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47화 (47/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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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성장통

슈우우우.

퍼펑, 펑!

밖으로 나오자마자 장관이 펼쳐졌다.

밤하늘을 수놓는 아름다운 불꽃에 학생과 학부형 모두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단순한 원모양뿐 아니라 별이나 책, 루바르잔 제국을 상징하는 드래곤 문양까지 다채롭게 하늘을 수놓았다.

귀족이라 해도 좀처럼 보기 드문 초대형 불꽃놀이였다.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몇 차례 하늘을 수놓던 불꽃은 이내 잠잠해졌다.

모처럼 눈이 즐거워지는 시간이었기에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그 여운을 만끽했다.

그러던 순간이었다.

“저길 봐!”

누군가 흥분된 목소리로 하늘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인파에 섞여 함께 하늘을 올려다본 쥬다스의 금안에도 이채가 어렸다.

“정령이다!”

“물의 정령인가?”

“하나가 아니야. 계속 늘어나고 있어!”

까르륵.

어린아이의 웃음소리가 청명하게 밤공기를 타고 울려 퍼졌다.

불꽃놀이가 마법사들의 힘으로 만들어진 이벤트였다면 이번엔 정령술사들의 작품이었다.

정령학 교사인 이사벨을 중심으로 루바흐에 초청된 정령술사 인력들이 함께 자연계 정령들을 소환해 내어 특별한 광경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작은 소녀의 모습을 한 돌개바람의 정령이 사람들의 머리 위를 날아다니며 장난스레 바람을 일으켰다.

빙글 주변을 휘감는 바람에 의해 모자가 날아가거나 스카프를 떨어뜨리는 등 작은 해프닝이 벌어졌다.

하지만 워낙 신비로운 모습이었기에 사람들은 화를 내기보다는 깔깔대고 웃으며 이벤트를 즐겼다.

술사의 조절하에 마음껏 장난을 치며 돌아다니던 돌개바람의 정령은 쥬다스의 머리 위에서 살포시 멈추었다.

허공에 동동 뜬 채 빤히 바라보던 정령은 휘릭 곡예를 하듯 그 앞으로 날아들었다.

「응?」

편히 그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유니가 고개를 갸웃하던 순간이었다.

쪽.

돌개바람의 정령은 수줍게 쥬다스의 뺨에 입 맞추고 그대로 후다닥 날아올랐다.

설마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하극상 아닌 하극상을 벌일 줄이야 꿈에도 몰랐던 유니가 뒤늦게 분통을 터뜨렸다.

「저게―!」

“이런, 유니. 저 아이도 반가워서 한 일 같으니 너그러이 봐주지 않으련.”

「그치만, 내 이그레트인데!」

「아니다요! 내 이그레트다요!」

「……‘우리의’겠지.」

루니 역시 곱지 않은 눈길로 날아오른 돌개바람 정령을 노려보며 코 주름을 잡았다.

그리고 그 장면을 목격한 군중과 술사들도 연달아 술렁이기 시작했다.

정령의 키스.

자신과 계약한 술사 이외에는 인간에게 친밀함을 표현하지 않는 게 일반적인 정령의 생태였다.

정령이 인간에게 먼저 다가가 호감을 표하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세간엔 ‘정령의 키스를 받는 자는 해당 속성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설이 돌았다.

딱히 근거가 있는 설은 아니었지만 따지고 보면 일리가 있기도 했으니 정령술사들은 그 설에 전면 동의했다.

심지어 술사와 영혼의 계약을 나눈 정령조차 입을 맞추거나 꼭 끌어안는 등의 친밀함 표현은 하지 않았다.

어지간한 친화력이 아닌 이상에야 정령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만일 정령이 스스로 다가와 애정을 표현한다면 이는 정말 해당 속성 정령들에게 말 그대로 사랑받고 있는 존재라 볼 수 있었다.

마치 자연계 4속성 정령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이그레트처럼.

“그렇다면 1황자 전하는 바람에게 사랑받는 정령술사이신 걸까?”

“바람의 사랑을 받으면 모든 바람의 정령을 부릴 수 있다고 하던데.”

“혹시 정령왕급의 친화력이 있으신 거 아냐?”

“우와, 진짜 그런 거면 엄청날 텐데……!”

가뜩이나 주목받고 있던 쥬다스는 다시금 따가울 정도의 시선을 받았다.

그러던 순간 여기저기서 가벼운 돌풍이 일어났다.

“또 온다!”

와 하고 짧은 환호성과 함께 사방에서 튀어나온 바람의 정령들이 사람들의 주변을 맴돌았다.

이번엔 세 정령왕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지켜보는 터라 겁 없이 쥬다스의 곁으로 다가오는 정령은 없었다.

곱게 반짝이는 백사장의 정령, 장마철의 습기를 머금은 비구름 정령, 화롯불의 정령 등 각 개성을 뽐내는 정령들이 춤을 추듯 하늘을 점령했다.

그런 정령들을 따라 함박눈의 정령이 함께 날아오르며 뽀송뽀송한 눈송이들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봄 축제에 내리는 눈을 맞으며 분위기는 한층 달아올랐다.

“이어 야외무대의 개막을 알리는 루바흐 아카펠라단의 공연이 있겠습니다. 큰 박수로 맞이해 주세요!”

아카펠라 합창은 무반주로 음역대를 나누어 곡을 진행한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악기가 바로 사람의 목소리라는 것을 여실히 느끼게 해주는 게 바로 아카펠라 공연이었다.

음악 적성으로 엄선된 루바흐 학생들이 운동장 중앙에 마련된 단상에 올라 합창을 시작했다.

어린 학생들이 선보이는 아름다운 화음을 푸근히 감상하고 있던 쥬다스에게 두 소년이 다가왔다.

“……쥬다스 님.”

이때쯤 찾아오리라 예측하고 있었기에 쥬다스는 감고 있던 눈을 뜨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래, 가족들은 잘 만났는고?”

“예, 아무래도 조용한 편을 좀 더 선호하시는지라 지금은 실내 파티장에.”

“그러십디다. 의외로 어른들 간에는 얘기가 잘 통하시던 모양이더라고요. 난 이 양반이랑 오래 얘기 못하겠던데.”

바이칼이 머리 뒤로 깍지를 끼며 피식 웃었다.

말이 많은 편인 그가 과묵한 에단과 둘이 있을 때는 영 대화할 거리가 없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대놓고 이죽거리면서도 바이칼이나 에단이나 불쾌한 감은 전혀 없었다.

거리낌 없이 장난을 건다는 건 그만큼 친근함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접점이라곤 없던 그 둘에게 바로 쥬다스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했기에 가능한 신뢰였다.

“오래 얘기하지 않아도 편한 친구사이가 있지. 너희는 참 좋은 인연으로 이어진 게다.”

즐거운 어조로 말하는 쥬다스를 보며 바이칼과 에단은 똑같이 떫은 반응을 보였다.

“……아니, 쥬다스 님, 소름 돋게 저 양반이랑 친구라뇨.”

“모처럼 동감이군.”

“너희도 느이 어른들 못지않게 얘기가 잘 통해 보이는구나. 허허.”

“…….”

“…….”

내용의 측면을 떠나 얘기가 통한 건 사실이었으니 부정할 순 없었다.

두 소년이 떨떠름하게 자신을 응시하자 쥬다스는 투닥거리는 손자들을 보듯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고아한 은발 위로 새하얀 함박눈이 내려와 앉았다.

빛나는 은발이나 하얀 눈송이나 때 묻지 않은 깨끗한 느낌을 주었다.

결국 그 특유의 거부할 수 없는 분위기에 밀린 바이칼이 깍지를 풀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 뭐. 학우는 맞긴 하죠. 답답한 면이 있긴 한데 그것만 빼면 나름.”

“……피차일반이다.”

“뭐요? 허, 이분 보시게.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긴 하지만 여기서 저처럼 화통한 성격도 찾기 힘들 텐데요.”

“한 번 옳다 믿은 건 끝까지 놓지 않으려 하지 않던가.”

“지금 누가 누구에게 할 소릴……. 쥬다스 님, 솔직히 말해주시죠. 제가 답답합니까, 에단 님이 답답합니까?”

지켜보던 크리스티나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대신 입을 열었다.

“둘 다 똑같으니 그만 귀찮게 하지?”

“크, 크리스티나 님…….”

바이칼은 억울한 듯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도 크리스티나를 동경하던 남학생 중 하나였던 만큼 그녀의 말에는 꼼짝하지 못하는 추종자적 경향이 있었다.

오히려 그녀에겐 에단이 강세를 드러냈다.

“……당신에게 귀찮게 군 적 없습니다. 거슬린다면 굳이 여기 계실 필요 없지 않겠습니까.”

“말귀를 못 알아듣는가, 그대. 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싸늘함을 넘어서 오만하기까지 한 말투에 에단의 미간에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

“불만이 있는 건 당신뿐인 듯하여.”

“고작 그대의 주관적 판단에 따르란 말인가? 우습군.”

“하면 누구의 판단에 따르란 말입니까.”

“이거 왜들 이래……. 두 분 다 진정하십쇼. 이러다 싸움 나겠네.”

알시오스는 한 발짝 뒤에서 제국의 미래를 짊어지고 있는 작은 어깨들을 내려 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이내 그 바닷빛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따르고자 하는 세력이 제법 거물들이로군. 여기에 우리 델피아가(家)가 가세한다면 확실히 재기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정령술이라는 이능에 특별한 자질을 보이며 평정심을 유지하는 느긋한 성격과 타인을 품어줄 수 있는 큰 그릇.

‘덧붙여 자신에게 이빨을 드러내 보이는 부덕한 자들을 과감히 쳐 낼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잔인함만 갖추어진다면 완벽할 터.’

하지만 지금 보이는 모습으로는 장담할 수 없었다.

군주는 버릇없는 신하를 쳐 낼 단호함과 배덕자의 목을 벨 잔인성을 필히 요했다.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란 정도(正道)를 걷는 존재가 결코 아니었다.

무릇 나라를 다스리고 신하를 길들이는 데엔 야망과 이기심도 적절히 갖추고 있어야 한다.

알시오스는 섣불리 가문을 내거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다.

대신 언제든 패를 돌릴 수 있게끔 준비를 시작했다.

그는 아이들의 중심에 서 있으면서도 관망하던 자신과 같은 선에서 그들을 바라보던 쥬다스와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맑은 금안이 모든 고민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 물끄러미 그를 향했다.

“…….”

자신의 색깔이 청과 홍, 둘 중 하나로 나뉘는 순간,

도박은 시작된다.

* * *

정령계 불의 영역.

흐드러지게 피어난 하얀 꽃밭 사이에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 주변에는 붉은 나비의 모습을 한 불의 하급 정령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꽃을 따다 화관을 만든 여인은 이를 사뿐히 들어 올리며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후후, 나중에 이런 걸 선물하면 좋아해 줄까요.」

앞머리 없이 훤히 드러낸 이마에는 붉은 보석이 하나 박혀 있었다.

가지런한 이마선을 따라 길게 웨이브 진 다홍색 머리카락이 가볍게 흩날렸다.

그리고 귀가 있어야 할 자리엔 사람과 다르게 부드러운 깃털이 자라난 조그맣고 하얀 날개가 달려 있었다.

날개는 또 등에도 붙어 있었다. 등에 있는 건 불꽃처럼 강렬한 새빨간 깃털로 이루어진 커다란 날개 한 쌍이었다.

여인은 화관을 품에 안은 채 꽃밭 위로 풀썩 드러누웠다.

「하아~ 보고 싶어요, 이그레트.」

여인, 불의 정령왕 카니는 멍하니 정령계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정령계 중에서도 불의 영역은 하늘이 그녀의 머리카락처럼 진한 홍시 색깔이었다. 카니는 구름 대신 떠가는 동글동글한 불덩이들을 한참이나 응시했다.

「언제쯤 불러 줄래요……? 계속, 계속 기다리고 있는데.」

카니는 약간의 서운함을 담아 중얼거리다 핫 고개를 내저으며 양 주먹을 꼭 쥔 채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파스스 흰 꽃잎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렇다고 절대 불평하는 건 아니니까요, 으응.」

이그레트가 듣고 있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왠지 그리 변명해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순한 눈망울에 가득 차오른 염원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카니는 무릎을 끌어모아 안으며 턱을 괴었다.

「빨리 보고 싶다…….」

팔랑팔랑.

빨간 나비 모습을 한 불의 하급 정령이 그녀의 발치에 내려앉았다.

하급 정령을 쓰다듬어주던 카니는 순간 움찔 어깨를 좁히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

화르륵.

불길에 휩싸인 소환진이 나타나 있었다. 카니는 일어나 소환진 앞으로 다가갔다.

「정령왕 소환진? 하지만 아직 이그레트와의 계약이.」

부름을 받지 못해 정령계에 남아 있긴 했지만, 영혼과 영혼이 이어진 계약의 흔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한 번 계약을 맺은 정령은 중복 계약을 맺을 수 없다.

술사가 바라는 건 무엇이든 행하게 되어 있는 정령의 특성상 한 번에 두 명 이상의 술사를 갖는 건 불가능했다.

술사와 정령은 무조건 일대일의 관계였다.

그러니 계약이 유지되고 있는 지금 그녀의 앞에 나타난 소환진은 사실상 불가능한 접근이었다.

「…….」

다른 3속성 정령왕과 마찬가지로 카니는 이그레트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그와의 계약을 파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흐름을 거스르는 소환진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그 앞을 기웃기웃거리던 카니는 이내 조심스레 소환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급 정령들이 만류하듯 몰려들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잠깐 확인만 하고 올게요.」

이 소환진이 이그레트 것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카니는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힘을 개방했다.

불의 기운과 소환진이 맞물리며 화륵 거센 불길이 일어났다.

마치 불에 삼켜지듯 소환에 응한 카니는 소환진과 함께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는 붉은 깃털만 바람에 실려 날아갔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오늘의 팁 : 정령은 계약여부와 상관없이 다른 술사의 소환에 응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소환해냈다고 해서 반드시 계약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족으로 이그레트는 '관계'측면에 상당히 미숙한 인물입니다. ㅎ

그가 성장해야할 가장 중요한 부분이 심리적, 관계적 측면입니다. 정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단순히 자신을 '지켜주는'존재로 인식할 뿐, 자신이 '지켜야 할'존재로는 아직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자세한 건 본편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오늘도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애정과 응원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오타나 비문, 설정상 어색한 부분 등을 짚어주셔서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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