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46화 (46/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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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성장통

14살 소녀인 크리스티나와 마주 보아도 눈높이에 차이가 없을 만큼의 키에 마르긴 했어도 호리호리하여 보기 좋은 체형이었다.

별빛처럼 은은하니 광택이 흐르는 긴 은발은 단정하게 어깨선을 타고 흘러내렸으며 시선을 사로잡는 금색 눈동자가 힘 있게 그녀를 마주하고 있었다.

아직 조금 창백한 감이 있긴 했지만 병자의 그것과는 다르게 윤이 나는 흰 피부마저도 호수 위의 한 마리 백조처럼 고고해 보였다.

그나마 키가 비슷한 바이칼에게 빌려 입은 옷은 그에게는 조금 컸다.

품이 넉넉한 흰 와이셔츠 위에 고급스러운 회색 베스트를 걸쳤다. 셔츠는 검은 단추, 베스트는 금장 단추였다.

그 위로 걸친 검은색의 얇고 긴 정장풍 코트가 움직임을 따라 가볍게 펄럭였다.

움츠러들기는커녕 자신감 있는 발걸음과 함께 부드러운 미소로부터 나오는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주변을 아울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소년의 어깨에 자리한 녹색 바람의 정령, 또 걸을 때마다 물거품을 흩뿌리는 푸른 늑대가 그가 가진 이능을 증명함과 동시에 존재감을 크게 부각시켰다.

이를 본 알시오스는 좌중과 동화되어 돌처럼 굳어버렸다.

단단한 둔기로 뒤통수를 빡 두드려 맞은 것처럼 모든 상념이 백지화 되어버렸다.

‘은발에 금안……. 저토록 뚜렷한 루바르잔 황조의 상징은 제국에 단 하나뿐인.’

바로 1황자 쥬다스였다.

알시오스는 지금껏 품고 있던 정보와 상식을 망설임 없이 지워 버렸다. 꼿꼿하던 델피아 공작가의 기둥이 기꺼이 허리를 굽혔다.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델피아가의 장남 알시오스 C.델피아입니다.”

그를 시작으로 파티장에 서 있던 모든 귀족이 1황자를 향해 예를 갖췄다.

평탄하게 흘러가던 제국의 하늘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언제 침묵했었냐는 듯 모인 이들 사이에 술렁임이 번져 갔다.

이곳은 귀족 사회의 일환이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학생과 학부형 신분으로 초대받은 자리였다.

그러니 학교 밖과 달리 이 안에서만큼은 크게 신분 차이를 의식하지 않고 상호간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다.

확연히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나 존재감을 드러낸 1황자로 인해 잠시 혼란이 일긴 했지만 학교 내 예법은 약식이 원칙이다.

마치 가면무도회에서 자신의 신분을 가리고 대화하듯, 루바흐의 봄 축제는 상호 예의를 갖추며 학생과 학부형으로서의 만남이었다.

디너파티장은 금방 다시 시끌시끌해졌다.

“쥬다스 님, 모습이……. 대체 어찌 된 일인가요?”

“이런, 놀라게 하였는가. 자세한 원인은 나도 모른단다. 치유술사의 말로는 급작스럽긴 해도 본래 이루어졌어야 하는 성장인지라 위험보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하더구나.”

“하.”

크리스티나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훑어보며 길게 숨을 내뱉었다.

복잡한 빛을 담고 내리까는 바다색 눈을 가만 바라본 쥬다스가 손등을 덮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물었다.

“흠, 영 이상해 보이더냐?”

“아뇨, 그런 것이 아니라, 전혀 생각지도 못했기에.”

혼란을 감추지 못하며 대답하던 크리스티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곤 입을 다물었다.

‘똑같이 부드러운 눈.’

겉이 몰라보게 변화하긴 했으나 그 금안에 담긴 특유의 유한 기운만큼은 그대로였다.

크리스티나는 더 이상 복잡하게 생각하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따라서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럼 아프시던 건.”

“이제 말짱하이. 걱정해 주어 고맙구나.”

그간 아팠던 사실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씻은 듯이 고통이 사라져 있었다.

아직 남들보다 체력이 약하고 면역력이 약한 점은 그대로였지만 몸 상태만큼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척 보기에도 혈색이 도는 뺨과 편안해 보이는 움직임에 크리스티나는 깊이 안도했다.

쥬다스는 이번엔 그녀의 보호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동생과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것 같아 미안하네.”

“아닙니다. 크리스티나에게서 서신을 통해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이 자리는 황자 전하를 꼭 뵙고 싶어 나온 자리기도 합니다.”

이건 알시오스의 진심이었다.

그가 침몰해 가는 조각배이든, 떠오르는 샛별이든 간에 직접 보지 않는 이상에 아무 소용없었다.

알시오스는 관찰하는 시선을 유지하되, 어투에는 공손함을 담아 예의바른 태도를 취했다.

그러자 쥬다스는 미소를 머금은 채 넌지시 물었다.

“호오, 하면 직접 보니 어떠한가?”

질문을 들은 알시오스는 순간 갈등했다.

솔직한 심정을 어디까지 내보여야 하는지, 혹은 그저 무난한 포장으로 넘어가야 할지에 대해 잘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만큼 지금 1황자의 모습은 모조리 예측하지 못한 특이점으로 가득했다.

고민의 순간은 짧았다. 델피아 공작 가문의 첫째 기둥으로서 그간 입지를 다져온 알시오스는 상대방의 눈에 깃든 온화함을 귀신 같이 읽어냈다.

그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남에게서 전해 듣는 이야기란 그저 연못 위에 뜬 달그림자처럼 허상과도 같음을 깨달았습니다. 이제껏 눈이 어두워 그림자만 좇았음이니 겉보다 속을 보는 안목이 없음에 면구스럽습니다. 부끄럽고, 또 경탄하였습니다.”

대귀족의 입에서 나오는 말치고는 굉장히 솔직하고 직설적인 내용이었다.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시인하며 또한 예상이 뒤집힘에 감탄했다.

마치 고해성사와도 같은 진솔한 이야기에 쥬다스는 그저 가만 듣기만 했다.

알시오스는 숙였던 고개를 들며 말을 맺었다.

“여기 크리스티나의 오빠로서, 그리고.”

“…….”

“가문의 차기 가주로서도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진실로 훌륭하게 성장하셨습니다, 전하.”

오라비의 말에 크리스티나도 작게 고개를 끄덕임으로 동조를 표했다. 남매의 호의적인 반응에 쥬다스는 그저 빙긋 웃어 보였다.

‘역시.’

이것이 알시오스가 발견한 온화함이었다. 온화하지 않은 사람은 솔직한 말을 듣고 나면 어딘가 공격당한 것처럼 반응을 보인다.

아무리 뜻이 좋더라도 먼저 그를 나쁘게 평했다는 의미가 전달되었으니 이에 분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황자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일언반구하지 않고 담담하게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자였다.

알시오스는 황자가 가진 그 포용력도 눈여겨보았다.

말에 담긴 의미를 전부 이해하면서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건 보통 그 나이 때 가지기 어려운 온화함이었다.

이는 그가 아랫사람을 품어줄 수 있는 그릇이 크다는 뜻도 되었다.

세 사람이 훈훈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이 순간에도 그들을 향하는 시선은 많았다.

본래의 쥬다스를 알고 있던 학생들은 귀신이라도 본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이미 귀족 사회에서 구를 대로 구른 학부형들은 섣불리 반응하지 않고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다른 학부형들과 웃으며 속빈 이야기를 하더라도, 머리와 귀는 1황자에게 집중했다.

그리고 델피아 공작가의 두 남매가 모두 1황자에게 호의적이며, 특히 루바흐의 꽃이자 출중한 능력으로 인정받는 크리스티나가 완전히 그의 줄에 선 듯한 표현을 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아마 오늘 밤이 지나고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갈 때 즈음엔 황좌를 둘러싼 전쟁의 판국이 송두리째 흔들릴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무조건적으로 1황자가 우세할 것이란 보장은 없었다.

겉보기만 번지르르하게 자라난 것인지, 아니면 그 속에 숨은 저력이 더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또한 앞으로 그를 돕는 세력이 얼마나 늘어나는지가 관건이었다.

귀족들은 능숙하게 패를 숨기고 기회를 살폈다.

“쥬다스 님.”

“마르젠이구나. 축제는 잘 즐기고 있느냐?”

성인들과 달리 아직 어린아이인 학생들의 경우는 좀 더 자유로웠다.

짊어진 무게도 어른에 비해 얼마 없었고, 같이 학업을 정진하는 동료라는 인식도 강했기에 정치적 의미를 따지지 않고 얼마든지 그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그중 마르젠은 특히 그러한 처세에 능한 자였다. 그는 때를 놓치지 않고 양순한 초식 동물마냥 쥬다스에게 다가왔다.

“하하! 예, 과연 루바흐의 봄 축제더군요. 여러모로 좋은 구경을 많이 했죠.”

마르젠은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리곤 그 곁에 서 있던 알시오스를 향해 반가움을 담아 인사를 건넸다.

“역시 이번에도 오셨군요, 알시오스 님. 남매간 우애가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언제부터 남의 형제애에 그리 관심이 많았지?”

알시오스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크리스티나가 툭 싸늘한 말을 내뱉음으로 인사를 차단했다.

마르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에헤이~ 이 루바흐에서 크리스티나 님께 관심 없는 남자가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렇죠, 쥬다스 님?”

“음? 그도 그렇겠구나.”

“…….”

생각지도 못한 쥬다스의 증원에 크리스티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물론 루바흐에서 그녀를 흠모하는 남학생은 수도 없이 많았다. 스스로도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며 거기에 별 감흥도 없었다.

어릴 적부터 델피아 공작가의 하나뿐인 여식으로 자라난 그녀는 부모형제로부터 흘러넘칠 만큼의 애정을 받아왔다.

그리고 입학한 루바흐에서조차 조각 같은 미모에 문무 훌륭한 성적을 보이며 자신감 넘치는 그녀를 향해 학생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다.

크리스티나에게 있어 자신을 향한 애정이란 당연했다.

‘그런데 단 한 명.’

변화하기 전부터, 몰라보게 변한 지금까지 시종일관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 바로 저 백로황자였다.

바뀌기 전 쥬다스는 누구에게도 반응하지 않았다. 한심하리만큼 소극적이었으며 늘 조용했으니 당연히 크리스티나와 얽힐 일도 없었다.

그러나 변하기 시작하면서 쥬다스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따뜻한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마치 귀여운 아기를 대하듯, 혹은 재롱부리는 강아지를 보듯이 마냥 부드럽고 따뜻하기만 했다.

그 시선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었으며 크리스티나도 예외는 없었다.

처음에는 그 점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지금은 오히려 ‘크리스티나야’라고 부르는 음성에 익숙해져 제법 듣기에도 좋다 여기고 있는 참이었다.

‘하지만.’

묘하게 시선을 내리깐 크리스티나를 흥미롭게 쳐다본 마르젠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호? 이건 또 의외인데요.”

타인의 심리에 예민하여 관계를 잘 파고드는 처세가 마르젠이 크리스티나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놓칠 리가 없었다.

오히려 그 빙글거리는 낯에 의아함을 느낀 크리스티나가 눈썹을 꿈틀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아닙니다~? 재밌는 구경은 묵혀놨다가 터뜨리는 주의라서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알시오스 님?”

“…….”

알시오스 역시 오묘한 시선으로 크리스티나와 쥬다스를 번갈아 보았다.

걱정할 만한 수준의 것은 아니라 느껴지지만, 앞날이 불투명한 1황자에게 필요 이상의 감정이 개입되는 건 오라비로서 곤란했다.

그가 미간을 좁히던 찰나 때마침 학생부 임원이 파티장 단상에 올라 증폭기를 사용해 안내 사항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자랑스러운 우리 루바흐 학우 여러분, 그리고 오늘 루바흐를 찾아주신 고마우신 학부형 여러분. 이 영광스러운 밤의 피날레를 장식하기 위한 야외무대를 준비했습니다. 모두 안내를 따라 천천히 밖으로 나와 주십시오.”

“드디어군요.”

마르젠이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더불어 여기저기서 기대감 어린 환호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루바흐 학생들은 작년 봄 축제를 기억하고 있었다.

디너파티의 진짜 시작은 바로 야외무대가 개방되면서부터였다.

학관 하나를 통째로 꾸며 파티를 열었던 만큼 학관을 둘러싼 넓은 운동장이 두 번째 무대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덜컹.

학관의 문이 힘차게 열렸다.

어둠이 내린 저녁 시간대였는데도 마법의 힘으로 밝혀 둔 조명기에 의해 눈부신 빛이 파티장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형형색색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파티에 참석한 인원들이 차근차근 밖으로 향했다.

쥬다스를 중심으로 모여 있던 일행도 안내에 따라 야외로 이동하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모처럼 약속도 안잡힌 휴일이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 흘러가버렸네요.

우연히 취적소설을 발견해버린 탓에 읽다보니...ㄷㄷ 정말 저한테 판타지는 마약과도 같습니다.ㅠㅠ 결국 오늘 비축 쌓아서 연참해보려던 계획은 물거품으로...(...)

아, 그리고 크리스티나의 투톤-바다빛 머리색은 위쪽이 연하고 아래로 내려갈 수록 진해집니다.ㅎㅎ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오늘도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응원과 애정에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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