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37화 (37/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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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유명세

“……너.”

“무슨 일인고, 크리스티나야.”

크리스티나가 막 짜증스레 입을 열려던 찰나 쥬다스가 부드럽게 그녀를 얼렀다.

크리스티나는 다소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그를 쳐다보았다.

“쥬다스 님, 이자에 대해 잘 아십니까?”

“글쎄다. 안다면 알고 모른다면 모르겠구나.”

“당신이라면 저 가면에 쉽게 넘어가실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아요. 저자는 뼛속까지 제 이익만을 챙기는 족속입니다. 귀족이 아니라 상인이었다면 대성하였을.”

“……저기, 크리스티나? 알고 지낸 게 벌써 햇수로 2년째인데 면전에 대고 악담을 하시다니. 하하! 저 진짜로 서러워지려 합니다?”

“하, 저급 연기는 집어치워.”

그녀는 원래 마르젠을 좋게 보지 않았다. 공작가 영애인 데다 문무 가릴 것 없이 뛰어난 성적을 보이며 수많은 학생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그녀에게도 당연히 접근했다.

하지만 그들이 처음 만났을 당시만 해도 벌써 2년 전 이야기.

지금보다 미숙했던 마르젠의 접근은 당시에도 까칠하기 그지없던 크리스티나에게 대차게 걷어차였다.

등에 업은 권력을 기준으로 사람에게 접근하는 모습은 애초에 높은 자리를 타고난 그녀에게 있어 깎아놓은 과일에 꼬이는 날파리와도 같았다.

그런 데다 결정적으로, 지난번 쥬다스에 대해 나눴던 대화가 있어 더욱 신경에 거슬렸다.

크리스티나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마르젠을 내려다보곤 홱 돌아섰다.

찰랑이며 멀어지는 투톤의 바다빛 머리카락을 싱글거리며 바라본 마르젠이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이거, 이거. 단단히 여기사님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입니다.”

“저리 날카로워 보여도 실은 잔걱정이 많은 아이란다. 영 기분 나쁘게 듣진 말거라.”

“저 냉미녀를 아이 취급하는 건 이 루바흐에서 쥬다스 님이 유일하실걸요?”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하긴 했어도 마르젠은 별로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 델피아는 그가 학원에서 처음으로 공략에 실패한 존재였다.

실패라곤 해도 마르젠은 여전히 크리스티나를 제 편으로 만들기 위해 포석을 깔아두는 중이었다.

날을 세우고 도도하게 굴수록, 틈을 보이는 순간 빠르게 무너지는 법이다.

한 번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가 게임셋이었다. 마르젠은 델피아 공작가라는 좋은 말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탁.

“……?”

제자리로 돌아간 줄 알았던 크리스티나가 다시 그들 바로 뒷자리로 다가와 교재를 내려놓았다.

의외이다 못해 터프하기까지 한 행동력에 학생들의 시선이 다시금 그녀에게로 몰렸다.

크리스티나는 책을 펼쳐 시선을 고정시키며 차갑게 말했다.

“뭘 그렇게 보지? 내 자리 선정에 불만이라도 있나.”

“오, 그럴 리가. 도리어 환영입니다.”

마르젠은 싱긋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래도 저 얼음 공녀를 무너뜨릴 키워드는 그가 모시기로 결정한 백로황자인 모양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그럴 듯한 시뮬레이션이 빠르게 그려졌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그들의 공방을 바로 곁에서 지켜봐야 했던 바이칼은 깊은 한숨과 함께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왜 여기서들 이러십니까…….”

“음? 나는 본래 앉던 자리에 앉았을 뿐이란다.”

“……쥬다스 님을 따랐을 뿐.”

“하하, 저도 쥬다스 님과 가까워지고 싶어서 말입니다.”

“자리에 이름표라도 써 붙여놨나? 까다롭군.”

쥬다스, 에단, 마르젠, 크리스티나. 각자 당당하게 밝힌 사유에 바이칼은 결국 본전도 못 찾고 다시금 한숨으로 말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

경제학 수업이 끝나고 각자 짐을 챙길 무렵, 누군가 창문을 가리키며 외쳤다.

“공지 떴다!”

“어, 프리미어 페이퍼(Premier paper)다!”

우오오!

그 소리에 학생들은 일제히 물소 떼처럼 흥분하여 창가로 달라붙었다.

그들이 있던 교실뿐 아니라 사방에서 환호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갑작스러운 들뜬 분위기에 쥬다스도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글바글 창문에 달라붙은 머리통 너머로 하늘에서부터 눈송이처럼 떨어지고 있는 하얀 종이들이 보였다.

학생들 사이에선 일명 ‘공지’라고도 불리는 이 종이는 루바흐 학원 측에서 대대적인 이벤트 행사를 기획할 때마다 지금처럼 전교에 뿌려졌다.

특수한 마법으로 만들어진 ‘프리미어 페이퍼’는 일주일간의 공지 의무를 다하고 나면 저절로 연소하여 사라졌다.

이번 프리미어 페이퍼 역시 무언가 큰 이벤트를 공지하고 있음을 예상한 학생들이 우르르 밖으로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소란에 휩쓸리지 않고 한 박자 늦게 비어 있는 창가로 다가간 쥬다스가 차분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회색 구름이 넓게 깔린 하늘 꼭대기에서부터 팔랑팔랑 하얀 종이가 쉼 없이 낙하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봄에 내리는 눈처럼 느껴질 장관이었다.

“드디어 이 시즌이군요.”

“흠……?”

그를 따라 남아 있던 마르젠이 함께 창가에 서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르젠뿐 아니라 에단과 크리스티나, 바이칼도 함께 적막한 교실에 남아 쥬다스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봄 축제.”

루바흐에서는 중간고사가 끝나면 그 노고를 치하하기라도 하듯 어김없이 봄 축제를 열었다.

학원에서 직접 주최하는 만큼 그 규모가 굉장히 성대하여 외부에서 앞다투어 관광을 올 정도였다.

본래 루바흐에는 본교 학생과 교사가 아니라면 출입할 수 없었지만 봄 축제 시기만큼은 예외였다.

때문에 타향에 나와 학업에 정진하던 루바흐 학생들이 학교 내에서 가족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쥬다스 님은 축제 기간에 참여해 본 적이 없으시지요?”

“아-”

백로황자가 몸이 약해 수업조차 병결이 잦았다는 사실은 자리에 모인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수업도 힘들었던 그가 축제를 제대로 즐겨봤을 리가 없었다. 물론 지금의 그로서는 모르는 과거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축제 자체가 처음인 건 사실이었다.

쥬다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창문 밖으로 살짝 손을 내밀었다.

후웅.

그 끝에서 퍼져 나간 녹색 바람이 떨어지던 프리미어 페이퍼 한 장을 실어와 손 위에 안착시켰다. 사뿐히 내려앉은 종이를 집어 든 그가 적힌 내용을 훑었다.

“이틀 뒤 개막하여 3일간 진행한다. 무예전, 경연 대회, 연구물 발표회, 디너파티장은 미리 신청이 필요하다는구나.”

그러자 각자 끌리는 항목이 있었던 지라 동시에 기대감으로 눈을 빛냈다.

아무리 어른스럽다 한들 이들은 아직 십 대 초중반의 소년 소녀였다.

그런 그들을 귀여운 손주 보듯 미소 지으며 응시하던 쥬다스는 이내 종이에 적혀 있던 작은 글씨에 잠시 시선을 멈추었다.

<외부인 출입 허가 기간 : 학부모 및 보호자 전용 포탈 개방 예정. 확인증은 각 주소로 전송하였음. 확인증 미지참 시 포탈 사용 제재.>

‘보호자라…….’

아마도 황자인 그에게 찾아올 보호자는 없을 터였다.

애초에 쥬다스처럼 황자라는 신분을 가지고 루바흐에 입학한 전례는 극히 드물었다.

“……쥬다스 님.”

“으응?”

“대회, 신청하실 겁니까?”

경연 대회에는 여러 종목이 있었다.

무예처럼 검이나 권, 봉과 같은 근접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마법사들 간의 실력고하를 겨루는 종목도 있었고, 정령술이나 치유술처럼 이능을 선보여 심사위원과 관중으로부터 점수를 부여받는 종목도 있었다.

전투 형식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선보일 수 있었기에 학생들은 큰 부담 없이 대회에 신청서를 넣었다.

대회에서 높은 성적을 거둘 경우, 추가 학점과 더불어 상장이 지급된다.

루바흐의 상장은 졸업 후에도 명성을 빛내 줄 업적으로 남는 귀중한 것이었다.

“내가 거기 끼어 무엇하겠누. 너희들 하는 양이나 구경하련다.”

그 대답에 다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데 디너파티는 참석하시는 게 좋습니다.”

“디너파티라.”

“파티가 열리는 건 축제의 둘째 날 밤, 한마디로 축제의 꽃입니다. 제국 각지에서 몰려든 귀족과 만나 얼굴을 익히고 친교를 쌓아둘 수 있죠. 하하. 어떤 길을 가시든, 당신께는 꼭 필요한 과정일 거라 생각합니다.”

마르젠이 빙글거리며 정보를 전달했다. 여전히 싸늘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던 크리스티나도 짧게 한숨을 뱉으며 이에 동조했다.

“마음에 안 들긴 해도, 저자의 말대로예요. 루바흐의 봄 축제는 지배층 입장에서만큼은 그 효용 가치가 디너파티에 편중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니. 참여하시는 편을 권해 드리고 싶군요.”

그리곤 묵묵히 쥬다스의 곁을 지키고 서 있던 에단에게 힐끗 시선을 맞추었다.

“후일 군주를 보필할 생각이라면, 그대도.”

“…….”

에단은 그저 묵묵히 쥬다스의 선택을 기다렸다. 모두의 시선을 느낀 쥬다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면 다 같이 축제를 즐기자꾸나.”

그는 말을 마치고 하늘에서 흩어지는 종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뿌옇게 흐려진 하늘이 제 속처럼 먹먹했다.

축제의 시작.

이 시기가 지나고 나면,

슬슬 황궁의 부름에 응할 때였다.

***

메마른 모래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사막.

끊임없이 몰아치는 거친 바람에 썰물처럼 쓸려간 모래 언덕이 쌓이고 무너지길 반복했다.

하늘은 온통 먹구름에 가려 있었고 사막임에도 뚝 떨어진 온도에 냉기가 감돌았다.

검은 하늘과 서리가 앉을 정도로 차가운 날씨, 그리고 사방을 뒤덮는 모래가 이곳의 전부였다.

살아 있는 생명체라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얼어붙은 사막 한가운데서, 한 사내가 로브 자락을 펄럭이며 서 있었다.

그가 입은 잿빛 학자복에는 검은 비둘기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결국 여기서도 못 찾았네? 프리드.」

검은 기류를 뿜어내는 여인의 형상을 한 사령이 그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때마침 거칠게 불어오는 사막 바람에 후드가 슬쩍 벗겨졌다. 검푸른 머리칼과 더불어 붉게 빛나는 안광이 드러났다.

프리드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앞머리에 붙은 얼음 알갱이를 툭툭 털었다.

“그러게? 어찌나 꼭꼭 숨었는지 머리카락 하나 보이질 않는구만.”

「찾아봐야 다 죽어가는 노인일 텐데~?」

“큭큭. 숨만 붙어 있다면 상관없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프리드의 적안이 뱀처럼 휘었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꺄아, 정말 최고야. 내가 네 것이란 사실이 자랑스러워. 프리드.」

사령은 그의 목을 감싸며 짧게 키스했다.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순간에도 프리드는 사령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어디 숨어 있는 거냐.’

만일 살아 있다면 104세, 보통 인간이 누리는 수명은 길어야 70세였고 이능을 가진 자라면 90세 안팎으로 명을 유지하였으니 이미 적정 수명을 한참 뛰어넘은 나이였다.

그러나 프리드는 그가 죽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4속성 정령왕의 사랑을 한 번에 받는 자이니. 만일 죽었다면 그와 계약이 끊긴 정령이 잠깐이나마 그 힘의 제어를 잃고 폭주했을 터.’

본래 자연은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유래 없이 집착했던 대상이 숨을 다해 사라진다면 정령들은 그 상실감을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첫사랑은 늘 이성을 마비시키는 힘이 있다.

4속성이 동시에 한 존재에게 매료된다는 건 생소한 경험이었기에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에게 온 마음을 쏟아붓고 있었다.

정작 ‘그’조차 예견하지 못한 일일 테지만, 그의 사소한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그들에겐 절대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만일 그가 불멸을 바라기라도 한다면 아마 세상을 구성하는 정령들은 이를 들어주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그러니 그런 존재가 죽음을 맞이한다면, 진즉에 세상을 뒤엎을 천재지변쯤은 일어났어야 이치에 맞았다.

물론 자연 법칙을 거슬러 폭주한 정령들이 더 상위 존재들에게 어떤 처분을 받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프리드는 그가 가진 힘이 필요했기에 아직까지 잠잠한 게 다행이었다.

‘그런데 그 소년.’

문득 프리드의 머릿속에 얼마 전 마주쳤던 황자가 떠올랐다.

특이한 존재였다. 시리도록 빛나는 은발과 보석을 통째로 가져다 박은 듯한 금안은, 루바르잔 황조의 초대를 떠올리게 하는 고귀한 외형이었다. 나이에 비해 비실비실하던 몸은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그런 데다 황자가 부리던 힘은 그가 찾던 것과 굉장히 흡사한 구석이 있었다.

“흐음…….”

그는 텅 빈 사막을 무심히 훑은 뒤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펄럭.

“릴리스.”

「응. 다음은 어디로?」

“루바르잔 황궁. 확인하고 싶은 게 생겼다.”

여인의 형태를 하고 있던 사령은 그림자처럼 스르르 흩어졌다.

잠시 뒤, 거대한 본 드래곤이 사막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들이 사라진 사막은 차가운 냉기에 휩싸여 죽음의 향기만 남긴 채 얼어갔다.

이는 본래 뜨거운 햇살이 작렬하던 대지. 오랜 세월 자연에 뒤섞여 생활하던 부족민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던 사막, 투르케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날씨가 부쩍 춥습니다. 감기 걸리시지 않도록 따뜻하게 입고 다니시길 바랍니다.

저는 집구조상 방이 너무 추워서 타자칠 때 손이 자꾸 어는 것만 빼면 괜찮습니다.ㅠ.ㅠ크흑. 핫팩이라도 사야하려나...;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사랑과 응원에 늘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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