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41화 (4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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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성장통

같은 시각.

이사벨, 크리스티나와 함께 쓰러진 쥬다스를 황급히 양호실로 데려가 진찰을 기다리던 아벨도 공지를 읽고 있었다.

“……!”

프리미어 페이퍼를 쥔 손이 덜덜 떨려왔다.

아벨은 공지를 읽고 또 읽었다. 틀리기를 바라며 반복적으로 읽던 그의 표정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거짓, 말.”

공지에는 그의 고향인 투르케 사막이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시선을 뗄 수조차 없었다.

<투르케 사막 부족민 전멸이 보고됨.>

‘왜 하필? 이 투르케가 우리 투르케인가? 혹 다른 투르케 사막이 있진 않을까? 전멸이라면, 전부 다 죽…….’

아벨은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쓰러지다시피 앉으며 대기실 의자 팔걸이에 머리를 크게 부딪쳤지만 고통을 느낄 정신이 아니었다.

부딪힌 머리에서 스멀스멀 피까지 흘러내렸다.

“저기, 다치셨어요! 괜찮아요?”

쥬다스의 상태가 좋지 않아 바쁘게 치료사를 도와 약품을 나르던 리이나가 그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따끈하게 적신 물수건으로 피를 닦아내었지만 금방 또 얼굴선을 타고 핏물이 흘러내렸다.

“아…… 아.”

아벨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진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과 부족민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뇌리에 떠올랐다.

“저기…… 요. 많이 아픈가요? 일단 제 치유술이라도.”

걱정스럽게 상처를 살핀 리이나가 치유력을 전달하기 위해 아벨의 손을 감싸려던 순간이었다.

팍!

“……!”

아벨이 리이나를 밀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놀라 넘어진 리이나를 멍하니 쳐다보던 아벨은 이내 비틀거리며 양호실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는 여전히 프리미어 페이퍼가 눈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루바흐는 축제 분위기에 더불어 사령술사에 관한 이야기로 완전히 달아올라 있었다.

누군가의 불행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이야깃거리였다.

겉으로는 걱정하는 내용이었지만 새로운 악의 등장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로 가득했다.

“대박. 사막을 통째로 얼렸다는데?”

“말도 안 돼! 그게 가능해? 사막이면 되게 뜨거운 곳 아니야?”

“괜히 제네럴급이란 소리가 튀어나왔겠냐. 사령술사라잖아. 사람의 생기랑 영혼까지 탈탈 털어먹는 괴물이라고.”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걷던 아벨은 천천히 귀를 막았다.

“……아니, 야. 그럴, 리가…….”

「…….」

그의 불안한 정신에 반응한 정령이 점차 형체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벨은 그 사실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불안해져 있었다.

그는 귀를 막은 채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거짓말이야. 그럴 리가 없어. 투르케가, 그런 식으로, 모두.”

두서없이 이어지던 중얼거림을 따라 정령의 형체는 점점 그 크기를 키워갔다.

우우- 우우우.

수백 명의 관중이 야유하는 것과 비슷한 소음이 흘러나왔다.

아벨이 불러낸 정령은 뚜렷한 형태는 없었으나 물을 부어놓은 모닥불처럼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침 안개처럼 희끄무레하던 연기는 점차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정령이 소환자인 아벨의 감정에 감응하기 시작한 탓이었다.

“어? 저 자식 저거, 아벨 아니야?”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학생들이 그를 알아보고 수군거렸다.

“길 한복판에 쭈그리고 앉아서 뭐하는 거지. 어디 아픈가?”

“알 게 뭐야. 기분 나빠.”

정령학 특기로 입학했으면서도 정령과 계약하지 못한 무능력자.

성적도 저조했고 성격마저 음울하여 그를 좋아하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학생들은 그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데도 그냥 지나치고 지나갔다.

친한 사이도 아닌데 괜히 골치 아픈 일에 얽히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아벨은 흩날리는 종이와 그에 열광하는 군중 사이에 서서히 고립되어 갔다.

그리고 마침 공지를 읽고 심각한 얼굴로 쥬다스를 찾아가던 에단과 바이칼도 그를 발견했다.

아벨을 알아본 에단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저자는.”

“아는 사람입니까? 상태가 영 안 좋은가 본데.”

바이칼은 머뭇거리며 다가섰다.

귀를 막은 채 덜덜 떨고 있는 아벨의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봐, 괜찮은 거야?”

“…….”

희게 질리다 못해 이젠 점점 새파랗게 혈색이 죽어가는 아벨을 훑은 바이칼이 머리를 긁적이며 뒤를 돌았다.

“눈이 완전히 맛이 갔네. 거 그러고 구경만 하지 말고 부축하는 것 좀 도와주십쇼.”

“……원래 그렇게 오지랖이 넓은가?”

“댁이 스토킹 하는 누구 덕분에 오지랖 평수 좀 넓혔죠.”

바이칼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본래 다른 학생들과 두루두루 어울리고 다니던 바이칼이지만, 별 볼 일 없는 인물이나 흥미롭지 않은 대상에게까지 관대하게 대하진 않았다.

오히려 평균 이하의 성적을 내거나 한심한 작태를 보이면 하찮게 여기고 조롱하기까지 했다.

그랬던 그가 생각의 한 축을 뒤집도록 만든 대상이 바로 백로황자였다.

사람은 겉으로만 판단할 수 없다. 누구에게나 발전할 기회가 있고,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

쥬다스는 바이칼이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길 계기가 되어주었다.

‘아마 그분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도 마찬가지였겠지.’

예전 같았더라면 아벨을 도울 생각 따윈 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바이칼 역시 지금 모른 척 지나가는 다른 학생들처럼, 아니, 오히려 눈살을 찌푸리며 비난을 퍼부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 생각하니 자연히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를 향해 혀를 쯧쯧 찬 바이칼이 아벨을 부축하기 위해 가방을 내려놓던 순간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마침내 새까만 연기로 형태를 이루어낸 정령이 섬뜩한 안광을 빛내며 포효했다.

「─────!」

쩌엉.

쨍그랑.

순식간에 주변에 늘어서 있던 교사(校舍)의 창문이 동시 다발적으로 깨어져 나갔다.

창문뿐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북적거리며 주변을 오가던 학생들 사이에서 한차례 비명이 쏟아졌다.

“……뭐야?”

“그자로부터 물러서!”

깨져 나간 유리 조각을 보며 주춤거리던 바이칼에게 에단이 단호하게 소리쳤다.

마구잡이로 크기를 불려 나간 정령이 어느 틈엔가 제멋대로 실체화를 하기 시작했다.

바이칼은 의아한 얼굴로 여전히 귀를 틀어막은 채 멍하니 땅을 내려다보는 아벨을 부축해 일으켰다.

“뭡니까, 갑자기 왜.”

“……뒤!”

“엥?”

에단이 굳은 얼굴로 검을 빼어 들며 짧게 소리쳤다.

그답지 않은 다급한 태도를 본 바이칼은 불길한 예감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후욱.

꿀렁이는 그림자가 그의 머리 위를 덮었다.

현실감을 잃게 만드는 생김새에 바이칼은 영혼 없는 미소를 지었다.

“……뭔 개뼉다구 같은.”

「그어어어―」

아벨이 소환해 낸 정령은 원래 무색, 무형에 가까운 존재였다.

자연계 4속성에 속하지 않으며 특수성을 띠고 있어 술사의 정신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다.

도플갱어, 혹은 오토스카피(Autoscopy).

물질계 ‘거울’ 속성인 이 정령은 무엇이든 그대로 복제해 내는 능력이 있었다.

갓 만든 밀랍인형처럼 흐물거리던 정령은 점차 뚜렷한 모습으로 굳어갔다.

정령이 카피한 대상은 바로 앞에 있던 바이칼이었다. 밤색 머리카락부터 루바흐의 교복까지 완벽히 재현해 낸 정령은 그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씨익.

“……!”

웃는 얼굴마저 쌍둥이처럼 똑같은 모습이었다.

코앞에서 자신의 웃는 얼굴을 마주한 바이칼은 등골을 타고 오소소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바이칼의 모습을 본 딴 정령이 느릿하게 양손을 들어 올렸다.

우우웅.

손아귀에 모이는 마력을 눈치챈 바이칼이 바싹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사용하는 마법까지 복제했다고?”

딱히 드러내고 다닌 건 아니었으나 바이칼이 추구하는 학파는 주로 마법 계열이었다.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선 시전 시간이 필요했다.

시전자가 미리 암기한 마법진대로 마력을 모아 재배열해야 하기 때문이다.

배열이 끝나면 시동어를 외치는 걸로 마법 발동이 이루어진다.

자신이 배운 마법이기에 마력이 배열되는 마법진의 형태를 알아본 바이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화염 마법 ‘플레임 스트라이크’! 제길, 멈춰!”

시전 도중 마법진이 깨질 만큼의 방해를 받게 되면 마법은 중지된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바이칼은 자신의 얼굴을 한 정령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까앙!

“……!?”

사람의 피부가 아닌 유리 표면을 쳤을 때와 같은 타격이 되돌아왔다.

그 바람에 바이칼은 벌게진 주먹을 움켜쥐며 고꾸라졌다.

그 순간 정령이 시동어를 읊조렸다.

“플레임 스트라이크.”

꽝 하는 우레 소리와 함께 불기둥이 치솟아올랐다.

바이칼이 서 있던 자리를 새까맣게 태운 화염은 작은 불씨를 남기고 마력을 다해 사라졌다.

에단의 도움으로 후끈한 열기를 간발의 차로 피한 바이칼이 쿨럭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폭발과 함께 아벨도 함께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특이하게도 그는 전혀 피해를 입지 않고 있었다.

“뭐야, 저 괴물은!”

“그는 정령술 특기생이다. 저것 역시 그가 불러낸 정령일 테지만.”

딱히 진짜로 물어보는 건 아니었으나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짐작한 에단이 주저앉은 아벨을 향해 턱짓하며 낮게 자신의 생각을 풀이했다.

바이칼은 황당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정령? 아니, 그럼 왜 우릴 공격하는 겁니까?!”

“……아무래도 그에겐 자신의 정령을 컨트롤할 힘조차 없는 모양이군.”

에단의 말대로였다.

지금 저 거울 속성 정령은 아벨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정령이 감응하는 건 아벨의 정서. 즉 절망과 분노, 비애였다.

이는 술사가 자신의 한계치 이상의 정신력을 소모할 경우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었으며 한마디로 제어를 잃은 정령의 폭주였다.

그리고 이 폭주가 오래 지속될수록 술사인 아벨의 정신은 망가져 함께 미쳐 버릴 수도 있었다.

그 사실까지는 모르는 에단은 차분히 검을 뽑아 든 채 정령을 응시했다.

아마 소란이 일어났으니 경비가 달려오겠지만, 일단은 이대로 정령의 폭주를 방치할 수만은 없었다.

에단은 검을 바로 잡으며 한 발짝 다가섰다.

「…….」

바이칼의 모습을 한 정령은 에단의 접근을 인식하고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스르륵 모습을 변형시켰다.

“……저놈의 능력은 ‘복제’인가.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악취미로군.”

이번에는 에단의 모습을 똑같이 본 딴 정령은 검은 기운을 넘실거리며 이를 드러내 웃었다.

정작 정령을 소환해 낸 아벨은 무슨 상황이 벌어지는가도 인지하지 못하고 눈과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정령은 에단과 같은 검을 들어 그를 겨누었다.

마치 거울을 보고 검을 겨누기라도 하듯, 두 에단은 서로를 향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포즈로 서 있었다.

탓!

그리고 동시에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이그레트>는 제가 판타지를 좋아하기에 쓰는 글입니다. 뭘 바란다기 보단...ㅎ 제 상상 속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자급자족이라고나 할까요.

단지 선취지에 비해 생각보다 많은 관심을 받다보니 가끔씩 격한 비난코멘트들이 들어옵니다. 그럴 때면 상당히 기운이 빠지곤 합니다...만, 이도 당근과 채찍의 일부라 생각하고 힘내야겠지요! 지금의 연재경험을 양분으로 차기작에선 좀 더 짜임새있는 글을 쓰게 되길 바랄 뿐입니다.ㅎㅎ

그냥,

제 글을 읽으시는 독자님들이 잠깐이나마 즐거웠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제 유일한 바람입니다.

(참! 주인공 이름은 egret(왜가리/백로)와 regret(후회) 두 단어에서 따왔습니다. ...야구르트 아닙니닷ㅎ)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사랑과 응원에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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