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35화 (35/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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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유명세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정령술 특기로 들어와 놓고, 정작 계약도 못했고. 공부도, 너무 어렵고, 힘듭니다. 다른 학생들은, 무섭기도, 하고요.”

한 번도 자신의 생각 같은 걸 물어봐 준 이가 없었다.

정령학 수업 시간에도 늘 혼자 구석에 박혀 그림자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시간을 보내다 사라지곤 하는 그였다.

그나마 맑고 깨끗한 아이들이었기에 그를 괴롭히거나 무시하진 않았지만 아벨이 워낙 분위기도 우중충하고 말수도 없었기에 함께 어울리기는 힘들었다.

아벨이 고립된 건 그 자신의 성격 탓도 있었다.

“그래서, 사실은,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아벨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자신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금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쥬다스 님. 당신은, 저와, 비슷했으니까……. 실례, 일까요. 이런 말.”

“아니. 나도 그렇게 생각하던 참이란다.”

쥬다스는 부드럽게 아벨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아벨의 모습은 본래 쥬다스의 모습과 상당부분 닮아 있었다.

키도 작고 왜소한 체형인 데다 정말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없다는 점이 그랬다.

아무리 자질이 있어도 정작 정령과 계약을 하지 못하면 술사로서 무의미했다.

심지어 황자인 쥬다스와 달리 집안도 별 볼 일 없는 사막 부족 출신이었다.

아벨이야말로 거리낄 것 없이 조롱받았으며 괴롭힘을 당했다. 그간 쥬다스가 당해온 정도는 마치 애교 수준과도 같았다. 아벨은 면전에서 욕설을 듣거나 맞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반항할 수 없었다. 아직 십 대 소년인 아벨이 반항하기엔 적이 너무 많았고, 또 다들 집안의 힘이 쟁쟁하여 도무지 어찌할 바가 없는 상대들이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아벨 자신이 반항할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런데 황자에 대한 소문을 듣고 묘한 기대감이 생겨났다.

“쥬다스 님이, 변할 수 있었던 건, 역시……. 힘이 생겼기 때문, 인가요.”

“…….”

아벨은 그간 백로황자가 어떤 대우를 받으며 지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자신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그 세계에서 밑바닥 인생을 살던 자였다.

최상의 혈통을 타고 태어나, 무능하고 나약하게 살아간다. 그로 인해 동질 그룹에서 소외되고 무시 받으며 언제 사라져도 이상할 게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랬었는데, 하루아침에 그 모든 게 뒤바뀌었다.

“힘만, 있다면. 저도, 당신처럼.”

“허허. 이것 참…….”

“하지만, 나 같아도, 싫을 겁니다. 이런 한심한 계약자 따위, 싫겠죠.”

“진정하려무나, 아벨. 그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어느덧 연구소를 둘러싼 정원에 도착해 있었다.

쥬다스는 곧장 입구로 향하는 대신 키 작은 꽃나무가 자라고 있는 정원 안으로 발을 들였다.

봄기운이 물씬 샘솟기 시작한 정원에는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꽃봉오리가 부드러운 타르트처럼 몽글몽글 자라 있었다.

쥬다스는 노란 꽃나무 앞으로 가 피지 않은 꽃봉오리 하나를 가리켰다.

“네 보기엔 어떠하냐.”

“…….”

“이 꽃이 좀 더 커다랬다면 어떨 것 같은고?”

아벨은 멍하니 꽃나무를 응시했다. 꽃봉오리는 딱 자신의 주먹크기만 했다.

“색이 좀 더 화려했다면? 혹은 아주 튼튼하여 찢기지 않는 잎을 가졌다면 어땠겠느냐?”

“……그건, 모르겠습니다. 아직, 피지 않았으니까.”

“장하구나. 그 말대로란다.”

“……네……?”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옆을 돌아보던 아벨의 귓가로 따뜻한 음색이 들려왔다.

“이 꽃에는 ‘피는 힘’이 필요한 거란다.”

그 말을 들은 아벨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자신보다 작고 허약해 보이는 어린 황자의 말에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뚫어져라 내려다보는 시선을 느낀 쥬다스가 그를 올려다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피기 전까지는 어떤 모습일지, 무엇이 더 필요할지 모르는 게야. 너는 아직 네 정령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잖누. 차분히 생각해 보거라. 지금 네게 정말 필요한 건 무엇일꼬?”

“……제게, 필요한 것…….”

힘을 갖고 싶었다. 막연히 그렇게만 생각해 온 그였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정말 필요한 건, 강한 힘 따위가 아니라 아주 작고 간단한 부분이었다.

“……인정, 받고 싶어요.”

“그래.”

작게 고개를 끄덕인 쥬다스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훅 하고 뻗어 나온 녹색 바람을 보며 아벨은 또다시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지글거리는 시기와 열등감을 꾹 내리누르며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인정받아서, 모두가 기대했던 그런 어른이 되어서.”

따뜻한 바람이 아벨의 볼을 토닥이듯 감쌌다. 그는 그 바람이 품고 있는 향을 알아차리고 눈을 크게 떴다.

그리운 사막의 열풍이었다. 건조하고 뜨거운 데다, 퍽퍽한 모래 알갱이가 실려 있었지만 지금껏 그가 한시도 잊어본 적 없는 바람이었다.

아벨은 뜨거운 눈시울을 들어 제 얘기를 가만 듣고 있는 황자를 마주보았다.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싶습니다.”

이 말이야말로, 15세 소년 아벨 투르케가 루바흐에 와 처음으로 남 앞에서 숨기지도 더듬지도 않고 당당히 밝힐 수 있었던 속내였다.

수업 준비를 마치고 땅의 정령을 돌보며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던 정령학 교사 이사벨은 나란히 들어오는 두 학생을 보고 해맑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와요! 어머, 아벨? 무슨 좋은 일 있었나요?”

“……아뇨, 그냥…….”

이사벨은 학생들의 표정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사람의 감정을 읽고 예민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 그녀가 가진 장점 중 하나였다.

이사벨이 보기에 지금 아벨은 굉장히 편안하게 느껴졌다. 늘 스스로를 가둔 사람처럼 우중충하고 우울해 있던 아벨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별것 아닌 작은 변화였지만 이사벨은 이를 놓치지 않고 관심 있게 물어왔다.

그런 그녀를 향해 아벨은 멋쩍게 말을 얼버무렸다.

“후후, 쥬다스 님과 그사이 친해진 모양이에요. 잘됐네요! 자, 그럼 슬슬 시간이니 수업을 시작해 볼까요?”

정령학 수업에는 딱히 참고로 사용되는 교재가 없었다.

이사벨은 학생들을 둥글게 앉혀놓고 마치 공연하는 사람처럼 그 앞을 거닐며 수업을 진행했다.

“정령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신비로운 존재죠. 그리고 더욱 신기하게도, 그중 우리 술사들이 만나 계약할 수 있는 짝은 정해져 있답니다. 우리는 마치 영혼의 동반자처럼 깊이 교류하게 되죠. 혹시 지난 시간에 알려드린 내용을 기억하나요? 정령의 종류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자연계 4속성이요!”

한 아이가 눈을 빛내며 크게 외쳤다. 그러자 이사벨은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조그맣게 웃었다.

“맞아요.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죠? 4속성 안에서도 다양한 특성화로 나뉜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기억하나요?”

“겨울바람!”

“단단한 바위의 정령과 백사장 모래의 정령처럼 정령마다 특성 차이가 있었습니다.”

“용암 정령이랑 파란 불꽃의 정령이요.”

학생들은 눈치 보지 않고 너도 나도 자유롭게 발언했다.

“다들 열심히 들었군요? 여러분에게 정령술에 대한 열정이 있어 기쁘네요. 그래요, 정말 많은 특성이 있었어요. 거기에 더해, 우리 술사들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도 분명 많을 거라 생각해요. 자연계 정령이 있다는 사실은 지금 밝혀진 이외에도 다른 속성의 힘을 다루는 정령들이 존재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으니까요.”

그녀의 말대로 정령학계는 아직 밝혀진 게 그다지 많지 않았다.

술사마다 계약한 정령이 사용할 수 있는 힘의 영역이 달라서 더욱 정리가 되지 않았다.

정령은 인간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양한 개성을 가진 존재였다.

“지금 밝혀진 자연계 4속성만 해도 그 범주가 무척 넓고 특성도 몹시 다양해서 우리가 그들을 전부 만나기란 어려울 거랍니다. 하지만 아마도 그 모든 정령을 전부 만나봤을 사람이 있다면.”

여덟 명의 학생들은 옛날이야기를 듣는 어린아이처럼 숨을 죽였다.

“4속성을 지배하는 4명의 정령왕, 그들 모두와 동시에 계약한 자는 지금껏 기록된 인류 역사상 단 한 사람.”

이사벨이 알려주지 않아도 학생들은 모두 그 답을 알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전설처럼 남아 명성이 알려진 그였지만, 정령술사라면 그를 향한 존경의 정도가 남달랐다.

어느 날 갑자기 모습을 감춰 그 생사마저 불분명하였지만 따져 볼 것도 없이 역대 최강의 정령술사.

‘……‘이그레트’.’

정작 그 본인을 사이에 두고 있음을 꿈에도 모르는 학생들은 하나같이 눈을 빛내며 그를 상상했다.

“저, 스승님.”

한 남학생이 손을 들어 질문이 있음을 알렸다. 이사벨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의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그레트 님은 그럼, 지금 몇 세이실까요?”

“어머…….”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기에 이사벨은 입술에 손을 얹은 채 생각에 잠겼다.

정확한 날짜까진 모르더라도, 이그레트의 탄생년 정도는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분은 ‘금색 미네르바의 해’에 태어나셨으니까…….”

제국은 모든 해에 색깔과 12개의 고대어를 돌려가며 이름 붙였다.

국교(國敎)는 교황청이 주관하는 신성을 따랐지만, 12년을 주기로 해마다 고대어가 상징하는 의미를 붙여 태어난 아이의 앞날을 축복하는 게 전통이었다.

그래서 황실 사서관에서는 복잡한 이름 대신 따로 숫자로도 해를 기록하고 있었다.

다소 불편한 방식이긴 했어도 오랜 세월 그 방식에 익숙해진 국민들은 자연스럽게 매해를 규칙에 따라 불렀다.

“그리고 올해는 ‘청색 크로노스의 해’.”

“104살이요!”

리베흐가 손을 반짝 들고 외쳤다. 리베흐는 바람의 정령에게 사랑받을 뿐 아니라 두뇌까지 명석한 아이였다. 그녀의 계산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거기서 쥬다스는 이상함을 느끼고 작게 중얼거렸다.

“청색 크로노스라……?”

그가 날짜를 확인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확인했을 때에는 ‘크로노스의 해’라고만 보았다.

그가 죽었던 해가 같은 ‘크로노스의 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앞에 붙는 해의 색깔에 오류가 있었다.

누구도 이그레트의 행방은커녕 생사조차 모르고 있다지만 그 본인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분명 92살에 죽었다.

“…….”

무언가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그날 정령학 수업이 끝난 후 쥬다스는 숙소로 곧장 돌아가는 대신 천천히 교정을 거닐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그가 크리스티나와 함께 빠졌던 호수까지 도달했다.

호숫가에 멈춰선 그는 가만히 물살을 바라보았다.

이미 해가 져 어둠이 내려앉은 호수에는 근처 가로등에서 은은히 흘러나오는 빛줄기가 반사되어 일렁이고 있었다.

‘한 번 죽은 사람이 다시 깨어나는 일.’

쥬다스는 검게 잠든 호수를 바라보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애당초 자신이 이곳에 존재하는 자체가 불가능한 전제였다.

타인의 몸에 깃든 정신이 온전히 유지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았다.

정신은 곧 육신을 따라가는 법.

인간의 영혼에 저장된 기억이 다른 육신에 저장된 기억과 충돌하지 않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수상하리만치 깔끔했다.

마치 겉보기에 잔잔한 호수표면과도 같았다.

쥬다스는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은 자갈처럼 제 안에도 보이지 않는 돌멩이가 잔뜩 남아 있으리라 예측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째깍 째깍) 12시입니다, 여러분.

아, 만일 제가 공지 없이 3일을 넘게 연중한다면 그것은.... 사고가 난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쿨럭;

아마 정 힘들면 중간에 연재주기를 바꾸는 한이 있어도 완결은 꼭 봅니다. 좀 호기롭나요...ㅎㅎ

사족으로 이그레트는 <자연계 4속성 정령왕>들과만 계약되어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보통사람을 훌쩍 뛰어넘는 사기캐긴 합니다...만, 자세한 건 향후 진행과정으로 확인해주시면 됩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사랑과 응원에 늘 감사드립니다! (저도 사랑합니다 ㅎ)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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