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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성장통
「복제품은 진품을 이길 수 없는 법이거든. 오랜만에 만난 건 기뻤지만, 이건 엄연히 하극상이라고. 어디서 함부로 내 힘을 흉내 내려 들어?」
유니는 팔짱을 낀 채 헹 콧방귀를 뀌었다. 정령왕인 그녀와 달리 거울의 정령은 그저 물질계에서 파생된 특수체일 뿐이다.
자연계 정령과는 달리 각 특성마다 개체수가 한 개뿐인 물질계 정령이었지만 그들에게도 분명 계급은 존재했다.
일단 물질계는 자연계 정령왕보다는 계급이 낮았다. 정령왕의 지배하에 있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뛰어넘는 힘을 가진 건 아니었다.
자신보다 높은 등급의 힘을 흉내 낸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자연계 법칙상, 그가 바람을 움직이고자 하는 의지보다 정령왕의 의지가 앞섰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 쥬다스의 모습을 취한 건 명백히 거울 정령의 실수였다.
만일 눈앞에 본체가 없다면 그 힘은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쥬다스는 그 앞에 있었고 더 이상 폭주를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토니.”
쥬다스가 팔을 내젓자, 땅에서 휘리릭 솟아오른 나무뿌리가 거울 정령을 칭칭 옭아매었다.
「……!」
거울의 정령이 풀어내려 발버둥 칠수록 뿌리는 더욱 거세게 그를 휘감았다. 움직임이 포박당한 정령에게 쥬다스가 천천히 다가섰다.
“미안하구나. ……잠시 잠들어줘야겠다.”
「싫어. 괴로워. 아파.」
「……너 말이야. 그 얼굴로 그런 말 하지 말아줄래?」
유니가 쥬다스의 얼굴로 고통을 호소하는 정령을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토니와 루니도 이에 동조했다.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요.」
「진짜에겐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투정이로군.」
「아무튼, 좋은 말로 할 때 얌전히 굴어. 지금 이그레트도 상태가 안 좋단 말…….」
「싫어!」
콰아아!
거울의 정령을 중심으로 바람과 물이 뒤섞여 요동쳤다. 심지어 이번엔 토니의 힘마저 복제하여 땅이 지진이라도 난 듯 우릉 울렸다.
흔들리는 대지 위로 바람과 뒤섞인 물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흡사 용트림하는 토네이도를 보는 듯했다.
강력한 돌풍에 의해 유리 조각이 휩쓸려 날아올랐고 갈라진 땅 사이로 뜨거운 증기가 산화하기 시작했다.
마법진도 제물도 필요 없다. 술사의 바람만 있다면 자연의 모든 정령이 그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그 뜻이 살육과 파괴에 있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의 학생들이 죄 도망가서 없었기에 망정이지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쥬다스는 자신이 다루는 힘이 만들어내는 자연재해를 가만히 응시했다.
거울은 비치는 자의 모든 것을 흉내 낸다. 흉내 낸 힘이라 할지라도 그가 다루는 4속성 정령왕의 힘은 어마어마한 효과를 내보였다.
오용되거나 남용되어서는 안 될 힘이었다. 쥬다스는 그 사실을 다시금 체득하며 정령에게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에게 있어선 날뛰는 자연현상도 전혀 위협이 아니었다. 마치 폭풍의 눈처럼 쥬다스가 향하는 자리에는 한없는 고요가 흘렀다.
거칠게 폭주하는 정령을 물끄러미 바라본 쥬다스가 손을 들어 올려 그 이마를 톡 짚었다.
“잠들어라-”
뚝.
모든 자연현상이 멈추었다. 동시에 쥬다스의 모습을 하고 있던 정령은 흐물흐물 녹아 다시 본래의 뿌연 연기처럼 되돌아가 버렸다.
쥬다스가 강제로 술사와 정령의 공명을 끊어버린 탓이었다. 정령의 실체화가 풀리면서 술사인 아벨도 함께 정신을 잃었다.
쓰러진 아벨을 붙들고 앉은 바이칼이 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3속성?”
순간이었지만 분명 지진이 일어나며 땅에서 나무줄기 같은 게 솟아올랐었다.
정령에 대해 잘 모르는 바이칼이었어도 땅을 울리고 나무를 조종하는 힘이 물이나 바람 속성이 아니란 사실 정도는 쉽게 유추해 낼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 힘을 목격한 에단은, 그보다 다른 의미로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쥬다스 님, 그 모습은.”
“왜 그러는고?”
쥬다스가 평소처럼 웃으며 에단을 돌아보았다. 어느 틈엔가 바닥에 질질 끌리던 환자복이 무릎께까지 올라와 있었다.
마냥 아이 같던 얼굴도 턱 선이 날렵해지고 묘하게 윤곽이 뚜렷해져 좀 더 사내다운 인상을 풍겼다.
한참 내려다 봤어야 할 키가, 이젠 제법 또래라고 볼 수 있을 만큼 자라있었다.
15살인 에단에 비하면 아직 작은 편이었지만 분명히 전에 비해 자라난 모양새였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이루어진 변화에 에단이 천천히 그 앞에 무릎 꿇었다.
“…….”
놀라야 하는 건지, 경위를 물어야 할지, 그도 아니면 걱정해야 할 지 통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에단은 백로황자에게 남겨졌던 단 하나의 문제가 드디어 해결되었음을 알았다.
“감축드립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희미하게 마주 미소를 짓던 쥬다스는 이내 다시 정신을 잃었다. 풀썩 쓰러지는 몸을 붙들어준 에단이 황급히 그 안색을 살폈다.
그동안 평온한 표정으로 견딘 것이 무색할 만큼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정신을 놓는 순간까지 꽉 다물고 있던 잇새에선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무리 정신력이 강하다 한들 쉬이 견디기 힘든 끔찍한 고통이 쥬다스의 전신을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곧장 경비대가 달려왔다.
거울의 정령을 직접 대면한 건 에단과 바이칼, 쥬다스뿐이었기에 경비대는 갑작스러운 소동의 근원을 정확히 짚어내진 못했다.
다만 정령술의 자질을 가지고 있던 아벨이 폭주했다는 사실만큼은 감출 수 없었다.
“정령술 특기생? 위험했군.”
들것에 실려 가는 아벨을 빤히 쳐다보던 경비 대장이 혀를 찼다.
루바흐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비대는 엄선된 실력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무예가는 물론이고 마법사와 치료술사가 적절히 배치된 조합이었다.
이들은 지금처럼 이능을 가진 학생이 폭주하는 상황을 종종 보아 왔다.
그럴 경우 진압하는 과정에서 대원이 심하게 다치거나 폭주한 학생을 다치게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상황을 기록하는 경비 대장의 눈이 날카롭게 주변을 훑었다. 그리고 이내 손을 들어 대원들에게 확인했음을 알렸다.
정황을 파악하는 것도 좋지만 일단 쓰러진 학생들의 안전이 우선이었다.
사인이 떨어지자 쥬다스는 아벨과 함께 다시 양호실로 옮겨졌다.
그로부터 하루가 꼬박 지난 후에야 쥬다스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끔찍했던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오히려 그전보다 훨씬 가벼운 느낌마저 들었다. 오래 누워 있었던 탓에 뼈마디가 뻐근한 걸 빼면 컨디션이 아주 좋았다.
쥬다스가 몸을 일으키자 마침 그를 간호하고 있던 리이나가 활짝 웃으며 따뜻한 물이 담긴 컵을 건네 왔다.
“일어나셨어요? 열은 밤새 내렸지만 언제 또 상태가 악화되실지 몰라서……. 아직 아픈 곳이 있나요?”
“으음, 지금은 아주 기운이 넘친단다. 고맙구나.”
“아.”
리이나는 순간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쥬다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원래도 부드럽고 따뜻한 분위기였지만, 몸이 자란 지금은 유아적인 인상을 벗어나 확실히 어른스러운 면모가 부각되었다.
선한 기운을 담은 금안이 잘 닦인 보석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래 봤자 아직 12살 소년일 뿐이긴 했으나 10살 리이나에겐 충분히 선배다운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리이나는 어쩐지 다른 사람을 대하는 기분이 들었다가 그리 생각한 것이 민망해져서 배시시 웃었다.
“헤헤, 다행이에요. 그, 일단 다른 치유술사 선생님들이 오셨는데…….”
“깨어나셨군요. 기분은 좀 어떠십니까?”
기록 차트를 들고 들어온 중년 남성이 치유술사 특유의 붉은 가운을 펄럭이며 쥬다스 앞에 섰다.
가운에는 황실의 문양이 박혀 있어 그가 황궁에 소속된 치유술사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쥬다스가 문양에 시선을 주자 치유술사는 짧게 헛기침을 하고 침대 앞 간이의자에 걸터앉았다.
“제 이름은 루카스 오웬, 황궁 소속 최고위급 치유술사입니다. 지난 이틀간 황자 전하의 몸에서 급격한 성장이 이루어졌습니다. 멈추었던 성장을 단 이틀 밤 만에 재생하는 일은 기록에 없어 대처가 늦었습니다. 면구스럽습니다.”
“고맙네. 경과가 어찌 되었든 지금은 이리 건강하지 않은가.”
상대가 그를 ‘황자’로 대우했기에 쥬다스 역시 그에 알맞은 예법을 취했다.
품격 있는 어투와 부드러운 눈빛을 마주한 치유술사 루카스가 의외라는 시선을 보내며 말을 받았다.
“……예, 말씀대로 현재는 전에 비할 데 없이 건강하시며.”
잠시 뜸을 들인 치유술사는 쥬다스의 손을 잡아 상태를 가늠했다. 리이나로부터 늘 받아오던 것과 같은 분홍색 기류가 손목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루카스는 붙들었던 손을 다시 놓아주며 편안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에 본래 갖추어야 할 체격을 온전히 되찾으신 상태로 보입니다. 이제 앞으로는 정상적인 속도로 발달하실 것입니다. 감축 드리옵니다, 전하.”
「다행이야, 이그레트!」
유니가 포르륵 날아 그의 볼을 껴안고 부비작거렸다.
쥬다스는 그런 유니를 부드럽게 감싸 손바닥 위에 올려두었다.
잠시 그 주변으로 청량한 바람이 머무는가 싶더니 유니의 모습이 실체화되었다.
손가락만 한 작은 소녀의 형상을 한 유니를 발견한 치유술사가 눈을 크게 떴다.
“……맙소사, 정말로 정령이군요! 하면 소문대로 전하께오선.”
파앗.
보글거리는 맑은 물거품 소리와 함께 루니도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황자를 감싸듯이 곁에 붙어 있는 푸른 늑대의 형상까지 똑똑히 확인한 치유술사 루카스의 표정은 경탄과 두려움, 안도가 뒤섞여 복잡한 모양새가 되었다.
“루카스 경, 황실 소속의 치유술사인 자네가 파견된 이유 중에는 아마 나에 대한 경위 보고도 있겠지.”
“……!”
“기왕지사 확실하게 보고 들은 바를 전하게. 그 편이 필요한 바를 적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터이니.”
루카스는 허를 찔린 얼굴을 했다. 빙그레 웃어 보인 쥬다스가 이내 이불을 걷고 일어나 땅에 발을 디뎠다.
“또한, 곧 부름에 응하겠다는 뜻도 함께 전해 주게나.”
“명을 받듭니다.”
따라 자리에서 일어선 루카스가 진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그가 자리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또 다른 손님들이 쥬다스를 찾아왔다.
“쥬다스 님, 상태는 어떠신지……!”
눈을 뜨자마자 세 번째로 듣는 같은 질문이었다. 그럼에도 쥬다스는 허허로이 웃으며 대꾸해 주었다.
“말짱하이. 너희에게 걱정을 끼친 모양이로구나.”
척 듣기에도 생기 있는 목소리에 에단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그와 함께 찾아온 바이칼은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뭐, 당신이라면 멀쩡히 일어나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딱히 걱정 같은 건.”
“허허. 믿어주어 고맙다, 바이칼.”
“……아니, 제가 또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요.”
그렇게 툴툴거리기는 했으나 바이칼 역시 안심한 표정이었다. 그는 쥬다스의 곁에서 실체화하고 있는 유니와 루니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이 둘이 정령왕이란 사실까진 모르고 있었지만 언제 보아도 경이로운 감정이 찾아왔다.
바이칼이 병실 안을 힐끔 훑으며 운을 떼었다.
“그런데…….”
“찾는 것이라도 있느냐?”
“어, 음.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말이죠.”
쥬다스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에단 역시 말로 표현하진 않았어도 내심 궁금했던 부분이었기에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지난 화에 보내주신 응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정말, 정말로 위로가 많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로 심려끼쳐드리지 않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꾸벅)
그리고 담당자선생님과 상의한 결과, '종이책 출판'을 겸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본래 했던 계약을 통째로 뒤집는 이야기였던지라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렸는데 흔쾌히 OK싸인을 주셔서...ㄷㄷ (담당자님, 혹 보신다면.. 사...사랑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글이 아직 초반부인만큼 일정은 어찌될 지 모르겠습니다.
때가 되면 다시 따로 공지드리겠습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과 사랑에 늘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