 그것이 아집이 되어 부적절한 행동을 이끌어내기도 했지만, 적어도 그는 주관이 늘 뚜렷한 자였다.

그간 마주친 바로 바이칼의 성미를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있던 쥬다스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어찌 되었든 네가 내게 큰 도움이 되었던 것만은 사실이지 않느냐. 고맙다, 바이칼. 인사가 늦어져 미안하구나.”

바이칼은 순간 뭐라 답할지 할 말을 잃었다.

따지고 보면 그 역시도 황자를 무시했던 이들 중 하나였다. 아니, 오히려 그 진솔한 성미 탓에 대놓고 그를 폄하하거나 비웃은 적도 많았다.

그가 조금씩 빛을 발하기 시작할 때에서야 걸맞은 대우를 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자신의 태도를 익히 잘 알고 있는 바이칼로서는 쥬다스의 감사 인사를 마냥 달게 받을 수만은 없었다.

이번 사건처럼 결정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자신 역시도 백로황자를 고립시키고 무시했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바이칼이 망설이다 무어라 답하려는 찰나, 누군가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쥬다스 님.”

정확히는 쥬다스에게만 관심이 있는 태도였다.

제국에서 흔한 노란 머리에 시원스레 큰 키, 그리고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진 소년은 쥬다스가 멀거니 쳐다보자 싱긋 웃어보였다.

“제 이름은 ‘마르젠’이라 합니다. 어디,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마르젠 하쉬, 16세. 하쉬 백작가의 차남이래. 평소 높은 작위의 가문자제들과 주로 어울려 다닌다나 봐. 선한 인상과는 달리 권력에 대한 야욕이 높은 인간이야.」

쥬다스의 어깨에 앉아 있던 유니가 다리를 흔들거리며 브리핑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여전히 싱글거리고 있는 마르젠을 물끄러미 쳐다본 쥬다스는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냐, 그리 걱정할 만한 정도는 아니란다.”

“아, 실은 저도 당시 쥬다스 님과 크리스티나 님이 함께 호수에 빠지시는 걸 목격해서 경비대에 증언했었습니다. 갑자기 쓰러지셔서 많이 걱정되었었는데 말이지요…….”

마르젠은 정말로 걱정된다는 듯 쥬다스를 다시금 훑어본 후 미소와 함께 말을 맺었다.

“이리 무사하시니 다행입니다.”

“…….”

쥬다스는 답하지 않은 채 그를 쳐다보았다.

표정은 여전히 부드러웠으나 속을 읽을 수 없는 금안이 마르젠을 가만히 향하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한 마르젠은 웃는 표정 너머로 식은땀을 흘렸다.

‘……과연 이제껏 완벽하게 발톱을 숨기고 있던 황자답군. 쉽지 않겠는데, 이거?’

단순히 자연계 정령을 다루는 힘만이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감추고 상대의 역량을 파악하는 지략 또한 범상치 않음이 틀림없었다.

높은 작위의 인물들을 주로 상대하고 다니던 마르젠의 눈으로 보기에 이 백로황자는 거물 중에서도 상당한 거물이었다.

이대로 자라난다면 분명 황태자 자리는 물론이고 제왕으로 군림할 것이 틀림없었다.

마르젠은 속으로 쯧 혀를 찼다.

너무 큰 그릇은 곤란하다. 적당히 허점이 있어줘야 그를 쥐고 흔들기 편했다.

그나마 파고들 틈이 있다면 바로 황자의 나이였다.

아직 12살, 아무리 성숙하고 뛰어나다 한들 생각이 다 여물기엔 어린 나이였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들이 각자의 상념에 빠진 사이 교사가 들어왔다. 마르젠은 황자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제 위치로 돌아갔다.

수업이 시작되어서도 이목은 쥬다스에게 집중되었다.

학생들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교사의 경우 다른 의미로 그를 주시했다. 본래 루바흐의 모든 교사는 1황자인 그를 암암리에 지켜보고 있었다.

루바흐 학원은 루바르잔 제국에서 설립한 최고의 인재양성 학교, 당연히 지도자의 혈통인 그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대놓고 티내진 않더라도 늘 황자의 지지부진한 행태를 아쉬워하던 교사들은 복합적인 마음으로 현 상황을 주시했다.

황자가 드디어 재능을 드러내고 훌륭히 날개를 펼친 것까진 좋았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껏 그가 보여준 모든 것이 거짓일 리는 없다’는 불안에 있었다.

이능과 뛰어난 지력을 감춘 것까지는 분명 대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황자는 12세가 된 오늘날까지 그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았고 세력을 키우지 못했다.

그랬던 그가 불나방처럼 몰려들 인파 속에서 과연 제대로 된 판단으로 세력을 키우고, 또 그들을 포용하여 군림할 수 있을지가 불안 요소였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그간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던 1황자는 인간관계에 유달리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능력 여하를 떠나, 영악한 귀족 아이들에게 구슬려져 꼭두각시처럼 내세워지진 않을지에 대해 루바흐의 교사들은 내심 걱정했다.

그 걱정대로, 수업이 종료되자 학생들은 작정하고 우르르 황자에게로 몰려갔다.

“그…….”

“안녕하세요, 쥬다스 님!”

“다루신다던 정령은 물과 바람 두 종류가 맞나요? 그때 정말 굉장했다던데!”

옆자리에 있던 쥬다스를 돌아보며 아까 하지 못한 말을 건네려던 바이칼은 인파에 가로막혀 그대로 묻혀버렸다.

순식간에 주변을 에워싼 학생들에게 밀려 뒤로 물러선 바이칼은 어색하게 뒷목을 긁적였다.

“……하, 빌어먹을. 이젠 사과도 마음대로 못하겠네.”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쥬다스는 여기저기서 걸어오는 말에 한마디도 대응하지 않았다.

표정은 부드럽기 그지없었으나 누구에게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에 학생들은 점점 애가 타기 시작했다.

그동안 무시하고 조롱의 대상이었던 황자에게, 서로 먼저 관심을 받고자 경쟁하는 모순적인 사태를 보고 끼어들지 않고 남아 흥미로운 눈으로 구경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던 순간 쥬다스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만.”

뚝-

짧은 한마디에 시장 통처럼 시끄럽던 교실이 정적으로 뒤덮였다.

스스로들 입을 닫아놓고도 무서울 정도로 잘 지켜진 침묵에 학생들은 흠칫 놀라 쥬다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책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러다 다음 수업에 늦겠구나. 혹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수업이 모두 끝나고 나서 찾아오거라. 내 느긋하게 들어줄 터이니.”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둘러싸고 있던 학생 무리가 주르륵 갈라졌다.

분명 부드러운 말투였으나 거역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었다.

자연스레 그들을 스쳐 지나간 쥬다스는 그대로 교실을 나섰다.

에단은 쥬다스의 뒤를 따라 걸으며 그 속내를 짐작하려 노력했다.

‘아무리 총명한 분이라 한들 저 많은 인원이 갑자기 태도를 뒤바꾸는 모습에 환멸이 드실 테지. ……답답하시겠군.’

자신이 보기에도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인데, 그 당사자는 오죽하겠느냔 생각이었다.

에단은 염려 섞인 눈으로 아무 말 없이 뒤를 쫓았다.

위로하는 법도 잘 모를뿐더러, 경험상 차라리 이럴 때엔 혼자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때 쥬다스가 고개를 살짝 돌려 그를 돌아보았다.

“고민이라도 있는가? 표정이 영 아니구만.”

“……제 표정이?”

에단은 얼떨결에 손을 들어 제 얼굴을 쓸어 보았다.

늘 표정 변화가 없어 무뚝뚝하다는 평을 주로 듣곤 하던 그였다.

지금도 그다지 표정에 이렇다 할 티가 난 것은 아니다.

에단은 자신을 여과 없이 꿰뚫어 보는 듯한 맑은 금안에 졌다는 듯 한숨을 삼켰다.

오히려 정작 염려되던 황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굳건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빙긋 웃는 입매를 확인하고 나서야 에단은 자신이 헛된 염려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지, 이분은.’

쥬다스가 가진 강함은 특별을 넘어 특이하기까지 했다.

남들의 반응을 보고 흔들릴 이였다면 진즉에 무너지고도 남았다.

에단은 그의 강함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깝게 여겼다.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무덤덤하다는 건, 어쩌면 기본적으로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았다.

어떤 반응이 돌아와도 신경 쓰지 않는다.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없다.

그 말은, 저 백로황자에게 누구도 기대할 만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가 놓인 자리가 그랬기에 누군가를 탓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 해도, 이는 마치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성인을 보는 기분이었다.

지금도 애초에 학생들이 태도를 뒤바꿀 것이라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태평하기만 했다.

정말이지 이제 겨우 12살 소년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흐음?”

“이는, 학우가 아닌 황자 전하께 드리고자 하는 질문입니다.”

루바흐의 교복을 입고 있는 두 사람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학생 신분으로 서로를 볼 수 없었다.

에단은 요청함과 동시에 정자세로 멈춰 서서 쥬다스를 바라보았다.

쥬다스 역시 걸음을 멈춘 채 돌아섰다.

맑은 금안을 마주한 에단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그에게 예를 표했다.

“전하께오선, 어떤 군주가 되고자 하십니까.”

“……군주라.”

애초에 다른 선택지는 염두에 두지도 않는 질문이었다.

그 말을 한번 따라 읊조린 쥬다스는 쓰게 웃었다.

에단이 잘못된 게 아니었다.

쥬다스는 1황자였고 제국의 3황자 중 유일하게 황조를 상징하는 적통을 타고난 존재였다.

단순히 스스로 손을 젓는다 해서 내려놓을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완결까지의 횟수는 정확히 장담드리기가 어렵습니다. ㅠㅠ;

확실한 건 장편연재가 될 계획이란 것 뿐...

아참, 어디선가 우연히 일일연재가 오히려 독자입장에선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혹 '이그레트'의 독자님들은 어떠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이대로 일일연재를 지속하는 편이 좋으신지,

아니면 요일을 정해 주3회 정도로 고정하여 연재하는 편이 좋으신지...ㅎㅎ

사실 저는 한편당 분량이 짧은(...) 편이어서 그리 부담은 아니실 것 같긴 하지만요.ㅎ;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사랑과 응원에 언제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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