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42화 (4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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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성장통

쥬다스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온몸이 타는 듯이 뜨거웠다.

목과 코를 드나드는 숨이 한겨울 북풍처럼 차다가도 내쉴 때는 불길처럼 뜨겁게 달궈져서 나갔다.

‘이그레트’로 살았을 적에조차 겪어본 적 없는 고통이었다.

「이그레트, 정신이 들어?」

유니가 그의 이마 위에 주저앉아 걱정스레 말했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인 쥬다스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유니는 파다닥 날아올라 그의 어깨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지금 상태가 많이 나빠. 좀 더 쉬어야 해.」

「웅, 웅. 누워 있으라요.」

그가 덮고 있던 이불 위에서 뒹굴고 있던 토니도 한마디 거들었다.

쥬다스가 정신을 잃은 동안 내내 포근히 감싸주고 있던 루니는 그저 자세를 유지한 채 유리알 같은 눈동자로 응시할 뿐이었다.

세 정령이 각자 나름대로 표현하는 걱정에 쥬다스는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은은히 미소 지었다.

“고맙구나.”

「목도 아플 텐데 그냥 말하지 마. 응?」

“…….”

확실히 소리를 낼 때마다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찾아왔다.

오랜 세월을 지내오고, 심지어 죽음까지 경험한 그였기에 겉으로나마 차분히 견딜 수 있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지금 정신을 차리고 앉아 있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다.

온몸의 뼈가 흐물흐물 녹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그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뼈대와 살점이 빠르게 그 크기와 구성을 달리하는 중이었다.

평범한 인간의 정신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으나, 쥬다스는 담담한 얼굴로 이를 인내했다.

쥬다스는 주변을 살짝 둘러보곤 자신이 실려 온 장소가 익숙한 곳임을 눈치챘다.

최근 봉술 수업을 마친 뒤면 늘 제집처럼 드나들던 양호실이었다.

「좀 더 쉬어. 너 지금 일어나면 힘들단 말이야.」

「그래, 자고 일어나면 한결 나아질 거다.」

「이그레트, 아픈 거 싫다요.」

정령들은 그가 다시 잠들길 바랐다.

아무리 지금 느끼는 고통이 성장을 위함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쥬다스가 고통을 겪는 자체를 막고자 했다.

“-유니.”

하지만 정작 쥬다스는 다시 잠들 생각이 없었다.

정령들이 그에게 예민하게 반응하듯, 그 역시 날 때부터 정령을 예민하게 느끼는 존재였다.

그의 귀에는 자신의 세 정령 외에, 또 다른 생소한 정령의 울부짖음이 선명하게 들리고 있었다.

‘……저건, 진정시키지 않으면.’

정령의 폭주는 곧 술사의 정신 붕괴로 이어진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쥬다스는 도저히 그 울음을 외면할 수 없었다.

후웅.

침대에 앉아 있던 그의 몸을 청량한 바람이 휘감기 시작했다.

일단 술사가 바란 이상, 정령인 유니는 그의 소망을 거부할 수 없었다.

걱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쥬다스를 바라보던 유니는 하는 수 없다는 듯 녹색 바람을 일으켜 그를 감싸 안았다.

팟!

바람의 정령술사가 사용하는 이동술, ‘바람의 인도’였다.

쥬다스는 바람에 휩싸여 순식간에 종적을 감추었다.

“열이 이대로 더 오르면 곤란해. 얼음은 너무 차가워서 역효과가 날 수 있으니 미지근한 물주머니를 올려놔. 그리고 일단 리이나 네가 치유력을 최대로 불어넣고……!”

리이나에게 지시를 내리며 다급하게 상태를 보러온 치료사가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텅 비어 있는 양호실 침대를 멀거니 내려다본 치료사는 한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황자 전하, 도대체 그 몸으로 어딜 가신 거랍니까?”

아직 온기가 남은 이불만이 침대 위에 덩그러니 구겨져 있을 뿐이었다.

* * *

두 에단은 빠른 속도로 맞붙었다 떨어지길 반복했다.

정신없이 펼쳐지는 근접전에 지켜보던 바이칼로서는 이제 누가 진짜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버렸다.

그는 에단이 가문에서 훈련받은 검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니 과연 인재라 불릴 만한 자임을 깨달았다.

마법으로 지원을 하고 싶어도 워낙 뒤엉켜 싸우고 있기도 했고, 또 자칫 같은 편을 공격하게 될까 염려되어 바이칼은 두 손을 놓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정령과 검을 맞댄 에단은 힐끗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공격을 하면 나도 함께 피해를 입는 건가?’

몇 번 합을 주고받는 사이, 정령의 팔을 살짝 그었었다.

본래는 잘라내려던 게 그 출중한 검술 실력마저 카피해 낸 정령 탓에 살짝 베는 수준에 그쳤다.

단단한 유리를 긁듯 흰 가루가 흩날렸고, 동시에 에단 자신의 팔에도 따끔하며 검상이 생겨났다.

마음 놓고 공격하기도 애매한 상대였다.

에단은 미간을 좁히며 검을 쥔 손아귀에 힘을 꽉 쥐었다.

‘설마 저 정령은 술사를 처리해야만 사라지나.’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아벨을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의미한 합이라는 건 알았지만 멈출 수는 없었기에 에단은 다시 검을 고쳐 잡고 정령과 맞부딪쳤다.

그를 보며 난감한 표정으로 손을 쥐락펴락하던 바이칼의 시야에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는 아벨이 들어왔다.

바이칼은 황급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이봐! 정신 차려. 저거 네 정령 맞지?”

“…….”

“젠장,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고 있어? 엉?”

호통을 쳐도 소용이 없자, 바이칼은 상대의 어깨를 우악스레 움켜잡고 흔들었다.

“이러다 누구 하나 다치기라도 하면 너 인마, 퇴학이야! 정신 좀 차리라고!”

‘퇴학’이란 말에 그제야 아벨의 고개가 천천히 들려졌다. 넋이 나간 얼굴로 바이칼을 올려다본 아벨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안 돼.”

“뭐?”

“모두 내게, 기대를, 걸고 계셨는데.”

바로 눈앞에 둔 바이칼이 아니라 아주 먼 곳을 바라보듯 아벨의 잿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벨은 귀를 틀어막고 있던 손을 내리며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다 상관없어졌어. 이제 돌아갈 곳이…… ‘투르케’는, 이 세상에, 없어.”

“‘투르케’? 너 설마 고향이.”

“흐…….”

사람이 너무 큰 슬픔과 맞닥뜨리면 눈물조차 나지 않는다.

아벨은 건조한 웃음을 흘리며 멍하니 자신이 소환한 정령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술사에게 접근한 바이칼을 알아차린 정령이 에단에게 겨누고 있던 검을 회수하며 돌아섰다.

“……분해.”

「억울해.」

아벨의 말을 따라 정령이 함께 입을 열었다.

“허무해.”

「전부 의미 없어.」

“왜지?”

「다른 녀석들은 오늘도 평범한 하루인데.」

정령은 완벽히 아벨의 감정을 투영해 내고 있었다.

에단의 모습을 한 정령이 읊조리는 말은 바이칼에게도 똑똑히 잘 들렸다.

오갈 곳 없는 분노와 슬픔을 토해내기라도 하듯 아벨이 쉰 소리로 말을 맺었다.

“……왜, 하필 나야…….”

쉬익.

급격하게 소용돌이치는 술사의 감정에 공명하느라 움직임을 멈춘 정령을 향해 에단이 날카롭게 검을 휘둘렀다.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어깨를 노린 깔끔한 공격이었다.

정령은 여전히 접근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에단의 검이 정령에게 닿으려는 순간, 그들 사이에 나타난 소년이 맨손으로 그의 검을 쳐 냈다.

텅!

사람의 손과 날붙이가 맞닿은 것치곤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튕겨져 나가는 검을 재빨리 회수한 에단이 소년을 보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쥬다스 님?”

긴 은발이 녹색 바람결을 머금고 어지럽게 흩날렸다.

자애로운 빛을 담은 금안은 그에게 익숙한 것이었지만, 어딘가 묘하게 느낌이 달랐다.

쥬다스는 그의 검을 쳐 낸 손을 천천히 내렸다.

에단은 그 손끝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물인가.’

푸른 물이 쥬다스의 손을 글러브처럼 감싸고 있었다.

단순한 물은 아니고 정령의 힘이 작용하여 응집력이 견고해진 상태의 물이었다.

아마도 저것이 손을 보호해 주면서 검을 튕겨낼 정도의 장력을 발휘한 모양이다.

“진정하련, 에단. 이 아이는 거울의 정령이니 섣불리 공격해서는 안 된단다. 품고 있는 성질이 말 그대로 ‘거울’이나 다름없으니, 무슨 충격을 가하든 고스란히 네게로 되돌아갈 것이야.”

“……감사합니다. 한데 괜찮으신 겁니까?”

쥬다스가 난입한 이유는 에단이 반사된 공격을 받지 않도록 그를 지켜주기 위함이었다.

이를 깨달은 에단이 감사를 표하며 동시에 쥬다스의 모습에 의문을 표했다.

쥬다스는 양호실에서 지급된 새하얀 환자복을 입고 있었는데 거기에 더해 온몸에 열이 끓어올라 식은땀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앞머리를 축축하게 적실 정도로 흐른 땀방울이 턱 끝까지 흘러 방울졌다.

척 보기에도 상태가 매우 나빠 보이는 행색이었으니 에단의 걱정은 당연했다.

하지만 때가 영 좋지 않았다.

스스슷.

거울의 정령은 순식간에 제 앞을 막아선 쥬다스의 모습으로 복제해 냈다.

황조 적통을 상징하는 은발과 금안조차 똑같이 재현되었다.

이를 본 쥬다스는 꿈에서 본 과거의 ‘쥬다스’를 기억해 내고 살짝 표정을 굳혔다.

“아이야, 네가 그럴수록 아벨은 더욱 힘들어할 게다.”

「이미 나락이야.」

정령은 무감정하게 속삭였다.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완전히 전이당했군.’

술사의 감정이 정령을 지배한다.

이제 저 거울의 정령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쥬다스의 모습을 베낀 정령이 손바닥을 펼치자, 그 안에 녹색 바람이 몰려들었다.

그가 다루는 바람의 정령왕 유니의 힘이었다.

겉모습뿐 아니라 가지고 있는 능력까지 완벽하게 복제할 수 있는 정령의 힘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물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쥬다스였으나, 그는 큰 감흥 없이 가만히 턱을 짚었다.

“흠…….”

“정령이 다른 정령의 힘도 복제할 수 있는 겁니까?”

“거울에 편파가 있겠느냐. 상에 비친 것이라면 무엇이든 똑같이 만들어낼 수 있을 터. 또한 가해진 충격도 고스란히 반사해 낼 수 있으니 이것 참. 까다로운 상대로구나.”

말은 그렇게 했어도 쥬다스의 표정에선 긴박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여유를 확인한 에단은 들고 있던 검을 도로 조용히 갈무리했다.

바로 코앞에서 바람의 기운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흔들림 없는 결단이었다.

그만큼 에단이 쥬다스를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벨의 곁에서 그를 지켜보던 바이칼이 당황하여 외쳤다.

“위험합니다!”

“괜찮다, 바이칼. 너는 아벨 그 아이가 다치지 않게 데리고 물러서주겠느냐?”

힘 있는 금안과 마주한 바이칼은 뭐라 더 따지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그는 멍하니 넋이 빠진 아벨을 끌어다 뒤로 옮겨 놓았다.

자신의 술사를 건드린 걸 알아차린 거울의 정령이 휙 그쪽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후웅.

녹색 바람이 사납게 날뛰며 그쪽으로 몰려들었다.

“……!”

찢어발길 기세로 바이칼을 향해 달려드는 바람은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바이칼이 놀라 눈을 부릅뜨는 순간, 달려들던 바람이 우뚝 허공에 정지했다.

파스슥.

바람은 그대로 산산이 허공에 흩어졌다.

공격에 실패한 정령이 분노가 깃든 눈으로 쥬다스를 쳐다보았다.

“그 이상은 곤란하구나.”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본래 이번 화에 썼던 후기는 너무 우울(..)하여 삭제하였습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따뜻한 응원과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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