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38화 (38/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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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성장통

귀족부터 황족까지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인재를 기르는 최고의 인재 양성 학교 루바흐에서 열리는 봄 축제, 그 성대한 막의 첫날이 밝았다.

학생들은 아침부터 저마다 신청한 부문에 순번표를 받으러 이동하거나 대회를 위해 준비하는 등 바쁘게 움직였다.

무예전에 참여하는 에단과 연구실적을 발표회에 제출할 바이칼, 그리고 여기저기 활동 계획이 많은 마르젠도 그 행렬에 포함되어 있었다.

자기 페이스에 충실한 크리스티나만 여유롭게 교정을 걷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지난해 봄 축제에서 연구물 발표회를 통해 입상한 전적이 있었다. 한 번 받은 상을 또 노릴 이유는 없었다.

대신 간만에 생긴 여유를 허투루 사용할 생각도 역시 없었다.

크리스티나는 느지막하게 일어나 쥬다스를 찾아가던 길이었다.

‘내일 있을 디너파티 입장권을 드려야 하니까. 간 김에 물어보고 싶은 부분도 몇 가지…….’

와장창.

상념에 빠져 있던 크리스티나는 눈앞에서 깨져 나간 비커와 유리 그릇 따위를 내려다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와 부딪힌 건 아니었다. 급하게 카트를 끌다 제 발이 꼬여 넘어진 소녀가 시야에 들어왔다.

쑥색 미트볼 같은 간단한 음식이 함께 나뒹구는 걸 보아 성분 실험 중이던 힐링 푸드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 낸 그녀는 한숨을 쉬며 고꾸라져 있는 소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괜찮나?”

“우…… 우으…….”

소녀는 창피함과 미안함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들었다. 암갈색 긴 머리카락에 힐링 푸드가 묻어 더러워져 있었다.

“죄, 죄송해요.”

“이걸로 머리부터 닦아.”

“에?”

크리스티나는 평소 차갑기로 유명했지만 눈앞에서 곤란을 당한 어린아이까지 나 몰라라 지나칠 인성까진 아니었다.

사실 작고 어린 것에는 은근히 약한 그녀는 넘어진 소녀를 향해 자신의 손수건을 건네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앗! 감사드려요. 저기, 전 리이나예요. 크리스티나 님이시죠?”

“나를 알고 있나?”

“그럼요. 헤헤, 크리스티나 님은 제 우상이신 걸요.”

리이나는 수줍게 웃으며 손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닦았다.

차가운 말투에도 아랑곳 않고 낯간지러운 소릴 해대는 리이나를 보며 크리스티나는 작게 혀를 찼다.

“이 내가 존경받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들리는 소문에만 의지하여 판별하진 말도록.”

“직접 보니까 더 멋있으세요! 아니, 아름다우세요……? 암튼 둘 다예요!”

“하……?”

크리스티나는 할 말을 잃고 리이나를 내려다보았다.

공작가의 장녀인 데다 조각 같은 미인, 뛰어난 두뇌를 자랑하는 그녀를 존경하고 따르는 무리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오죽하면 비공식적이긴 하나 학생들 사이에서 그녀의 팬클럽이 생겼겠는가.

하지만 그들도 먼발치에서 자신을 바라만 보거나 지켜주겠답시고 꼬이는 남정네들을 쳐내는 역할을 했지, 지금 리이나처럼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았다.

10살 어린아이의 순수한 애정 공세에 크리스티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 그래. 그럼 난 이만.”

“어, 잠깐만요!”

도도도.

리이나는 그나마 카트에서 쏟아지지 않고 멀쩡히 실려 있던 초코바 하나를 크리스티나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 스트레스가 많을 때 먹으면 머릿속이 개운해지는 힐링 푸드예요. 일종의 정신력 회복? 맛도 달콤해서 좋아요!”

“난.”

먹을 음식에는 까다롭다고 말하려던 크리스티나는 헤헤 웃는 리이나의 표정을 보고 이내 뒷말을 삼켰다.

대신 떨떠름한 표정으로 초코바를 손에 쥐었다.

그러는 사이 학원 메이드들이 다가와 쏟아진 파편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힐끗 쳐다본 크리스티나는 초코바를 쥔 채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리이나가 작게 손을 흔들었다.

“혹시 아픈 곳이 생기면 3호 양호실로 찾아와 주세요. 저, 치유술을 배우고 있으니까……!”

3호라면 실내 체육관에 붙어 있는 공간이었다. 학교 지리를 머릿속에 꿰고 있는 크리스티나는 돌아보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능이라면 대부분 그렇듯이, 치유술은 상당히 귀한 재능이었다. 우연한 만남이었어도 쓸 만한 재능은 기억해 둘 필요가 있었다.

작은 사건을 뒤로한 채 크리스티나는 정령학 연구소에 도달했다.

다 함께 가기로 했던 디너파티는 크리스티나가 대표로 신청했다.

입장권 분배 및 여타 용건이 있을 경우를 대비하여 쥬다스는 축제 기간 동안 자신이 주로 머물 장소를 미리 일러두었다.

바로 정령학 연구소였다.

“…….”

크리스티나는 정원에 들어서며 주변을 빙 훑어보았다.

형형색색 피어오르기 시작한 키 작은 꽃나무와 짧은 잔디, 탑처럼 쌓여 있는 흙무더기와 작은 연못 등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늘 깔끔하고 고고한 스타일을 추구하던 크리스티나였기에 이러한 정원은 별로 익숙한 형태가 아니었다.

짹짹.

새 두 마리가 나무 위에 앉아 지저귀고 있었다. 멈춰 선 채 그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크리스티나의 뒤에서 포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손님이 오신 모양이네요.”

정령학 교사 이사벨이었다.

따뜻하게 미소 짓는 교사를 보며 크리스티나는 가볍게 자신을 소개했다.

“크리스티나입니다. 이곳에 쥬다스 님이 계신다 하여.”

“아아, 쥬다스 님을 찾아오셨군요. 그분도 마침 정원에 나와 계실 텐데. 연구소 안으로 들어와서 기다릴래요?”

“아니, 직접 둘러보겠습니다.”

“그래요. 후후.”

이사벨은 활짝 웃어주곤 꽃나무를 마저 정돈하기 시작했다.

이 정원은 교사인 그녀가 직접 관리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녀의 취향을 듬뿍 담아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유지하게 되었다.

후두둑.

땅속에서 튀어나온 이사벨의 정령 휴가 나무들마다 고르게 양분을 흡수할 수 있도록 도왔다.

땅속성 정령이자 나무 특성 정령인 휴는 이사벨이 하는 정원 관리에 가장 큰 기여를 하고 있었다.

두더지처럼 생긴 정령 휴에게 잠깐 시선을 줬던 크리스티나는 이내 발걸음을 떼어 정원 안으로 들어갔다.

정원은 별로 크지 않았다. 하지만 나무가 많아 시야가 그리 깨끗한 편은 아니었다. 얼기설기 자라난 나뭇가지를 피해 이동하자 조그만 연못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연못에 발을 담근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아 있는 작은 황자의 모습을 함께 발견할 수 있었다.

“……왔느냐.”

“아.”

저도 모르게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크리스티나는 어느 틈엔가 눈을 뜨고 자신을 돌아보는 쥬다스의 부름에 그녀답지 않게 멍청한 반응을 보였다.

“크리스티나야.”

쥬다스는 그녀의 실수에도 개의치 않고 자신의 옆자리를 톡톡 두들겨 보였다.

다소 민망한 기분이 되어버린 크리스티나는 얌전한 고양이처럼 그의 부름에 옆으로 다가갔다.

같은 학생 신분이라 한들 그녀 스스로가 인정한 황자를 계속 서서 내려다볼 수도 없었기에 하는 수 없이 그 곁에 주섬주섬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여기 입장권을.”

“허허, 가져다주어 고맙구나. 찾아오는 데에 어려움은 없었누?”

그녀가 건넨 입장권을 교복 주머니에 잘 갈무리한 쥬다스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쥬다스 님은 왜 굳이 이런 데에 나와 계셨는지요?”

“조금 더워서 말이다.”

‘……덥다고?’

크리스티나는 재킷 위로 느껴지는 서늘한 아침 공기에 팔을 쓸어보았다.

봄이라곤 해도 아침에는 제법 날이 쌀쌀했다.

쥬다스는 재킷도 없이 흰 셔츠만 입은 채 바지를 걷어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그를 본 크리스티나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몸이 약하다 하지 않으셨나요? 혹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으음, 걱정해 주는 게냐? 고맙다, 크리스티나야.”

황자의 건강을 걱정한 건 사실이었으나 그걸 다시 말로 들으니 상당히 민망했다.

크리스티나는 그의 시선을 피해 연못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 그들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

정령학 수업을 함께 듣는 아벨이었다.

크리스티나의 고운 바다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아벨은 후닥닥 고개를 숙이며 말을 더듬었다.

“바, 방해할 생각은, 없었, 는…….”

“좋은 아침이구나, 아벨.”

“네, 네. 그,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아벨은 여전히 땅을 내려다보며 우물쭈물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며 크리스티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작고 볼품없는 체구에 땅으로 꺼질 듯 처진 어깨, 소심하여 눈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성격, 전체적으로 한심함 그 자체였다.

마치 예전의 쥬다스를 보는 듯했다.

‘하지만 이젠 정말 딴사람 같군.’

그녀가 기억하던 과거의 쥬다스는 어쩌면 저기 선 아벨보다 더 모자랐던 것도 같았다.

그때의 쥬다스는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는 자체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무기력했다. 다시 생각해 봐도 도저히 매치가 되지 않았다.

그땐 몰랐다. 인형 같기만 하던 윤곽이 지금처럼 부드럽고 생기 있는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얼굴이란걸.

“허어, 축제날 아침부터 배움에 열정적이로세. 그래, 무얼 알고 싶으냐?”

따뜻한 음성에 아벨은 망설이며 고개를 들었다. 아벨이 정령학 교사 이사벨이 아닌 쥬다스를 찾아온 이유는 단순했다.

둘 다 친절했지만, 쥬다스는 조금 더 느낌이 편안했다.

같은 처지였던 자라 그런지, 또래인 탓인지, 아니면 무언가 다른 요소가 작용했는지는 아벨 자신도 몰랐다.

하지만 그에게라면 부담 없이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곁에 크리스티나가 있을 줄은 몰랐지만.

외톨이로 지내온 아벨도 크리스티나에 대해선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들을 생각이 없어도 듣게 되어 있었다.

마치 지금 루바흐를 휩쓸고 있는 백로황자에 대한 소문처럼 크리스티나는 늘 학교의 중심이 되어 반짝이는 존재였다.

그런 그녀가 쥬다스의 곁에 앉아 있으니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여기서 어울린다는 표현은 이성 관계라기보단, 어린 동생을 돌보는 누나 같은 느낌이었다.

어쨌든 어떤 느낌이든지 간에 아벨은 그녀와 자연스러운 관계를 형성한 쥬다스가 무척이나 부러웠다.

부러운 감정을 내리누른 아벨은 용기를 내어 질문했다.

“처음, 정령과 계약할 때, 에 대해…… 어떠셨는지.”

“처음 계약할 당시 말이더냐.”

쥬다스는 가만히 턱을 짚었다.

친구이자 가족 같은 정령왕들을 처음 만났던 날. 그날을 그가 절대 잊을 리 없었다.

‘이그레트’는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정령의 존재를 느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정령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로 선명하게 정령을 보고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그랬기에 처음엔 그가 유령을 본다며 돌팔매질한 사람들도 있었다.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을 보고 듣는 이그레트를 기분 나쁘게 여기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처음엔 ‘계약’이 무언지 몰랐었지. 계약을 했던 순간조차 말이다.”

그리고 정령왕들을 만났던 그날.

그때가 바로 이그레트의 나이 17세가 되던 해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으음, 사정이 생겨서 이번주 주말은 연재를 쉽니다.

....혹시 간절히 부르시면 소환될지도(?) 나와 계약해서 마법소녀가 되어줘! ...는 역시 농이니 무시하셔도 좋습니다.(..)

크리스티나가 이사벨의 정령 휴를 볼 수 있었던 건 실체화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사벨은 루바흐의 정식 교사인만큼 정령을 실체화하는 정도는 무리 없이 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작중에서 로맨스를 다루지 않을 뿐이지, 등장인물들이 평생(..) 솔로로 남는 것은 아닙니다 ㅎㅎ 자세한 건 스포의 여지가 있기에 여기까지만...

아참, 모바일 버전으로 설문 참여하는 법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글을 올릴 땐 늘 피시를 이용하는 터라...ㅠㅠ 관심 가져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럼 이번 토요일, 일요일은 쉬고 월요일(화요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ㅎ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사랑과 응원에 늘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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