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36화 (36/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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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유명세

“……어렵구나.”

「그건, 이그레트 네게서 오랜만에 듣는 소리로군.」

흥미롭게 대꾸한 루니가 그의 발치에 누워 앞발에 턱을 괴었다.

그러곤 쥬다스를 감싸듯 빙 두른 거대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만사에 무관심하고 과묵한 푸른 늑대는 그의 앞에서만큼은 한없이 애교가 늘었다.

「너는 늘 주어진 문제를 슬기롭게 풀어내었으니.」

“과찬이구나, 루니. 내가 지나온 길에 정답이란 없었거늘.”

「아니, 네가 힘들다는 것을 우리 앞에서 표현해 본 적 말이다.」

그 말에 쥬다스는 호수에서 시선을 떼고 루니를 돌아보았다.

「너는 언제나 스스로 판단하고, 또 스스로 감당해 내었다. 하지만 우린 알고 있었다.」

「맞아, 이그레트.」

어깨에 앉아 있던 유니가 그 말에 동조하며 쥬다스의 옷깃을 끌어안았다. 유니는 울 듯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가 늘 고통스러워했다는걸.」

정령은 계약한 술사와 깊이 공명한다. 굳이 루니가 물의 속성을 이용해 내면을 살펴보지 않더라도 그가 느끼는 감정 정도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그레트, 평민으로 태어나 누구보다 강대한 힘을 가졌으며, 범인은 꿈도 못 꿀 부와 명예도 한 손에 거머쥐었던 사내. 어디서든 그를 환영했으며 누구나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하지만 정작 ‘이그레트’를 순수하게 원했던 이는 없었다. 사람들이 필요로 한 것은 그의 힘이었다.

그는 철저히 이용당했고, 종래엔 믿음마저 배반당했다.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던 그였다. 부모도 형제도 없이 거리를 떠돌며 자랐다. 영민한 두뇌와 정령의 힘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그의 주변에 동료라 부를 만한 존재가 모여들었다.

처음엔 진심으로 동료가 되고자 한 자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끝까지 그의 곁에 친우로 남은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고배처럼 쓴 배신의 끝에, 결국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한 그가 마음이 편했을 리 없었다.

죽어가던 그 순간까지 돌이켜 후회할 정도로 이그레트는 늘 마음 한 구석에서 염원해 왔다.

‘사람들과 사는 것.’

그리고 그 마음은 그를 둘러싼 4속성 정령들에게 가장 가까이 와 닿았다.

쥬다스의 머리 위에 매달려 있던 토니가 손으로 그 머리를 토닥토닥 다독이며 말을 거들었다.

「응요. 힘들면 언제든지 말하라요!」

“……그러마. 고맙구나, 아이들아.”

「헤헤~」

“솔직히 말하자면 좀 놀랐단다. 눈을 감은 지 12년이나 흘렀을 줄이야. 내겐 하룻밤 꿈과 같은 찰나였거늘.”

쥬다스는 고민이 있을 때면 늘 하던 버릇대로 턱을 짚었다. 수염 한 줄기 없이 매끈한 턱이었지만 자연스레 쓸어내리게 되었다.

“한데 이 아해의 나이도 12살이란 말이지. 여러 가지로 맞아떨어지는 게 있어 의심 가는 바가 있긴 하나. 여기에도 문제가 있구나. 만일 내가 처음부터 12년을 ‘쥬다스’로서 있었다면, 어째서 의식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지가 의문이로구만.”

단순히 이그레트가 사망한 후 쥬다스의 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고 여기기엔 미심쩍은 점이 많았다.

그는 모든 가능성을 하나하나 염두에 두었다.

지나칠 정도로 자연스러운 육신에의 적응, 그리고 루니가 읽을 수 없는 정신세계.

쥬다스와 이그레트가 애초부터 동일 인물이라면 아귀가 맞물리는 점도 많았다.

하나 그렇게 따지기엔 또 12년간의 공백이 너무 컸다. 그에겐 ‘쥬다스’로서의 기억과 의식이 먼지 한 톨만큼도 없었다.

게다가 한 가지 더 확신할 수 없는 명제가 남았다.

‘보통 인간의 영혼은 윤회를 하는가.’

정령과 계약을 하는 술사는 그가 아니더라도 예전부터 존재해 왔다.

영혼과 영혼이 이어지는 이 계약은 죽어서도 풀리지 않고 술사를 따랐다.

그렇다면 왜 지금껏 지난 생에서의 계약이 현생에도 이어졌다는 보고가 한 번도 없었는가.

더구나 제국의 국교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은 죽어 윤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명계로 이동해 심판을 받는다.

죽음과 동시에 아예 이 세상을 떠난다는 설이었다.

작은 생선가시가 목에 걸린 듯 도무지 답이 명쾌하게 떨어지지 않는다.

“……이는 필시 무언가 내가 모르는 변수가 작용하고 있을 터.”

「으음, 그건 우리도 모르겠어.」

정령은 명계에 관여할 수 없다. 그랬기에 정령왕이라 해도 지금 쥬다스의 상태에 대해 알 만한 게 없었다.

지금 그 곁에 있는 세 정령은 그가 죽은 이후로 죽 부름받기 전까지 정령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감도는 사이, 엎드려 있던 루니가 귀를 쫑긋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근처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하! 이런 데서 뵙는군요. 시간도 늦었는데 여기서 홀로 뭐하십니까?”

이미 상대의 접근을 알고 있었기에 쥬다스는 놀라지 않고 덤덤히 돌아섰다.

유들유들 웃고 있는 마르젠 하쉬가 시야에 들어왔다.

선한 감색 눈빛 너머로 갈고 닦여진 귀족으로서의 심성이 엿보였다.

쥬다스는 이를 가만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니 예까지 오게 되었다. 마르젠 너도 생각할 것이 있어 나온 것이더냐?”

“밤하늘이 한낮처럼 쾌청하니 생각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더할 나위 없이 잔잔합니다.”

“하면 내게 따로 할 말이 있어 나온 것이로구나.”

‘역시.’

마르젠은 입안으로 중얼거렸다.

저 영민한 황자는 자신이 아무리 에둘러 말하려 해도 다 알고 있다는 듯 반응해 왔다.

루바흐에 입학하기 전부터 꾸준히 전장 같은 정계에 기웃거리며 수많은 사람을 상대해 본 마르젠이었다.

귀족의 자제라고는 하나 루바흐 학원에 다니는 어린 학생들을 제 입맛대로 다루기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백로황자에겐 제 입담과 처세가 잘 통하지 않았다.

12살 어린아이가 아니라 장성한 귀족을 상대할 때와 비슷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이런, 원하시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마르젠은 황자의 눈치에 맞춰 재빠르게 대처했다.

그가 보기에 황자는 미사여구나 구구절절 돌려 말하기식 대화를 선호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직접적으로 속내를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계산을 마친 그는 마치 약한 짐승이 강자에게 하듯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황자 전하. 주군으로 모시게 해주십시오.”

“…….”

“귀족으로서 뜻을 정하기에 아직 이르다는 건 압니다. 하나 지금이기에 정할 수 있는 뜻도 있는 줄로도 압니다. 저 마르젠 H.하쉬는 전하께 힘이 되어드리고자 합니다.”

쥬다스의 금안이 흔들림 없이 마르젠을 담담히 바라보았다. 마르젠 역시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졸업과 동시에 가문을 이어받을 후계자입니다. 저를 선택하여주신다면 하쉬 가문이 당신을 적극적으로 지지할 것이며, 그간 이를 위해 친교를 쌓아놓은 모든 귀족가문이 당신을 따르도록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지지 세력이라.’

일종의 거래였다. 현재 루바르잔 제국은 황권과 신권에 더해 권력을 손에 쥔 귀족 세력들로 체재가 유지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황권은 모든 권력에 앞섰다. 하지만 이는 대외적인 모습이었다.

황권이 신권보다 우위라고는 하나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교황청에서 거머쥐고 있는 부분은 단순히 권력이라고 하기 애매한 감이 있었다.

신권이란 즉 민중의 믿음이었다. 인간, 특히 황제보다 위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를 섬기며 축복과 저주를 다루는 영역인 만큼 아무리 인간의 지도자라 한들 침범할 수 없는 불가침 영역이란 게 존재했다.

하지만 이것도 역시 인간이 관리하는 영역이었으니, 당연히 깨끗하지만은 않았다.

현 교황청은 귀족 세력과 상당 부분 결탁되어 있었다.

황제가 고개 숙이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신이었으니, 귀족 입장에서 이를 파고들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신권은 귀족 세력을 암암리에 등에 업고 서로를 키웠으며 황권이 독주하지 못하도록 견제했다.

그 와중에 귀족 세력들의 경우 겉은 모두가 충신이었으나 속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아직 황자들의 나이가 모두 어리고, 더구나 본래라면 황태자 위에 올랐어야 하나 제 구실을 못했던 1황자 탓에 상황이 점점 애매하게 흘러갔다.

대다수는 1황자보다는 좀 더 쓸 만한 구색을 갖춘 2황자나 3황자에게 붙어 권력을 거머쥘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같은 맥락으로 마르젠은 1황자에게서 기회를 엿본 셈이었다.

“부디 선택을.”

간결하게 말을 맺은 그에게 쥬다스는 긍정도 부정도 표하지 않았다.

마르젠이 말하는 충성은 일전 에단이 보여주었던 충성 서약과는 그 질이 달랐다.

에단은 쥬다스를 진정으로 자신이 모셔야 할 주군으로 선택했다.

하지만 마르젠의 경우, 그 속내에 검은 야욕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가 모시고자 하는 대상은 쥬다스가 아니라 차기 황제였다.

비슷한 말 같아도 분명 차이가 있었다. 끌어 올려주는 대신 함께 부상한다.

마치 혈통 좋은 명마를 골라 타듯 그를 품평했다.

이를 꿰뚫어 본 쥬다스는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고른 말이 혹 가고자 한 방향으로 달리지 않는다면 후회하지 않겠느냐.”

에단에게 했던 것과는 다른 대답이었다.

시험에는 시험으로 대응하는 법. 역으로 자신을 시험하는 질문에 마르젠은 눈을 가늘게 떴다.

“목이 혼탁하여 길을 정하는 데에 어지러움이 있다면 바른 길을 걸으시도록 간언함이 충신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허허, 그 말이 옳다. 그러면 네가 말한 바른 길을 판단하는 자는 뉘인고.”

분명 웃고 있었는데 이를 눈앞에서 마주 본 마르젠의 등골에는 오싹한 한기가 돌았다. 움찔 입을 닫는 그를 향해 쥬다스가 웃는 낯을 지웠다.

“네가 주인으로 모시고자 한 자인가. 아니면 그 등에 앉아 눈가리개를 씌워 달리게 하려는 치인가.”

“…….”

아뿔싸.

마르젠은 상대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어리숙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연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여유를 잃고 흔들리는 갈색 눈동자 너머로 크리스티나로부터 들었던 충고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너 따위가 쥐고 흔들 분이 아니다.’

‘더 이상 조무래기끼리의 투쟁이나 탐색전 따윈 무의미해.’

‘황제가 될 사람은…….’

크리스티나는 쥬다스를 단순히 정령의 힘과 혈통만으로 판별한 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그가 군주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를 쥐고 흔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소리였다.

그러기에 그는 어린 나이부터 벌써 많은 이치를 깨닫고 있었다. 후일이 상상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백로황자가 이대로 자라 장차 군주의 자리에 앉는다면, 누구도 저 고고한 황금색 눈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리라.

마르젠은 뒤늦게 그녀가 했던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헛웃음을 삼켰다.

그는 즉시 황자의 앞에 부복했다.

“신이 감히 전하를 우롱하려 하였습니다. 벌하여 주십시오.”

야심이 있다는 건 다른 말로 처세에 능하며 매 순간 전력을 다해 살아간다는 뜻도 되었다.

이 순간, 마르젠은 일생일대의 도박에 자신을 온전히 걸었다.

“이곳은 학교이질 않느냐. 그럴 필요 없단다. 대신 네가 따르고자 하는 이가 어떤 길을 가는지 바로 보아 두는 것이 좋겠지. 결정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아.”

“그럼……. 곁에 두시는 겁니까?”

“원한다면 그리 하련. 말리지는 않으마.”

“하하…….”

마르젠은 어설픈 웃음을 흘렸다. 그리곤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다음 날이 되자 교실에 모여 있던 학생들은 쥬다스가 앉은 자리를 힐끔거리기 바빴다.

쥬다스는 평소처럼 바이칼 옆에 앉았을 뿐이지만, 그 주변을 자연스럽게 차지한 인물들이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다.

같은 수업을 신청하여 듣고 있는 에단은 물론이고 고위 귀족들과 친분이 두텁다던 마르젠까지 싱글거리며 그 곁에 붙어 있었다.

거기에 더해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평소보다 배는 싸늘한 표정의 크리스티나가 그 앞에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마르젠이 곱지 않은 시선의 대상이었으나 앉아 있던 모두가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생각해보니 만약 200회를 1부 완결편으로 잡을 경우, 이 추세라면 완결까지 6개월 정도 남았네요.

넉넉잡아 1년 안에는 완결을 보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힘내서 가자!

(참, 공지란 옆에 설문조사 만들어뒀습니다. 코멘트로 종종 성별얘기하시는 걸 보고 저도 궁금해져서 ㅎㅎ 한번씩 눌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응원과 사랑에 늘 감사드립니다!

(+참, 오탈자 및 비문 지적도 감사드립니다ㅠㅠ 덕분에 매번 잘 수정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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