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49화 (49/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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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재회

아벨 투르케의 처분이 결정지어진 건 그로부터 이틀 후였다.

결과는 <특기생 취하>.

특기 장학금이 아니면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위치에 놓인 아벨에게 있어 사실 상 퇴학이나 다름없는 결과였다.

루바흐의 모든 수업이 끝난 저녁 무렵, 학생 부장 사무엘은 손수 아벨을 데리고 쥬다스의 숙소로 찾아왔다.

쥬다스가 머무는 숙소는 루바흐에서 마련한 일종의 기숙사였다.

하지만 귀족에서부터 황족이 학생으로 입학하는 루바흐가 평민을 대상으로 하는 인재 양성 학교와 똑같은 수준의 기숙사를 제공할 리는 없었다.

기숙사는 기본 1인 1실이었고 경비와 마법 도구로 치안이 보장되어 있으며 최신 마법 설비로 안락한 환경을 구성했다.

잘 교육받은 고급 메이드들이 청결을 담당하며 건물 1층부터 2층까지 마련된 카페테리아는 오픈된 테이블과 함께 방음이 잘되는 룸도 같이 설계되어 있었다.

루바흐의 기숙사는 각 방위별로 4개, 그중에서도 쥬다스가 머무는 동쪽 기숙사는 가장 규모가 크고 고급스러운 시설이었다.

그들은 숙소 숙박 공간이 아니라 1층에 마련된 카페테리아의 룸 테이블에서 만났다.

일목요연하게 ‘아벨 투르케의 처벌 경위’, 그리고 앞으로 처리될 사항에 대해 설명한 사무엘은 쥬다스가 요청했던 전달사항이 끝나자마자 다시 바삐 자리를 떠났다.

둘만 남겨진 자리에서 쥬다스는 먼저 입을 열지 않고 아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

아벨은 메마른 잿빛 눈동자를 테이블에 놓인 베이글에 고정시켰다. 그는 현재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다 끝났어. 전부.’

더는 외면할 수조차 없다. 현실을 도피한 결과가 바로 정령 폭주였다.

계약을 하지 못해 직접 본 적도 없는 자신의 정령을 떠올리며 아벨은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제국을 비롯해 모든 국가에서 금기로 지정시킨 사령술사가 나타났다.

그 사령술사가 제물로 자신의 고향을 삼았다. 마치 폭우가 내려 홍수가 일어나듯 모든 것이 휩쓸려 사라졌다. 깔끔하게.

처음엔 놀랐고, 이어 부정했다. 그럴 리 없다며 외면하다 이내 뜨거운 분노가 가슴속을 장악했다.

‘왜 하필 나인 거지?’

모두가 웃고 즐기는 연회에서 홀로 낙오됐다.

불행은 낙석처럼 그의 눈앞을 덮쳤다. 정신을 차렸을 때엔 주변이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불러낸 정령이 범람하는 고통에 감응하여 저지른 짓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순간이지만 돌아갈 곳을 잃었다는 사실보다 정령에 대한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고마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오로지 그 하나만을 위해 공감하고 날뛰어 준 정령에게 아벨은 감사와 죄책감을 동시에 느꼈다.

결국 계약하는 데엔 실패했지만 누군가 자신의 분노를 알아주고 대신 표출해 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자신의 고향을 멸망시켰다던 사령술사에 대한 복수심도 들지 않았다. 그러기엔 자신은 한없이 초라하고 무력했다.

복수, 그것도 힘이 있는 자가 품을 수 있는 결의였다.

아벨은 자신의 주제를 깨닫고 차디찬 현실 앞에 고개를 숙였다.

‘나란 놈, 그냥 구제불능이지…….’

그는 마침내 포기했다. 이제 어찌되든 상관없었다. 루바흐에 계속 다니든 아니든, 어느 쪽이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죄송, 합니다.”

그래서 사과했다.

1황자가 자신을 부른 이유는 몰랐다.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을 비난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아벨은 힐책과 비난에 익숙했다. 여기서 더 욕을 들은들 달라질 것도 없었다.

밑바닥의 바닥까지 왔다.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최악에 이르렀으니 더는 내려갈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모든 걸 내려놓자 마음이 마냥 잔잔해졌다. 늘 초조하고 걱정하며 살아온 여태껏 겪어본 적 없는 담담함이었다.

아벨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떨릴 이유가 사라지자 더듬거리던 말도 좀 더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벨은 무기력하게 한 번 더 이유 모를 사과를 건넸다.

“……잘못했습니다.”

“그건 어떤 감정으로 하는 말이더냐?”

“……?”

들은 적 없는 질문이었다. 아벨은 고개를 숙인 채 멍하니 발끝을 바라보았다. 난리 통에 먼지가 잔뜩 묻어 지저분한 학생화가 보였다.

“네 마음에 대해 물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아벨 투르케’가 어떤 기분인지 말할 수 있겠느냐.”

보통은 고개 숙인 그에게 뭐가 미안하냐고 물었다. 대답이 그네들 기준에 타당하지 않을 경우 비웃음이나 폭력이 돌아왔다.

한 번도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 따윌 물었던 사람은 없었다.

“…….”

잠시 룸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쥬다스는 더 이상 질문을 반복하지 않았다. 그저 아벨이 스스로 입을 열 때까지 다시 기다려 주었다.

그 따뜻한 배려에 아벨은 잔잔하다고 생각했던 마음의 정체를 곱씹었다.

뭐라고 답해야 하지, 편안하다? 아니면 괴롭다?

이도 저도 아닌 극과 극의 표현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아벨은 충동적으로 툭 한 가지를 내뱉었다.

“스, 슬픈데.”

“‘슬프다’?”

쥬다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히 그가 한 말을 반복했다. 제 말을 잘 듣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에 용기를 얻은 아벨이 우물쭈물 마저 입을 열었다.

“……슬프다고 마, 말하면, 비웃을까 봐.”

“…….”

“아니, 내가 날, 비웃을까 봐. 울고 싶었는데. 근데 울지도 못하고 그냥, 웃을까 봐. 그, 그래서.”

두서없이 흘러나오는 말이 다시 제 귀로 돌아왔다. 아벨은 무기력하게 늘어뜨렸던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서…….”

슬프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랬는데 지금은 어째선지 숨길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그뿐입니다. 사실은 누구보다 약한 내가 무섭고 슬픈데. 그냥 말을 못할 뿐.’

언어화되지 못한 상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투둑.

대신 꽉 쥔 주먹 위로 눈물자국이 얼룩졌다.

‘……겁쟁이.’

아벨은 자신을 돌아보며 울었다. 복수도, 희망도 꿈꾸지 못한 자신이 그렇게 한심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열심히 견뎌왔다는 이유만으로 포기하려 했다.

그는 뒤늦게 저가 자신으로부터 줄곧 도망쳐 왔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걸 인정하는 게 이렇게 간단한 일이었는데 왜 못했을까.

아벨은 주먹을 움켜쥐고 아이처럼 울었다.

폭풍 같던 울음이 그쳐 갈 때 즈음, 가만 지켜보기만 하던 쥬다스가 그를 불렀다.

“아벨아.”

흡사 동생을 부르듯 다정한 부름에 아벨이 흠칫 어깨를 털며 고개를 들었다. 울고 나니 쓸데없는 잡념이 사라져 겨우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내게 정령술을 배워볼 생각이 있느냐.”

“……네?”

목이 갈라져 쉰 소리가 났으나 쥬다스는 재차 그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아벨 네겐 충분한 재능이 있다. 미계약 상태의 정령이 스스로 너를 돕길 원해 여직 네 주변을 맴돌고 있을 정도야. 하여, 내 너에게 재능을 꽃피울 기회를 만들어주고자 한다.”

“저, 정령이…… 아직 제 곁에.”

“그래, 그 힘을 어찌 사용할지에 대해서는 오로지 네 선택에 달렸다. 나는 그저 너를 선택한 정령의 믿음을 배반하지 않는 길을 가길 바랄 뿐이란다. 어찌, 아벨 네 정령을 만나보겠느냐?”

“……!”

끝났다고 생각한 곳에 길이 하나 남아 있었다. 정령술사가 되어 자신만의 정령을 만나는 건 고향과 별개로 그의 오랜 꿈이기도 했다.

아벨은 당장 눈앞에 내려진 동아줄을 부여잡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치미는 의구심을 거둘 수 없어 물었다.

“……당신은, 왜 제게?”

목적 없이 잘해 주는 사람은 없다. 적어도 아벨이 바라보는 세상은 그랬다.

흔들리는 잿빛 눈동자를 마주한 쥬다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과거 너와 닮은 아이가 있었지.”

어찌 보면 자신이 뿌린 씨였다. 아벨은 그 희생자였으며 방관한 ‘이그레트’에게도 그 책임이 있었다. 비단 책임감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쥬다스는 미안한 낯빛으로 말을 이었다.

“내 불찰로 상처를 받은 아이였다. 또 그 아이가 다시 너를 비롯한 많은 이에게 상처를 남겼구나. 미안하다. 이는 나의 과거로부터 뿌리가 난 것이니 내가 거둠이 옳겠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던 황자의 금안이 이내 숨을 죽여 경청하는 아벨을 올곧게 바라보았다.

“또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구나. 그래, 사사로운 욕심이라 여겨주련.”

“…….”

만일 이 제안이 그저 꿀을 발라 달콤해 보이는 쥐덫이라도 그는 거절할 수 없었다.

아벨은 1황자 앞에 털썩 무릎 꿇었다.

“거, 거두십시오. 욕심대로 쓰셔도 좋고, 한낱 당신께서 하려는 일의 거름으로 쓰실지언정.”

그는 제 삶에 마지막으로 내려진 동아줄을 붙들었다.

“말씀에 따르겠나이다, 전하.”

* * *

다음 날 쥬다스는 더 지체하지 않고 황실에서 보내온 소환장을 챙겨 교무처로 찾아갔다.

황실의 도장이 찍힌 소환장은 단번에 그 효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즉시 적법한 확인 절차를 밟은 후 외출증을 교부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벨 역시 함께 교무처로 가 자퇴서를 제출했다. 루바흐에서 자퇴를 처리하기까지엔 시일이 좀 걸렸다.

어차피 학교에 남아 있을 재력, 명예도 모두 사라진 아벨은 미련 없이 자퇴서를 내고 쥬다스의 뒤를 따라 교내 잔디 공원으로 이동했다.

봄기운이 무르익어 짙은 녹색으로 자라난 짧은 잔디는 분수대를 끼고 넓게 펼쳐져 있었다.

학생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군데군데 벤치나 매끈한 대리석이 깔려 있었다. 쥬다스는 벤치 대신 널찍한 대리석으로 향했다.

아벨이 그 뒤에 우물쭈물 따라붙었고,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이 일어나 그들을 반겼다.

원래 쥬다스와 붙어 다니던 에단을 선두로, 1황자의 편에 설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크리스티나, 바이칼, 마르젠이었다.

그들은 쥬다스의 황궁 행에 대해 미리 언질을 받고 모인 상태였다.

그렇게 총 여섯 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황실로 가신다고요?”

바이칼이 먼저 운을 떼었다.

“그래, 내일 출발하려 한단다.”

“예?! 당장 내일 말입니까?”

“하하,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좀 갑작스럽네요.”

마르젠이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교복 재킷을 벗었다. 햇볕이 내리쬐는 잔디밭은 이제 슬슬 겉옷을 걸치고 있기엔 기온이 높았다. 재킷을 접어 팔에 걸쳐 든 마르젠이 쥬다스를 빤히 바라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확실히 지금이 폐하께서 부르실 만한 시점이긴 합니다. 아니, 사실 조금 늦었습니다.”

백로황자에 대한 소문은 루바흐는 물론이고 축제에 참석한 귀족 학부형들의 눈과 귀를 타고 삽시간에 제국 전체에 퍼졌다.

거의 기적에 가까운 변화였기에 평민은 몰라도 귀족이라면 아이부터 노인까지 그 소문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

‘황제 폐하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하심은, 드디어.’

그 소문은 결국 황제의 흥미를 끌었다. 마르젠의 감색 눈이 가늘어졌다.

‘비어 있던 황태자 자리에 주인이 생긴다는 뜻.’

그게 1황자가 될지 다른 유능한 황자가 꿰차고 앉게 될지는 아직 판단하기 일렀다.

하지만 마르젠은 불안 대신 기대를 느꼈다. 그는 자신의 감을 믿었고, 1황자에 대한 감은 몹시 선명했다.

마르젠은 슬슬 자신이 움직여야 할 때임을 알아차렸다.

“그럼 다녀오시는 동안, 저희는…….”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에단, 크리스티나, 바이칼이 일제히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동행하겠습니다.”

짠 듯이 황자와의 동행 의지를 밝힌 세 사람은 이번엔 나란히 입을 다물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댁들이 왜?’라는 눈치를 보내는 그들을 보며 마르젠 역시 속으로 당황했다.

‘……뭐지, 이 사람들. 전부 수업을 빠지고서 따라가겠다고?’

아무리 허가를 받고 결석을 한다 해도 수업에 빠지면 불이익이 컸다.

평가에 예민한 귀족 사회에서 성적을 저조하게 받았다는 건 흠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지금껏 성적 관리에 철저했던 크리스티나의 경우 더욱 치명적일 수 있었다.

그녀만큼은 아니더라도 박 터지게 공부하여 석차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던 바이칼도 마찬가지였으며 신입으로 입학한 에단 역시 이번이 첫 학기인 만큼 보다 세심한 성적 관리가 필요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쥬다스가 부드럽게 손을 내저어 보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시험을 앞둔 수험생 여러분, 편안한 몸과 마음으로 시험장에 다녀오실 수 있길 바랍니다.

결과에 상관없이 웃으며 하루를 마칠 수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그 길을 지나온 선배로서 어깨를 두드려주고 싶습니다. 그동안, 정말로 잘 견뎌오셨습니다.

그리고 수험생이 아닌 독자님들도 오늘 하루 편안하고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과 사랑에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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