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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유명세
그날 쥬다스는 최고의 컨디션으로 봉술 수업을 마쳤다.
머리로 익힌 걸 몸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점이 아쉽긴 했어도 다치거나 아픈 구석 없이 무사히 시간을 보냈다.
간만에 양호실 신세를 질 필요가 없게 된 셈이었다.
체육관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아까 정령학 교사에게 안내해 준다던 아벨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흑갈색 피부의 소년은 어디에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어딘가 가 있는 모양입니다.”
“유니.”
쥬다스가 손을 펴보이자, 그 안에 녹색 기운을 머금은 바람이 후웅 맴돌았다.
에단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바람의 정령왕 유니가 그 손바닥 위에 살포시 날아들었다.
바람의 정령을 다룬다는 사실은 더 이상 숨길 필요 없게 되었기에 당당히 힘을 사용한 것이다.
술사가 바라는 바를 느낀 유니는 곧장 정보를 읽어냈다.
「아벨이란 인간은 바로 근처에 있어. 체육관 뒤, 소각장. 그런데 좀 다쳤어. 많이는 아니고 넘어져서 까진 정도?」
“……근처에 있다는구나. 한데 문제가 좀 있는 모양이야.”
짧은 설명만으로도 상황을 짐작해 낸 쥬다스는 유니를 따라 곧장 체육관 뒤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령이란 정말 편리하군요.”
사람 찾기에도 유용한 바람의 정령술사의 이능을 두 번째로 본 에단이 그 효율성 측면에 다시금 감탄했다.
정령이란 자연계 4속마다 각각 그 활용 능력치가 달랐다.
그중 바람은 편리성에 좀 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힘이었다.
또 파괴적인 전투 능력만으로는 단연 불이었다.
각각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능력이 다르고, 또 자연계의 힘이다 보니 그 효과가 어마어마했기에 정령술사는 무슨 속성이든 간에 각국에서 모두 환영받는 입지였다.
그러니 물과 바람 2속성을 다룬다고 알려진 백로황자가 순식간에 핫이슈로 떠오른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에단이 일상에서도 편리하게 정령을 부리는 쥬다스에게 새삼 감탄하는 사이, 그들은 소각장 뒤편에 도달했다.
“흠.”
낡은 교과서나 폐지 따위가 쌓여 있었다.
소각장이라 해도 화로에 불이 들어오는 건 새벽 시간대뿐이었다.
어지럽게 널려 있는 폐지의 산을 둘러본 쥬다스가 이내 천천히 그 사이로 걸음을 떼었다.
“아벨.”
“……!”
폐지가 쌓인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소년이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놀라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거하게 넘어졌던 흔적으로 교복이 온통 흙투성이였다.
쥬다스는 아벨의 앞에 다가가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아팠겠구나. 자, 일어나련.”
멍하니 그 작은 손을 바라보던 아벨이 조심스레 이를 잡고 일어났다.
쥬다스는 말 잘 듣는 아이에게 하듯 그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리고 정령학 교사가 아닌 양호실로 먼저 그를 데려갔다.
오늘은 황자가 방문하지 않아 안심하고 있던 치료사는 한숨을 쉬며 그들을 맞이했다.
“오셨군요. 무리하시면 안 된다고 말씀을.”
“으음, 오늘은 제가 아니라 이쪽입니다.”
쥬다스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을 확인한 치료사가 고개를 끄덕이곤 약을 챙겨왔다.
아벨이 치료를 받는 사이, 리이나는 쥬다스에게 다가와 치유술을 시전했다.
다친 곳이 없더라도 워낙 기력이 약한지라 회복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쥬다스의 손을 놓은 리이나가 눈을 깜빡이며 놀란 얼굴을 했다.
“어…….”
“으음? 왜 그러는고?”
“저, 전보다 훨씬 상태가 좋아지셨어요.”
아직 10살인 리이나는 자신이 느낀 것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다 이내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원래는 멈춰 있던 몸에 치유력을 불어넣어야 했는데. 그, 그러니까아, 오늘은 아주 약간씩이지만 쥬다스 님의 몸이 이미 제 기능을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전보다 더 치유력이 잘 듣는 것 같은…….”
“……뭐?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쥬다스 님.”
아벨의 상처 치료를 마친 치료사가 리이나의 말을 듣고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진찰을 마친 치료사는 꽤 고조된 억양으로 리이나의 말에 동조를 표했다.
“정말 그렇군요! 정말 미약한 수준이긴 해도 분명 제대로 기능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금방 키도 크시겠지 말입니다?”
키가 자란다라, 쥬다스는 묘한 시선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12살 소년답지 않은 작은 손발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품이 남아 넉넉한 교복이며 한참 높이가 낮은 시야도 이젠 익숙하던 참이었다.
루니가 말했던 대로, 그의 몸은 천천히 성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것이 타인의 눈에 띄게 될 정도면 얼마나 걸리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히 제 기능을 되찾고 있었다. 쥬다스는 치료사와 리이나, 에단의 축하를 받으며 고요히 웃었다.
고개를 들자 의자에 앉아 어두운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던 아벨과 눈이 마주쳤다.
“상처는 좀 괜찮으냐?”
“……네.”
아벨은 도로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소심하다 못해 우울하기까지 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쥬다스는 더 묻지 않고 그저 가만히 기다렸다.
양호실을 나선 그들은 아벨이 안내하는 대로 정령학 교사를 만나러 이동했다.
꽤 고급스럽게 지어진 단층 건물이었는데 주변이 작은 정원으로 꾸며져 있어서 마치 학교 시설이 아닌 개인 주택처럼 보였다.
정령술과 연관이 없는 에단은 정령학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에 그 앞에서 헤어졌다.
쥬다스와 아벨, 두 사람은 울타리를 따라 싱그럽게 피어오른 넝쿨 꽃과 키 작은 나무 따위를 지나 황토색 문 앞에 섰다.
아벨이 쥬다스의 눈치를 힐끔 살피며 문을 가리켜 보였다.
“정령술사의 자질이 있다면, 누구나 열 수 있는, 문이라고…….”
“허허. 그렇구나. 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부터가 수업 과정인 모양이야.”
언뜻 평범해 보이는 이 여닫이문은 정령술사로서 가부를 판별해 주는 역할이었다.
자질이 없는 자가 아무리 손잡이를 밀고 당겨봤자 열리지 않는다.
자연계 힘에 반응하여 잠금이 해제되도록 설계된 이 문은 정령석으로 제작되어 있었다.
과연 제국이 자랑하는 인재 양성 기관답게 건물 하나도 허투루 짓지 않았다.
흥미롭게 이를 관찰한 쥬다스가 천천히 손을 뻗어 손잡이를 잡았다.
딸랑.
문에 달린 방울이 청명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힘을 주지 않아도 부드럽게 열린 문 너머로 밝은 톤의 여성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나!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쥬다스 님.”
두더지처럼 생긴 땅의 정령 하나를 끌어안고 있던 정령학 교사가 화사하게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우아하게 손질된 갈색 단발머리가 어깨선에서 사락 흐트러졌다.
아직 젊은 30대 여성이면서도 유능한 땅의 정령술사로서 이름을 떨친 그녀는 루바흐에서 차기 정령술사들을 길러내는 소임을 맡고 있었다.
“정령학 수업을 맡고 있는 이사벨입니다. 어서 오세요.”
쥬다스가 목례하며 스승에 대한 예의를 갖추자 이사벨은 맑게 웃어주며 그에게 다가섰다.
그녀의 뒤로 몰려든 학생들이 신기한 눈으로 빼꼼 쥬다스를 쳐다보았다.
정령학 수업을 듣는 학생은 아벨까지 합쳐 총 8명이었다.
과연 정령술사의 자질을 가진 아이들답게 하나같이 맑은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개중엔 루바흐의 나이 제한인 10살보다 어려 보이는 아이도 하나 있었다. 겉모습만으로 보면 쥬다스와 비슷할 정도였다.
쥬다스가 시선을 주자 아이는 화들짝 놀라 이사벨의 치마 뒤로 숨었다.
그 시선을 알아챈 이사벨이 후후 웃음을 흘리며 아이의 어깨를 잡아 앞으로 세웠다.
“쁘띠-루바흐에서 후원하고 있는 아이랍니다. 아직 7살이지만 정령술사로서의 자질이 발견되어 3년 뒤면 정식으로 입학할 예정이죠. 자, 리베흐. 선배님께 인사드리렴.”
“히잉…….”
리베흐는 낯을 많이 가리는 7살 여자아이였다.
교사의 팔을 꼭 붙든 채 울먹거리기 시작한 그녀에게 쥬다스가 빙긋 웃어 보였다.
“호오, 이름이 리베흐라면 겨울에 태어난 모양이로구나.”
“웅……?”
리베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생일은 눈이 몹시 많이 내리던 겨울날이었다.
울먹이는 것도 잊고 헤 쳐다보는 리베흐에게 잔잔히 미소 지어준 쥬다스는 아이의 연분홍색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리베흐는 순백과 겨울을 뜻하는 말이란다. 그래, 아마도 네가 태어난 그날, 지나가던 겨울바람에게 사랑받은 것이겠지.”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리베흐의 어깨에는 하얀 원피스를 입은 소녀 형태의 정령이 살포시 앉아 있었다. 정령은 꺄르르 웃으며 날아올랐다.
그러자 반짝이는 얼음 결정을 실은 바람이 쥬다스와 리베흐를 감싸듯 은은하게 맴돌았다.
눈앞에서 살짝 흩날리는 은빛 머리카락을 멍하니 바라본 리베흐가 꼭 붙들고 있던 교사의 손을 놓았다.
지켜보던 아이들의 입에서 우와 하는 감탄이 흘러나왔다.
리베흐는 바람의 정령과 계약은 되어 있으나 아직 술사로서 이를 의지대로 다루지는 못하는 어설픈 상태였다.
현재 그녀에게 붙어 있던 정령이 감응한 것은 이 자리에 쥬다스가 있기 때문이었다.
“잘 부탁한단다.”
그들이 모여 있던 건물은 일종의 정령학 전용 연구소였다.
말이 연구소일 뿐 실제로는 정령술사로서 자질이 있는 학생들과 교사가 함께 모여 시간을 보내는, 일종의 동아리실과도 같았다.
정령학 교사 이사벨은 서른이 넘은 나이임에도 여전히 소녀처럼 명랑하고 밝았다.
늘 긍정적인 성품으로 성심껏 학생들을 돌보는 교사였기에 학생들도 스승이라기보단 마치 가족처럼 그녀를 따르곤 했다.
그날은 따로 수업을 하려던 게 아니라 쥬다스와 학생들을 소개시키는 자리였다.
이사벨은 생글생글 웃으며 정령학 수업에 대한 소개를 덧붙였다.
“정령학은 아직 개발이 많이 되지 않은 분야예요. 가르친다고 해도 전수가 불가능한 이능이기도 하죠. 이미 정령과 계약을 마치고 다루고 계신다니 알고 계시겠지만, 정령은 자아가 있고 이지도 있는 신비로운 존재잖아요? 같은 속성이라 해도 정령마다 성격도, 특성도 달라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무궁무진하죠. 게다가 계약한 정령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술사 본인인걸요. 아- 아, 정령과의 계약이란 정말로 멋진 일이에요.”
정령학 교사답게 이사벨은 정령을 아주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정한 눈빛으로 품에 안은 땅의 정령을 내려다보았다.
“그렇죠, ‘휴’?”
이사벨이 안고 있던 두더지처럼 생긴 땅의 정령은 그녀를 마주 올려다보며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휴’라는 이름으로 계약된 이 정령은 현재 모든 사람이 그 형태를 볼 수 있도록 실체화된 상태였다.
정령이 모습을 드러내고 힘을 사용할 수 있도록 술사가 허용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상당한 정신력이 필요했고, 이사벨은 무리 없이 정령을 실체화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제가 이 수업에서 가르치는 건 정령에 대한 이해와 계약, 계약의 이행 등과 같은 이론이랍니다. 이론 수업은 매일 1시간 동안만 진행되고, 출석 체크는 하지 않아요. 또 능력고하를 알기 위해 실기 평가는 실시하지만 시험은 따로 없답니다. 그래도 수업은 꼭 빠뜨리지 말아주세요. 후후, 나머지 시간에는 자유롭게 연구소를 방문하셔도 좋아요.”
수업 자체가 매우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애초에 정령술사 자체가 희귀하다 보니 정령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것이 얼마 없었다.
교사가 말한 대로 가르친다고 해서 전수가 되는 분야도 아니고,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분야도 아니었다.
정령은 아직까지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는 신비로운 존재였고 그들과 계약함으로 인해 힘을 빌려 사용할 수 있는 정령술사들은 모든 나라에서 대우받는 인재였다.
그러니 학원 루바흐에서도 술사의 자질이 있는 학생들을 한데 모아 관리하면서도 그 능력을 키워줄 이 연구소를 마련해 놓았다.
다른 수업과는 차별화되어 진행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신캐릭터인 리베흐는 분홍머리에 크림색 눈을 가진 미인으로 자라납니다.
2부때 주인공 나이가 22세니, 그때쯤이면 17세 꽃다운 나이겠군요.(크리스티나는 24세.... 바람직한 연상연하 여성들이네요.)
하지만 분명한 건 앞으로도 주인공과 엮이는 로맨스는 없습니다.ㅎ 이건 절대 제가 솔로라서가 아니라요...! 쿨럭;;
아, 혹시 질문이 있으시면 Q/A를 받고자 합니다. ㅎ 'Q.질문'을 해주시면 다음화 후기때 스포가 아닌 선에서 'A.답'을 드리겠습니다. 있으실런지는...(...)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여주신 응원과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