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44화 (44/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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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성장통

“그게, 하나 더 있지 않았습니까? 정령이요.”

“토니를 말하는 게로구나.”

“……역시 있었습니까?!”

분명 그 힘을 목격하긴 했어도 한 사람이 듀얼을 넘어 3속성 정령과 계약했다는 일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대현자 이그레트가 아닌 이상에야 불가능한 일이……!’

두 눈으로 봐놓고도 긴가민가하던 바이칼이 경악하여 입을 헤벌렸다.

“어, 아니, 그럼 쥬다스 님은 자연계 정령 3속성을. 그러니까 트리플 서머너(Triple-Summoner)라고요?!”

“호오, 그렇게 되는구만.”

정확히는 트리플이 아니라 쿼드(Quard)였지만.

쥬다스는 굳이 그 사실을 정정해 주지 않았다.

이 두 사람에게는 자신이 가진 힘을 보여도 괜찮겠다는 판단하에 토니를 다루긴 했으나 모든 걸 내보일 필요는 없었다.

너무 큰 힘은 도리어 인간관계를 좀먹을 수 있다.

어쨌든 그가 땅, 물, 바람 3속성을 다루는 정령술사인 건 맞으니 거짓은 아니었다.

“대체…….”

바이칼이 머리를 한 대 맞기라도 한 듯 멍하니 되물으려 했지만 그 전에 쥬다스가 먼저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 얘기는 나중에. 찾아온 손님이 더 있구나.”

“예?”

똑똑.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양호실이긴 해도 학원 루바흐의 시설인 만큼 개인 병실이 마련되어 있었으며 이를 쥬다스가 사용 중이었다.

“학생부에서 나왔습니다.”

“들어오십시오.”

상대방은 쥬다스의 허가를 듣고 나서야 문을 열었다.

평범한 갈색 머리에 훤칠한 체격을 가진 청년이었다.

나이는 올해로 스물한 살이었으며 시력이 매우 나빴기에 마법으로 도수가 조절된 파란색 안경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들 앞으로 다가온 청년은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학우 여러분. 저는 학생 부장 ‘사무엘’입니다.”

“반갑습니다. 쥬다스입니다.”

“……에단입니다.”

“바이칼입니다.”

세 사람과 눈을 맞추어 인사를 나눈 학생 부장 사무엘은 본격적인 화두를 꺼내기에 앞서 일단 쥬다스의 안부를 물었다.

짧지만 기분 좋은 대화가 오가고 난 뒤, 그는 뜸 들이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여러 정황상 ‘아벨 투르케’의 정령 폭주가 확실해 보이긴 합니다만 정확한 목격자 진술이 필요하여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루바흐는 사립 기관이 아니라 루바르잔 제국에서 직접 세워 관리하고 있는 공립 시설이었다.

그리고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주로 이 학생부에서 처리했다.

루바흐의 사건이라 함은 귀족 학생들이 대상이다 보니 사안이 커질 경우 학생부에서 개요를 정리해 재판부나 국무부로 넘긴다.

일단 아벨이 폭주한 사건은 재판을 받거나 국무로 처리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기에 아벨은 이미 망한 것과 다름없는 투르케 출신이었고, 또 교정이 파괴된 것 외엔 별다른 인명 피해가 없었다.

물론 학생부라고 해도 학생들이 운영하는 부서는 아니었다. 루바흐를 졸업한 학생들 중 성적 우수자를 선별하여 부서에 채용했다.

대략 18세에서 25세 사이의 졸업생이 학생부에 소속되었다. 학생부 출신의 인재는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새 작위에 봉해지거나 황실 특사에 임명되어 중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학생부란 장래 고위직이 약속된 유능한 인재들로 구성된 엘리트 집단이었다.

“요는, ‘프리미어 페이퍼를 통해 고향의 전멸 소식을 접한 아벨 투르케가 이를 비관하여 이성을 잃고 자신의 정령을 폭주시킨 것’. 맞습니까?”

“과연. 눈에 보인 바를 정확히 압축시킨 명료한 정리입니다.”

“……‘보인 바’라 하심은 여기에 부족한 점이 있습니까?”

학생 부장인 사무엘은 대답을 듣자마자 쥬다스가 다른 얘기를 하고자 함을 간파해 냈다.

학원 루바흐를 엘리트로 졸업한 선배답게 작은 단서도 놓치지 않았다.

쥬다스는 제 손바닥에 앉아 있던 유니를 살짝 쓰다듬어주며 입을 열었다.

“술사와 계약한 정령은 전적으로 술사의 뜻에 따릅니다. 고의로 바라든, 무의식중이든 술사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쥬다스가 살짝 손짓하자 물거품을 실은 녹색 바람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곧 병실 천장에 작은 구름이 안개꽃처럼 피어났다. 그 구름에서부터 물거품이 둥실둥실 비 대신 떨어지기 시작했다.

물과 바람의 합동 정령술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경이로운 광경에 사무엘은 물론이고 에단과 바이칼도 신기한 시선으로 흩날리는 물거품을 쳐다보았다.

톡.

바이칼은 손가락으로 물거품을 하나 터뜨렸다. 바다 속이라도 여행 온 기분이었다.

지금 이 순간조차 세 정령의 시선은 늘 쥬다스를 향해 있었다.

영혼과 영혼이 이어지는 계약을 맺은 이상, 정령은 언제든지 술사의 의지대로 움직인다.

마치 본능과도 같은 귀속 관계였다.

이를 몸소 체험한 사무엘은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그러니 이번 사건도 역시, 그가 의도했던 그렇지 않았던 간에 자신에게 고통을 느끼게 하는 세계를 전부 파괴하길 바랐다고 볼 수 있겠군요. 맞습니까?”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

단호히 고개를 젓는 황자를 보며 사무엘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쥬다스는 그가 예측하지 못했던 변수에 대해 알려주었다.

“아벨 투르케는 자신의 정령을 불러내는 데엔 성공하였으나 계약하지 못했습니다.”

“……계약을, 하지 못했다?”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불안정한 상태의 정령은 술사의 감정에 크게 좌우됩니다. 원인은 아벨 투르케가 맞으나, 결코 그가 바라서 저지른 일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짧게 침음한 사무엘은 안경테를 만지작거렸다.

‘무의식중에라도 술사의 의지를 따른 정령’과 ‘술사의 의지가 아닌 정서에 반응해 멋대로 날뛴 미계약 상태의 정령’은 분명 차이가 있었다.

아벨 투르케에게 죄가 있다면 정령을 현계에 불러낸 데에 있었다.

“…….”

사각사각.

병실 안에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진술서를 작성하는 펜만이 침묵을 흐트러뜨리는 유일한 소음이었다.

기록을 마친 사무엘이 한숨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같은 정령술사이신 쥬다스 님의 증언이니 참고하겠습니다. ……아시겠지만 이능을 가진 학생이 힘의 컨트롤에 실패하여 사건을 일으킨 이런 경우는 우리 루바흐에서 꽤 흔합니다. 의지 여부를 떠나 정령을 움직인 건 그의 힘이므로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어떤 것을 말입니까?”

이대로라면 아벨은 죄인이 되지 않더라도 퇴학 조치가 내려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간 성적이 우수했던 편도 아니었던 데다 정령술 특기생으로 입학한지 3년이 넘도록 성과를 보이지 못했던 학생이었다.

게다가 이번 사건으로 결국은 학교 건물 하나를 못 쓰게 만들고 교정을 망가뜨리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그리고 이를 덮어줄 가문과 재력도 이젠 없었다.

투르케 사막이 멸망한 지금 아벨은 더 이상 귀족 자제라 보기도 어려웠다.

‘이능 중에서도 훈련이 불가능한 정령술사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나 다름없다.’

이건 루바흐의 학생부뿐 아니라 인재를 원하는 권력층의 지배적인 생각이었다.

희귀한 정령술의 자질이 있어도 써먹을 수 없으면 골칫덩이일 뿐이다. 그런 학생 부장의 고뇌를 단박에 날려주는 대답이 들려왔다.

“처분이 난 후, 그 아이의 소재를 제가 맡고자 합니다.”

“……말인즉, 황자 전하께오서 아벨 투르케를 거두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조심스럽게 되묻는 말에 쥬다스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일개 학생으로서 한 말이 아니었다.

다름 아닌 오갈 곳 없어질 아벨을 1황자가 직접 거두어 지원하겠다는 뜻이었다.

사무엘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발톱을 드러냈다 하더니 드디어 자기 사람을 만들기 시작하시는 건가. 그렇다 해도 왜 하필 망한 영토 출신에 이능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한심한 자를.’

그렇지 않아도 평판이 밑바닥에 가 있는 황자였다. 만일 거둔 이가 문제를 일으킨다면 그 허물을 전부 쥬다스가 뒤집어쓰게 되는 만큼 신중해야 할 문제였다.

어쩌면 저 황자의 눈에는 누구도 보지 못한 아벨 투르케의 잠재력이라도 보인 것일까.

사무엘은 복잡한 생각을 머리 한 구석에 밀어두고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뜻대로 하십시오. 아벨 투르케의 처분이 결정 나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학생 부장이 병실을 떠나자 에단과 바이칼은 나름대로의 상념에 빠져 침묵을 지켰다.

우선 쥬다스가 가지고 있다는 3속성 정령의 힘, 그리고 그 힘이 각각 어느 정도일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었다.

거울의 정령이 카피했던 힘만 보더라도 일단 평범한 비기너 수준은 아니었다.

‘뚜렷한 형태를 갖추며 그 정도 파괴력. 그렇다면 물과 바람은 적어도 상급 정령 이상의 힘……. 땅은 제대로 못 봐서 모르겠네.’

정령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바이칼로선 여기까지가 추측의 한계였다.

어쨌든 12살이란 어린 나이에 자연계 정령을 3속성이나 다룬다는 점에서 이미 황자는 보통 재능이 아니었다.

「나도 실체화하고 싶다요!」

바이칼이 제대로 보지 못했다며 아쉬워하는 대상인 땅의 정령왕 토니는 정작 한참 떼를 쓰고 있었다.

「너 또 실체화해서 쓸데없이 마음에 안 드는 사람 보이면 돌부리로 발 걸거나 구덩이 파놓고 그러려고?」

「안 그런다요! 히잉. 나요, 정말 얌전히 있을 수 있다요.」

실체화된 정령은 어느 정도 힘의 통제권을 갖는다.

큰 영향을 미칠 수는 없었지만 간단한 영역에서 자유 의지를 가지고 개입할 수 있었다.

예컨대 술사가 위험한 상황에 먼저 알아차리고 방어해 줄 수도 있다.

4속성 정령왕 중 가장 어린아이 같은 성격을 가진 토니는 그 개입 정도가 꽤 심한 편이었다.

옛날부터 ‘이그레트’를 과보호하는 건 정령왕 넷이 전부 같았지만, 그 방식에는 각자 차이가 있었다.

바람의 정령왕인 유니는 사사건건 이그레트의 일에 개입하려 들었다.

잔소리를 잘하고 수다를 좋아하며 아줌마 같은 구석이 있었다. 대신 상황 판단에 있어서는 제법 이성적이었기에 나설 타이밍과 지켜볼 타이밍을 잘 구분해 냈다.

보통 그가 위험하다 싶은 일이라면 제일 먼저 나서서 비호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에 반해 물의 정령왕 루니는 일단 묵묵히 지켜보는 타입이다. 이그레트의 명령이 아니면 결코 움직이지 않으며 그가 바라지 않는 이상에서야 무슨 일이 있든 끝까지 지켜보려 한다.

어지간하면 끼어들지 않지만 정말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을 경우 앞뒤 안 가리고 폭발한다.

늘 냉철해 보이지만 한 번 화나면 4속성 중 제일 진정시키기 어려운 게 바로 루니였다.

그리고 지금 찡얼대는 땅의 정령왕 토니는, 그야말로 제멋대로였다.

감정 기복이 심하고 참을성이 적어 작은 일에도 크게 반응하는 편이었다.

그랬기에 그들을 소환한 이래로 이그레트가 제일 공들여 통제하고 있는 정령이기도 했다.

그냥 놔두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곤란하게 만들었다.

‘……카니는, 힘을 들일 필요가 없었지.’

쥬다스는 기억 속 불의 정령왕을 떠올리며 작게 웃었다.

아무리 곤란한 일을 일으킨다 해도 그에게 있어 정령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아이들이었다.

곁에 있는 걸로도 모자라 자기도 실체화하여 당당히 그를 지키고 싶다는 토니의 떼를 지켜보며 쥬다스는 가만히 턱을 짚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금요일 주말을 맞아 직장에서 한잔 하고 올리는 중이라... 정리가 좀 덜 되어있습니다. 이에 미리 사과드리며...ㅠㅠ글 올리기 전엔 술 먹으면 안됩니다, 글쟁이여러분,...

으아아ㅏ아ㅏ 알코올에 지지않는다아ㅏ아아아!!

여러분 불금 행복하게 보내셨길 바랍니다. 비록 짧지만은.... 내일은 정상적인 용량으로 찾아뵙겠습니다.ㅠㅠ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애정과 응원, 메세지에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저도 사랑합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슬슬 겨울비도 내리고 있는데, 감기 조심 하세요. ㅎ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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