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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재회
3일간의 봄 축제가 막을 내렸다.
무예전에서 에단은 당당하게 검술부문 우승을 거머쥐었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생이 우승을 할 거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따로 개발할 것도 없이 무예에 있어선 하늘이 내린 재능을 타고났다고 볼 수 있었다.
과연 무장으로 유명한 헤이가 가문의 후계자란 소리가 돌았다.
연구물 발표회에 참석했던 바이칼은 마법학파로부터 꽤 많은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지난번 교황청 사건 때 이후로 학파 가입에 대해서는 신중을 기하고 있는 바이칼로서는 전부 거절했다.
그리고 현재 관심이 쏠리기로는 쥬다스를 넘어설 자가 없었다.
몸이 성장하면서 그 진가를 더욱 빛내기 시작한 그는 더 이상 흠잡을 것 하나 없이 완전한 모습을 보였다.
아무리 영리하고 뛰어난 이능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몸이 성치 않으면 각광받을 수 없다.
또래에 비해 확연하게 작은 체구에 금방이라도 툭 쓰러져 골골댈 것 같은 허약함은 그의 발목을 잡는 족쇄와도 같았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그 족쇄에 발목 잡힐 일이 없게 된 것이다.
성장, 그것도 도리어 또래 학생들보다 좀 더 우월한 키로 자라난 그는 이제 겉보기에도 무시할 수 없는 외향을 갖추게 되었다.
동시에 어린애 모습으로는 발현이 힘들었던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비로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주어진 약점을 모두 극복해 낸 1황자는 그야말로 루바흐의 뜨거운 감자였다.
“세상에나, 맙소사. 쥬다스 님, 정말 잘됐어!”
지금 막 호들갑스럽게 외친 봉술 교사 메이란 역시 그 변화에 놀라면서도 크게 기뻐한 인물 중 하나였다.
쥬다스가 신청한 과목 중 하나뿐인 무예과 스승으로서 메이란은 진심으로 이를 대견하게 여겼다.
‘그렇다곤 해도 이젠 정말 황자님다워지셨는걸. 아니, 마치 제국의 선황 폐하께서 초상화에서 걸어 나오기라도 한 것만 같은 모습이야.’
몸이 자랄수록 지니고 태어난 황조의 상징은 더욱 선명해졌다.
건강을 되찾으며 윤기가 돌기 시작한 은발과 따뜻한 금안을 본다면 누구라도 멍하니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백로황자.
본래는 그 고귀한 태생과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모습을 빗대어 조롱하는 별칭이었으나 오히려 지금은 그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
말 그대로 까마귀 무리 틈에서 홀로 날개를 펼친 고고한 백로와도 같았다.
“흠…….”
봉술 교사의 격한 환영 인사를 받으며 수업에 참여한 쥬다스는 조금 어색한 손길로 훈련용 봉을 들어 올렸다.
몸이 성장한 건 좋았지만 도통 어느 정도 수준까지 체력이 올랐는가에 대해서는 확인이 필요했다.
붕.
그가 잡은 봉이 힘 있게 허공을 가로질렀다.
예전엔 양손으로 잡아도 무거워 비틀거리던 무게였는데 이젠 한 손으로도 제법 생각한 만큼 컨트롤이 가능해졌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는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쥬다스는 기다리고 서 있던 페어를 향해 돌아섰다.
“그럼 오늘도 잘 부탁한다. 에단.”
“예.”
무예전 검술 부문 우승자가 보기엔 별거 아닌 변화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에단은 정중히 예를 갖춘 후 자세를 잡았다.
간단한 준비 자세마저도 빈틈없이 완벽했다.
쥬다스는 일단 현재의 몸이 어느 정도까지 머릿속에 담고 있는 이론을 따라갈지를 가늠하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예에 있어 자신보다 훨씬 상위 클래스인 에단이 상대해 주는 게 아주 적합했다.
에단 역시 같은 생각이었기에 먼저 나서지 않고 잠자코 쥬다스가 움직이길 기다렸다.
“그럼.”
탓.
쥬다스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가벼운 몸놀림으로 봉을 휘둘러왔다.
“……!”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빠르고 정확한 움직임이었다.
에단은 내심 놀랐으나 능숙하게 배운 대로 찌르기를 막아내며 옆으로 돌아섰다.
봉은 날카로운 검과 다르게 다루는 무인의 몸도 하나의 무기처럼 쓰였다.
애초에 상대를 베거나 크게 상처 입히는 게 목적이 아닌 무구였다.
마치 권술처럼 봉술도 팔다리를 이용하여 자유로운 공방이 가능했다.
그러려면 기다란 봉을 물 흐르듯 다룰 수 있게끔 회전에 대한 감각이 필요했다.
그리고 반동에 대한 이해와 유연한 몸놀림, 빠른 판단력, 그에 더해 순간적인 임기응변도 전부 전투력에 가감을 가져왔다.
이 점에 있어서 에단은 몹시 훌륭한 적응을 보여주었다.
그는 무릎을 굽혀 미끄러지듯 빈틈을 파고들었다.
어깨가 먼저 이동하고 봉은 그다음에 그림자처럼 따라 날아들었다.
까앙!
그들이 맞춰왔던 합 중 제일 그럴듯한 충돌이 일어났다.
물론 에단이 적당히 힘 조절을 하고 있긴 했지만 예전 같았으면 어림없을 충돌이었다.
봉을 놓치고 쓰러지는 대신, 쥬다스는 무리 없이 맞부딪히며 충격을 흘려냈다.
손바닥이 저릿하면서 얼얼한 느낌이 났지만 태세를 유지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드디어 몸이 머릿속의 그림을 어느 정도 재현해 낼 수 있게 되었음을 느낀 쥬다스는 침착하게 다음 합을 준비했다.
휘릭.
후퇴하듯 물러선 봉이 한 바퀴 반원을 그리며 원위치로 돌아왔다.
이를 가볍게 고쳐 잡은 쥬다스가 긴 보폭으로 단숨에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여기저기서 찔러 들어오는 공격을 막아낸 에단은 눈에 이채를 띠었다.
‘속공. 힘 자체는 크지 않으나 계산이 몹시 빠르다.’
차분하던 평소 모습과 달리 쥬다스의 전투 스타일은 빠른 호흡으로 몰아치는 속공이었다.
다른 학생들의 합을 지도하다 문득 시선을 준 메이란도 꽤나 놀란 눈을 했다.
그간 배웠던 기초적인 자세는 물론이고 웬만큼 봉에 익숙하지 않으면 즉각적으로 반응하기 어려운 기교도 간간히 섞여 있었다.
다루는 이의 힘은 보잘것없었으나 이것저것 실험이라도 하듯 보여주는 다채로운 움직임에 에단은 끓어오르려 하는 호승심을 제어했다.
지이익.
힘 대결에 밀려 바닥을 긁다시피 뒤로 밀려 나간 쥬다스를 향해 에단이 마무리를 위해 가볍게 봉을 쳐 내려던 순간이었다.
지팡이처럼 자신의 봉을 땅에 세운 쥬다스가 이를 지지대 삼아 빙글 공격을 피하고 훌쩍 뒤로 물러섰다.
서로의 공격이 닿지 않는 거리까지 사이를 벌린 그가 잔잔히 입을 열었다.
“완급을 조절하여 상대해 주느라 고생이 많았겠구나.”
“……좋은 대련이었습니다.”
에단은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여 보였다.
사실상 실력은 에단이 훨씬 우위에 있었다.
무예에 대한 감각이라든지 근력, 그리고 오랜 훈련을 통해 다져온 실질적인 임기응변 등이 봉술에도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여러 면에서 밀리는 쥬다스였지만 그가 품고 있는 봉에 대한 지식과 정교한 계산에 의한 재빠른 판단력만큼은 일품이었다.
에단은 다시금 1황자가 문과에서 신청 과목 전부 100점을 기록한 수재임을 상기해 냈다.
백치 연기(?)로 모두의 눈을 속여 온 게 무색할 만큼 그 비상한 두뇌는 무술에서도 여과 없이 가치를 드러냈다.
몸으로 체득해야 하는 봉술도 결국 머리로 먼저 이해하고 습득해 버린 것이다.
무술을 제대로 익힐 만한 체력과 육체적 감각만 주어졌다면 쥬다스는 문무를 겸비한 천재로 거듭났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무술과는 체질이 맞지 않았다.
대련에서는 훌륭하게 선방했지만 주어진 골격과 여전히 남들보다 허약한 체력 탓에 아마도 이 정도까지가 그의 한계일 터였다.
쥬다스 스스로도 그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지금의 결과에 만족했다.
상대를 맡았던 에단도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이능을 가지고 계시니 오히려 예상치 못한 훌륭한 성과다.’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한 사람이 모든 면에서 A+를 기록할 수는 없었다.
누구든 최고의 성적과 최하의 성적을 내는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중 1황자는 평균적으로 고르게 A급 능력을 보이고 있었다. 그중 무력이 B급을 찍는다 한들 이를 치명적인 단점으로 취급할 수 없었다.
지력은 물론이고 정령술이라는 훌륭한 특기가 있으며 성품이나 판단력 등 고루 지니고 있는 장점이 많았다.
그처럼 가지고 있는 능력마다 그 편차가 크지 않고 고르게 상위 수준을 유지하고 있기란 사실상 쉽지 않았다.
이어지는 이론과 응용을 들으며 봉술 수업을 마친 쥬다스는 홀로 정령학 연구소에 들렀다. 매일 1시간씩 짧게 진행되는 수업을 듣기 위해서였다.
원래대로였으면 아벨이 찾아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향했을 길이었으나 지금 그는 학생부의 처분을 기다리는 신세였다.
처분이 결정지어지는 즉시 알려주겠다고 하였으니 쥬다스는 그저 기다렸다.
그렇게 다소 허전한 심정으로 도착한 연구소에서도 놀란 시선이 그에게 쏟아졌다.
“어서 와요, 쥬다스 님.”
땅의 정령 휴를 끌어안은 채 환하게 웃는 정령학 교사 이사벨만이 평소처럼 그를 반겨주었다.
이사벨은 하루아침에 훌쩍 자라난 몸에 대해 별달리 궁금해하지 않았다.
여느 때와 같이 대해 주는 그녀의 태도는 편안함을 가져다주었다.
“……누구?”
대신 겨울바람 정령 비비를 분홍머리 위에 얹은 7살 리베흐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진심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의문스러운 시선에 쥬다스는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추어주었다.
“이런, 알아보지 못할 정도인고. 쥬다스란다.”
“……쥬다스 님? 오빠가?”
순진무구한 리베흐의 반응을 접한 쥬다스는 순간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오빠’라는 발음은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호칭이었다.
92년간의 기억이 있는 이그레트로서는 ‘할아버지’라 불리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기껏 순화해 봤자 ‘현자님’이나 ‘선생님’ 정도로 불렸다.
쥬다스의 육신이 이제 겨우 12살이라는 건 머리로 이해하고 있었지만 정작 7살 여자아이에게 오빠라 불리고 나니 무언가 기분이 미묘했다.
“…….”
쥬다스는 잠시간 침묵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키가 조금 컸지. 이리 알려주어도 영 모르겠느냐? 네 정령은 알아보는데 말이다.”
그의 시선을 받은 겨울바람 정령 비비가 방실 웃음 지었다. 머리에 있던 비비를 손바닥으로 옮겨든 리베흐는 정령의 반응을 보고서야 납득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아, 진짜?!”
“음.”
“어떻게 한 거예요? 나도 키 클래!”
아이는 늘 어른이 되고 싶어 한다. 리베흐는 자신과 비슷한 체구였던 쥬다스가 순식간에 자랐다는 사실에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골고루 잘 먹고 제 시간에 잘 자면 클 거란다.”
“이미 그러구 있는데…….”
“대견하구나.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자랄 것이야. 뭐든 갑작스러운 것보단 자연스럽게 차근차근 진행되는 것이 좋다 하니.”
“우우, 왜요?”
빨리 자라고 싶은 소녀에겐 어려운 말이었다.
쥬다스는 그 작은 머리통을 다독다독 쓰다듬어주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한꺼번에 많은 음식을 먹으면 배탈이 나지 않누. 아침, 점심, 저녁 먹을 수 있는 만큼 먹어야 배가 아프거나 고프지 않지. 이를 다른 말로 ‘소화’라 한단다.”
“먹으면 위장이 소화하는 그거?”
“오호라, 잘 아는구나. 바로 그렇다. 먹을 때만이 아니라 사람은 무엇이든 소화하는 과정이 필요해. 빠를 수도 있고 느릴 수도 있다. 때론 남들보다 늦게 출발할 수도 있지. 자신이 소화할 수 있을 때, 소화할 수 있을 만큼. 누구나 자기 속도란 게 있는 거란다.”
“자기 속도……?”
리베흐가 멍하니 되물었다.
“그래, 이 할…….”
“……?”
“……오빠처럼.”
자연스럽게 ‘할애비’라고 자신을 칭할 뻔했던 그는 어색하게 말꼬리를 돌렸다.
다행히 리베흐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듣고 대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네!”
참으로 영특한 아이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아, 오늘이 11월 11일이군요!;
독자님들 초코막대과자(?) 너무 많이 드시진 마시고....ㅎㅎㅎ
남는 물량은 솔로부대 선봉에 서있는 공든탑 대원에게 기부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제 주소는요... (말을 잇지 못하는)
사족으로 제 입장에서 이그레트를 심리/관계에 미숙하다 표현하는 이유는,
이 할배(...)는 늘 사람들과 자로 잰 듯이 거리를 유지합니다.
심성이 따뜻하지만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상대가 ‘왜 상처를 입는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야 이론상, 혹은 자기가 이해하고 있는 한에선 상대방이 상처받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보시면 작중 절친이라 부를 만한 인물들이 꽤 나오는데, 이그레트는 그네들을 전부 동일하게 대합니다. 자기가 중심이면서도 늘 한 발짝 물러서서 관망하려는 태도가 있달까... 이게 초반엔 너무 강해서 호구레트(....)라 불릴 건수를 만들었고 현재는 조금씩 알아가는 중입니다.
어찌 보면 이기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아무튼 현명하되 미숙한 불균형적인 인물입니다.
하긴 그렇다고 주인공이 특정인이나 감정에 치우치게 되면 그것도 곤란해지니... 이거 참 먼치킨도 살기 피곤하겠습니다.ㅎ
오늘도 재미있게 읽어주시고,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응원과 애정표현(?)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