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32화 (3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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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유명세

당장 그의 아비인 황제, 레위스 G. 역시 그를 후계로 세우길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능력을 보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서신을 보내오는 것만 봐도 그랬다.

반면 그가 황태자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무리는 여전히 많았다.

루바흐 학원 내에서의 수군거림 수준이 아니었다.

귀족 사회에서는 이미 보이지 않는 권력 전쟁, 즉 암투가 오가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이미 가망을 잃어 싹이 노랗다고 판단된 1황자를 굳이 황제의 후계로 미는 이들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1황자와는 달리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그 능력을 인정받은 2황자나 3황자를 앞세워 권력을 쥐려는 자가 대다수였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허울뿐인 1황자는 방해였다.

뒤늦게 뛰어난 자질이 있다는 소식이 돌기 시작했지만 당장은 그에게 뱃머리를 돌릴 배짱 좋은 항해사는 없었다.

오히려 뒷받침할 세력이 없는 지금은 더욱 표적이 되기 쉬웠다.

만일 그가 황태자 자리를 포기한다손 쳐도 편안히 여생을 살기는 힘들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쥬다스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군주의 길’ 하나고, 에단은 그 뜻을 물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제국을 떠받치는 두 기둥 중 하나인 헤이가 공작 가문의 장자로서 이를 묻는다는 건 명백히 한 가지 의미를 뜻했다.

‘……검이 되어주겠다는 겐가.’

그간 에단은 곁에서 끊임없이 그가 자신의 주군이 될 만한 자인가를 살폈다. 그리고 마침내 뜻을 바로 정했다.

군신서약(君臣誓約).

주군을 모시는 신하로서 충성을 맹세하고자 함이었다.

에단은 그를 이미 인정하고 있었다.

남은 건 쥬다스의 선택뿐이었다.

강한 신뢰를 담고 마주 보아오는 검은 눈동자를 향해 쥬다스는 잠시 침묵했다.

도망치지 않겠다 결심했었다.

그러니 이 올곧고 강한 아이에게만큼은 자신의 뜻을 미리 밝혀둘 필요가 있었다.

쥬다스는 힘 있게 입을 열었다.

“나는…….”

때를 같이해, 마침 크리스티나도 이에 관해 비슷한 질문을 받고 있었다.

백로황자와 생사의 위협을 함께한 그녀야말로 학생들의 주 관심사였다.

원래부터 루바흐를 주름잡으며 따르는 이들을 거느리던 크리스티나는 며칠째 파도처럼 인파를 몰고 다녔다.

그렇다고 해도 ‘차가운 검의 여기사’라 불릴 정도로 냉랭한 성질의 그녀를 감히 시시껄렁한 이유로 붙들어 세울 만큼 배짱 있는 학생은 없었다.

제게 쏟아지는 시선을 익숙하게 흘리며 다음 수업 장소로 향하던 크리스티나의 앞을 누군가 막아섰다.

상대를 알아본 크리스티나가 서늘한 눈으로 말했다.

“비켜.”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크리스티나.”

오전 수업 시간에 쥬다스에게 호감을 드러냈던 마르젠이었다.

싱긋 지어 보이는 선량한 웃음에도 크리스티나는 한숨을 쉬었다.

“후, 여전히 기분 나쁜 웃음이군.”

“하하! 너무하시네요. 이거 미인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면 저라도 상처받습니다?”

“받든가. 농담할 기분 아니니까 빨리 비켜.”

찬바람이 쌩쌩 부는 그녀의 말에도 마르젠은 웃음기를 지우지 않았다.

짜증스레 머리를 쓸어 올린 크리스티나가 무시하고 지나가려고 하자, 슬쩍 다시 앞을 가로막았다.

신경질적으로 휙 올려다보는 크리스티나를 향해 고개를 숙인 마르젠이 작게 속삭였다.

“……황자 전하에 대해, 배팅하실 생각은?”

크리스티나의 바다색 눈동자가 가늘게 뜨여졌다. 멈칫한 그녀는 서서히 팔을 들어 올렸다.

뺨이라도 올려붙일 기세에 진땀을 흘리던 마르젠에게 그녀의 고운 손가락이 다가왔다.

“일부러 도발할 생각이라면 번지수가 틀렸군.”

“……아, 하하.”

상대의 뺨을 훑듯이 쓸어내린 그녀가 이내 어깨를 툭 밀어내며 오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따위가 쥐고 흔들 분이 아니다. 더 이상 조무래기끼리의 투쟁이나 탐색전 따윈 무의미해.”

면전에서 조무래기 취급을 받았어도 마르젠은 여전히 유들유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크리스티나가 다음 말을 내뱉는 것과 같은 시각, 에단 역시도 쥬다스로부터 질문에 대한 답을 받았다.

“군주가 될 사람은 바로.”

“나는 군주가 될 생각이.”

서두는 비슷하였다. 그러나 이내 이어지는 끝은 천지차이로 갈라졌다.

“그분이야.”

“……없단다.”

마르젠은 씨익 웃었으며, 에단은 제 귀를 의심했다.

청천벽력과 같은 선언이었다.

에단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쓰며 쥬다스를 바라보았다.

설마하니 황자가 스스로 군주에 뜻이 없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던 탓이었다.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문 에단을 향해 빙그레 웃어준 쥬다스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하나 내게 주어진 길을 외면하겠다는 뜻은 아니란다. 단지 이것이 정말 ‘나의 길’인지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을 뿐.”

아직은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물의 정령왕인 루니가 읽어내는 데에 실패한 ‘쥬다스’의 기억도 문제였다.

그는 아직 ‘이그레트’인 자신과 본래 ‘쥬다스’간에 있을 접점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이 어설픈 상태에서 수많은 사람의 위에 함부로 설 수는 없었다.

설령 그것이 1황자로서의 하나뿐인 선택지라 할지라도 그랬다.

“그러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아직 남았다. 이를 알아내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해.”

“…….”

“그게 내 솔직한 심정이로구나. 하니 질문에 대한 답은 조금 미루어도 괜찮겠느냐.”

그 말을 들은 에단의 눈이 깊은 상념을 담고 가라앉았다.

잠시 할 말을 잃고 침묵하던 에단은 이내 그 앞에 깊이 허리를 숙여보였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저 역시.”

다시 허리를 핀 에단의 얼굴에는 시원한 미소가 걸쳐 있었다.

“그때에 뜻을 따르겠습니다.”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에단은 더 이상 뜻을 묻거나 언급하지 않았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함께 수업을 듣고, 봉술 수업 페어로서 그의 수련을 도왔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더 이상 그를 관찰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쥬다스의 느린 행보에 발을 맞출 뿐이었다.

달라진 건 에단뿐이 아니었다. 도도하기 그지없던 크리스티나 역시 쥬다스와 마주칠 때면 고개를 숙여 예를 차렸다.

여태껏 한 번도 남 앞에서 고개 숙이는 모습을 보인 적 없는 그녀였던 만큼, 쥬다스는 그녀가 루바흐에서 인정하는 단 하나의 상위 존재였다.

공작가의 두 자제가 보이는 태도로 인해 안 그래도 주목받던 ‘백로황자’는 그 명성이 마른가지에 붙은 불처럼 무섭게 크기를 키워갔다.

그러나 학생들이 그 어떤 관심을 보이든 쥬다스는 초연했다.

다가오는 이들을 상대하긴 하되, 과한 접근은 적당히 물려냈다.

어떻게든 친분을 쌓고자 다가가도 부드러운 표정 너머로 명백한 선이 그어졌다.

정작 소문의 장본인이 태연자약하니 루바흐의 학생들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눈치를 살피던 한 소년이 쥬다스에게로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저기.”

소년은 모기만 한 소리로 웅얼거렸다.

쥬다스만큼은 아니어도 상당히 작고 마른 체구였다.

게다가 빛이 바랜 듯해 보이는 회색 머리카락과 흑갈색 피부를 지닌 사막 부족 출신이었다.

지금껏 접근했던 이들과는 다르게 소심할뿐더러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쥬다스는 소년의 작은 목소리에도 그를 돌아봐 주었다.

마침 봉술 수업을 가기 위해 이동하려던 참이라 에단도 함께인 채였다.

둘의 시선을 동시에 받은 소년이 황급히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그러자 쥬다스의 어깨에 앉아 있던 유니가 포로록 날아올라 소년의 주변을 뱅글 돌았다.

「아벨 투르케, 15세. 제국 남서쪽 사막 지대에서 올라온 가난한 남작 아들이래. 본래 투르케는 자유로운 사막 부족이었는데 제국에게 흡수된 거라는데? 어쨌든 계급도 낮고, 이런 귀족 사회에 어울려 본 적 없는 아이라 여기선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나 봐.」

“……전달, 해드릴 게, 있는데…….”

아벨은 말을 하는 중간중간 공백을 두었다.

긴장을 할 때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져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습관이었다.

고개도 들지 못하고 불안에 휩싸여 있던 아벨의 귓가에 따뜻한 음성이 들려왔다.

“반갑구나. 나는 쥬다스라 한단다.”

아벨은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가, 쥬다스의 금안과 시선을 마주치곤 홀린 듯 대답했다.

“……아벨, 이라고…….”

“그래, 아벨. 전달해 줄 게 있다고 하였느냐?”

끄덕끄덕.

소심하게 고개를 주억거린 아벨은 쥬다스의 부드러운 반응에 용기를 얻고 재차 입을 열었다.

“이사벨 스승님께서, 그, 정령학……. 수업에 꼭, 초청하고 싶다고.”

“정령학 수업? 으음, 그렇구나.”

학원 루바흐는 일차적으로 학생의 재능을 발굴하고 키우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여태까지 아무런 재능도 드러내 보인 적 없는 쥬다스가 비로소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이번에 선보인 이능 탓이었다.

백로황자의 명성을 높이게 된 결정적인 요소, 바로 그가 듀얼 속성의 정령을 다룬다는 점이었다.

정령술사로서의 자질은 매우 희귀하여 루바흐 내에서도 몇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자질이 있는’ 학생을 모아놓은 것이 정령학 수업이었는데 총원이 고작 8명으로, 이들은 마치 하나의 동아리처럼 뭉친 특수 클래스였다.

그들을 지도하는 교사 이사벨은 땅의 정령과 계약한 꽤나 실력 있는 술사였다.

이미 자연계 4속성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쥬다스가 굳이 수업을 들어야 할 필요는 없었으나, 그 사실을 밝힐 수 없으니 거절하기엔 곤란했다.

쥬다스는 턱을 짚으며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남은 수업을 마저 마치고 가마. 하면 어디로 가면 될꼬?”

“안내, 해드리겠습니다. 나중에, 기다렸다가.”

“허허. 그래주면 고맙겠구만. 그럼 끝나고 보자꾸나.”

“……네.”

상대가 작게나마 대답하는 것을 확인한 쥬다스는 에단과 함께 체육관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수업 준비를 위해 보관함에서 연습용 봉을 하나씩 꺼내 들었다.

이젠 제법 익숙하게 느껴지는 무게감이었다.

쥬다스는 봉을 세우고 스트레칭을 하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에단.”

“예?”

“네 보기엔 어떠한고. 요사이 체력이 제법 늘은 것 같지 않느냐?”

물으면서도 쥬다스는 내심 뿌듯해하고 있었다.

일단 나무토막처럼 뻣뻣하던 몸이 매일 스트레칭을 해준 탓에 유연하게 펴졌다.

그리고 봉을 제대로 들지도 못했던 첫날과는 달리 이젠 균형 맞춰 봉을 들고 휘두르는 것까지도 가능했다.

손바닥이 부르트긴 하지만 맞대는 대련 형식까지도 어느 정도는 진행할 수 있었다.

미약하게나마 몸이 확실히 제 기능을 찾아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

사실 에단이 보기엔 여전히 나약하기 그지없는 육신이었다.

차도가 있긴 했어도 워낙 약했기에 다른 또래에 비할 바 못되었다.

하지만 그는 차마 뿌듯해하고 있는 쥬다스에게 사실대로 말해 찬물을 끼얹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에단은 슬쩍 시선을 회피하며 대꾸했다.

“……예, 처음에 비해 분명 느셨습니다.”

“허허. 고맙구나.”

거짓은 아니었다, 일단은.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어, 여러분이 남겨주신 지난화 댓글들 보고 감동받았습니다.

사실 부담된다 하시면 페이스조절을 해볼까 생각하고 여쭈었던 건데, 그야말로 괜한 걱정이었네요. 마치 에단이 쥬다스(이그레트)를 12살이라 걱정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나봅니다...;;

독자님들 의견대로 변동없이 앞으로도 일일연재로 달려보겠습니다. ㅎㅎ

(아, 저는 지금 일일연재에 큰 부담이 없습니다. 혹 상황이 바뀌게 되면 그때 다시 조절해볼게요.)

사족으로 '이그레트'는 1부와 2부로 나누어지는 장편입니다.

1부가 학원생활을 중점으로 다룬다면, 2부는 성장 후 본격적으로 학원밖으로 나와 일어나는 일들을 다룰 예정입니다. 아직 계획뿐이므로 쓰다보면 세부사항이 조금 달라질 수는 있지만요....ㅎ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응원과 사랑에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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