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45화 (45/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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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성장통

“역시 그 애도 마찬가지일꼬…….”

“예?”

“아니, 아니다. 이제 가보자꾸나.”

카니를 불러내는 건 좀 더 미루어도 상관없을 테였다.

당장 불의 힘이 필요하진 않았으니 그녀가 좀 더 자유를 즐기도록 두어도 되리라.

쥬다스는 그리 생각하며 옷장에 가지런히 걸려 있던 교복을 꺼내 살폈다.

“으음, 아무래도 이건 지금 못 입겠구나.”

7살 체형에 맞춘 교복이 청소년으로 훌쩍 자라난 몸에 맞을 리가 없었다.

새삼 인형 옷처럼 작게 느껴지는 교복을 바라보며 난감한 표정을 짓는 쥬다스를 향해 두 사람이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쥬다스 님. 교복은 왜 갑자기 보십니까? 가다니, 설마 밖에 나가시려고요?”

“……좀 더 쉬시는 편이.”

만류의 뜻이 담긴 에단과 바이칼의 말을 들은 쥬다스가 그들을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디너파티를 모두 함께하기로 약조하지 않았느냐. 크리스티나 그 아이가 기다리고 있을 게다.”

그 말대로, 사건은 있었으나 아직 루바흐의 봄 축제는 끝나지 않았다.

어느덧 창밖으로 축제 둘째 날 저녁을 알리는 선홍색 노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 * *

권력층의 시선으로 볼 때, 루바흐 봄 축제의 꽃은 둘째 날 밤 디너파티였다.

루바흐는 귀족부터 황족까지 아울러 10세에서 17세에 해당하는 아이들의 재능을 발굴하여 키워주는 국제 인재 양성 학교.

제국 내 귀족뿐 아니라 제국이 그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변 약소국에서도 귀족 자제나 왕족을 유학 보내오기도 하는 국제기관이었다.

그러니 그들 가족의 견학이 허용된 루바흐 봄 축제에서 디너파티란 지배 계급들이 대거 한자리에 모여든 사교의 장과도 같았다.

가족의 품에서 떨어져 학업에 정진하느라 고생하는 자녀를 보기 위해 찾아온 보호자들로 인해 학교 포탈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방문을 허가하는 초대장은 두당 1매였다.

초대받은 자만이 포탈을 이용할 수 있었으므로 부모 중 한 사람만이 자녀를 보러 찾아왔다. 양친이 모두 바쁠 경우 형제가 대신 방문하기도 했다.

귀족으로서의 모습보다는 학생으로서 부모형제를 맞이한 루바흐 학생들은 저마다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크리스티나 역시 저를 찾아온 오라비와 함께 파티장에 서 있었다.

학교 행사긴 했으나 ‘디너파티’인 만큼 파티장에서는 교복이 아닌 정장이 주 복장이었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교복을 벗고 옷장 안에 걸어 두었던 사복을 꺼내 입는 순간이었다.

아직 십 대 소년소녀인 학생들은 눈에 띄는 화려한 색상이나 개성 있는 디자인을 선호했다.

그에 비해 크리스티나는 단정하고 고아한 디자인의 의상을 골랐다. 투톤으로 물드는 바닷빛 긴 머리카락에는 핀을 꽂아 늘어뜨리고 그에 어울리는 아이보리색 드레스를 입었다.

긴 치맛단이 나비 날개처럼 겹겹이 이루어져 걸을 때마다 요정처럼 팔랑거렸다.

단순한 치장이었으나 그녀의 청순한 이미지와 어우러져 보는 이들의 탄사를 자아냈다.

크리스티나의 곁에는 그녀와 머리색부터 얼굴형마저 닮은 오빠 알시오스 C.델피아가 함께 있었다.

“크리스틴,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니?”

알시오스는 델피아 가문의 장남이자 다정한 오라비였다. 올해 22세인 그는 동생인 크리스티나와 달리 루바흐를 다니지 않았다.

따로 재능을 개발하지 않더라도 알시오스는 이미 완벽한 델피아 가문의 기둥이었다.

인맥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저절로 붙어오는 위치에 있었으며 지력, 판단력, 성품까지 다방면으로 우수했다.

매사 쌀쌀맞게 구는 크리스티나도 오라버니인 알시오스 앞에서만큼은 초봄의 개울물처럼 다소 풀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아마.”

쓰러진 쥬다스를 양호실로 옮겼던 게 바로 크리스티나 본인이었다. 원래 건강하던 황자는 아니었지만 그날은 척 보기에도 위태로워 보였다.

그 창백한 안색이 눈에 밟혀 축제가 진행되는 하루간 크리스티나는 어떤 일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시간을 허투루 쓰는 것을 질색하는 그녀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낭비였다. 하지만 알면서도 쥬다스에 대한 염려를 그만둘 수 없었다.

‘역시 못 오실 테지. 많이 안 좋아 보이셨으니.’

시선을 내리깐 크리스티나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빙글빙글 꼬았다.

생각이 많아질 때면 보이는 버릇이었으니 오라비인 알시오스는 쉽게 그녀의 속내를 알아보았다.

“정말로 몸이 약하다 하던 1황자 전하, 그분과 친해진 건가? 네가? 그건 또 의외네, 크리스틴.”

“……알고 있었군요.”

“그럼? 너에 대한 보고라면 매달 말 빠짐없이 챙겨 듣고 있지.”

제 말을 듣고 한숨을 쉬는 여동생을 향해 피식 웃어 보인 알시오스가 이내 진지하게 표정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

“크리스틴 너는 어릴 때부터 그런 게 있었어. 한 번 마음에 들면 웬만해선 그 생각을 바꾸지 않는 맹목성이랄까.”

“그 말은.”

“당장 생각을 바꾸라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렇게 건강이 늘 위태로우셔서야…….”

알시오스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1황자에게 악감정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지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와는 수년 전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리고 한눈에 그 싹을 알아보았다.

‘눈이 죽어 있는 자는 오래 살아남지 못해.’

텅 비어 있던 금색 눈동자에서는 아무런 가능성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죽음을 목전에 앞둔 사형수처럼 모든 걸 포기한, 일말의 의지조차 찾아볼 수 없는 소년.

그의 안목을 똑 빼닮은 크리스티나가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는 자체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요즘 정령술에 자질을 보인다느니 좀 달라졌다느니 하는 소문이 떠돌긴 했지만 알시오스는 그 소문을 무조건 신뢰할 수만은 없었다.

‘하늘이 뒤집힐 정도의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에야 그가 변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비단 그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현 정계에 어느 정도 발을 들여놓고 있는 후계자들은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약육강식(弱肉强食).

권력층의 사회는 언뜻 점잖고 평온하게 흘러가는 듯 보여도 속사정은 그야말로 치열한 야생이나 다름없었다.

약한 종자는 지도자로서 살아남을 수 없다. 루바르잔 제국이 오랜 세월 강건하게 그 국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키워드도 여기에 있었다.

유능한 자만이 우두머리가 될 자격을 갖추었다. 일개 귀족 가문도 그러할진대 황좌는 말할 것도 없었다.

군주의 핏줄이라면 누구나 그 뒤를 이어 황좌에 오를 기회를 가졌다. 단순히 일찍 태어나거나 좀 영특한 정도로는 곤란했다.

권력을 노리는 눈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으니 이를 휘어잡을 지도자로서의 특별한 자질이 필요했다.

‘물론 1황자는 유리한 조건을 타고나긴 했었으나.’

제국에서 하나뿐인 은발과 금안, 그야말로 선대로부터 따다 박은 듯이 훌륭한 상징이었다.

처음 쥬다스가 태어났을 때까지만 해도 눈부시게 선명한 황조의 상징을 보고 모두 그를 넘을 자질은 없으리라 입을 모아 칭송했다.

하지만 그 유리함은 1황자가 평범하게 자라났을 경우에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그의 탄생을 누구보다 기뻐한 현황에게는 애석하게도, 황자는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았으며 죽은 눈으로 방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마치 잘 빚어진 인형처럼 그에게선 아무런 가치를 느낄 수 없었다.

제 어미를 제외하고는 타인과 전혀 대화를 하지 않으니 그를 따르고자 하는 이가 있을 리 만무했다.

해가 지날수록 수상함을 느끼고 있던 귀족들은 어느 순간부턴가 저들끼리 눈치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1황자에겐 큰 결함이 있다.’

‘저 정도로 심신이 유약하다면 오래 버티지 못할 터.’

특별한 상징을 타고난 아들을 총애했다하지만 황제도 가능성 없는 싹에 더 이상 물을 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이 루바흐에서조차 낙오된다면 1황자에겐 이제 일말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어정쩡하게 명맥만을 유지한 채 졸업한다손 치더라도 그때는 이미 황태자 자리를 바라보기엔 늦은 시점이다.

벌써 2황자와 3황자의 나이가 각각 11세, 9세였다. 일반적으로 10세를 기점으로 황태자 책봉이 이루어지니 이미 그들도 적정한 나이에 이르렀다 볼 수 있었다.

여러모로 1황자가 군주에 자리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군주는커녕 지금까지 모습대로라면 목숨 줄조차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언제 생명 활동을 정지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약한 육신과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를 눈 뜨고 가만두고 보기만 하는 유약한 심성.

비록 아주 최근에 전에 없이 크게 변화했다는 정보가 들어오긴 했으나 1황자는 이미 기울대로 기운 배였다.

이미 황좌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전쟁은 시작됐다.

알시오스는 자신의 충고를 귓등으로도 듣고도 않는 크리스티나를 착잡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결코 쉬이 무너지실 분이 아니에요.”

“크리스틴.”

“아니, 무너지게 두지 않아요.”

“너 진짜…….”

서늘하게 잘라 말하는 여동생을 보며 알시오스는 이마를 짚었다.

지금도 그들 남매를 지켜보는 눈이 많았다. 영특한 동생은 그 시선들마저 계산하여 말하고 있었다.

알시오스는 착잡한 마음으로 꺼내기 싫었던 가정을 입 밖으로 끄집어냈다.

“혹 그분을 연모하기라도 하는 거냐?”

“……경애하여 흠모하는 바이긴 하나 추측이 과하시군요, 오라버님. 그것과는 성질이 명명백백 다릅니다.”

한층 단호해진 부정에 알시오스는 오히려 의혹이 짙어졌다.

언제나 똑 부러지고 까칠하게 구는 크리스티나가 누군가 한 대상을 ‘경애’한다고까지 표현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심지어 그녀가 마음 놓고 따르는 아비와 오라비에게도 감정 표현은 잘하지 않던 아이였다.

그녀의 나이 14살, 이성에게 한 번쯤 열병을 앓듯 마음을 줄 수도 있는 나이였다.

알시오스는 그리 생각을 하다가도 이내 묘연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가만, 1황자라면 신체가 7살 이후 전혀 자라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비록 남녀 사이라 한들 유아적인 모습이라면 또래보다 성숙한 크리스티나가 이성적으로 빠져들 외관이 전혀 아니었다.

연정이 아니라면 무엇이 저 분명하고 냉철한 여동생의 마음을 끌었단 말인가.

학생들이 주인공인 축제인 만큼 알코올이 들어가지 않은 와인으로 타는 목을 축이던 알시오스의 시야에 크리스티나의 표정 변화가 들어왔다.

“……!”

알시오스는, 그러니까 장담컨대 그간 모범적이고 도도하던 여동생이 저런 표정을 짓는 걸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비록 오라비 앞이라 누그러진 채긴 했으나 줄곧 유지해 오던 그 얼음 같은 가면이 깨어져 있었다.

머리카락을 꼬던 하얀 손가락이 그대로 정지했다.

당황, 의심, 경탄 순으로 솔직한 표정이 그대로 그녀의 안면에 드러났다. 그런 반응은 크리스티나만 보이는 게 아니었다.

훅.

촛불이 꺼지듯 좌중이 침묵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하얗게 질린 이도 있었다.

알시오스는 갑작스러운 분위기 변화에 의아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이내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인물을 발견하고 시선을 고정시켰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구나.”

따뜻함을 품은 소년의 목소리가 침묵을 뚫고 맑게 고요해진 파티장을 울렸다.

크리스티나의 물빛 눈망울이 조용히 일렁였다.

“맞는 옷이 없어서 말이다. 바이칼 그 아이가 도움을 주어 다행이었다만 시간이 좀 걸렸지 무어냐.”

“……쥬다스 님.”

“그래, 오늘 너의 복식은 단아하면서도 봄꽃처럼 화사하다. 네게 꼭 맞아 어여쁘구나.”

그리 말하면서 그들 앞까지 차분히 걸어온 소년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사족으로 QnA때 말씀드렸다시피 일단 로맨스는 없는데 일방통행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곤 해도 이 이상으로 티는 안 날 겁니다. 이야기의 중심은 인물들의 성장에 있으니까요. ㅎㅎ

또 실체화된 정령들은 술사가 바라지 않는 이상 실체화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정신력이 약한 술사는 오래 유지하는 게 힘들다곤 하는데... 이그레트는 해당사항이 없지요..ㅎ

그리고 아마 현재 주요인물 프로필들이,

쥬다스 : 12세 / 은발 / 금안

에단 : 15세 / 흑발 / 흑안 / 검술특화. 무예가 출신. 공작가. 도를 사용. 절도를 지키며 칼 같은 성격. 정도를 추구함.

크리스티나 : 14세 / 투톤, 바다빛 머리카락 / 바다색 눈동자 / 문무겸비. 특히 머리가 비상함. 공작가. 성과지향주의.

바이칼 : 14세 / 밤색머리 / 녹안 / 진솔한 성격, 직설적인 말투. 귀족답지 않음. 마법사. 혁명학파에 관심을 보이고 있음.

정도가 아닐까 싶네요. ㅎㅎ 이 외에도 지저분하게 막 붙여놓은 설정들이 있는데 스포우려가 있어 최대한 간추려봤습니다.ㄷㄷ (+키 관련부분은 일단 지우고, 후일 수정하겠습니다.ㅠㅠ 적당한 줄 알았는데 나이에 비해 너무 크다는 의견이 많으셔서...!;;)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과 애정에 언제나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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