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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재회
“음? 그럴 필요까진 없단다. 다녀오려면 열흘이 넘을 텐데 그간 수업을 전부 빠지는 건 너무 아쉽지 않겠누.”
“……괜찮습니다.”
에단이 먼저 굳은 의지를 밝혔다. 충성 서약을 결심한 만큼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더라도 이미 1황자는 그가 따르기로 마음먹은 주군이었다.
결석으로 인해 받는 불이익과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는 대상이었다.
“따르겠습니다.”
따로 말하진 않았지만 크리스티나와 바이칼 역시 같은 뜻이었다.
한 치의 흔들림 없는 결연한 눈빛을 한 사람씩 마주한 쥬다스는 더 이상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그로서는 딱히 강제할 이유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쥬다스는 아이들의 결정을 수용했다. 더 말리지 않는 쥬다스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뱉은 그들은 그제야 뒤늦게 멀거니 뒤에 서 있는 아벨을 발견하였다.
여전히 표정이 어둡긴 했지만 확실히 빛이 돌아온 눈을 확인한 바이칼이 퉁명스레 툭 말을 건넸다.
“이제 정신 좀 드냐.”
“…….”
“어우 씨, 그때 엄청 놀랐는데. 도와주려고 가까이 갔다가 네 그 성질 더러운 정령한테 썰려서 죽는 줄…….”
툴툴대는 엄살에 아벨은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한참을 망설였다.
사실 정령 폭주를 일으킨 당시 상황에선 그 자신도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별로 기억나는 게 없었다.
에단과 바이칼이 도와주려 난입했던 건 어렴풋이 떠올랐지만 자세한 건 안개라도 낀 듯이 흐릿했다.
딱히 대답을 요한 게 아니었던지라 홀로 구시렁거리던 바이칼이 문득 엇 하고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그 정령은 도대체 무슨 정령이었지? 거 왜, 물이나 바람 이런 건 아닌 것 같던데. 원래 정령 자체가 희귀하긴 하다지만 살면서 그런 정령은 듣도 보도 못했어.”
“……그, 그건.”
사실 정령에 대해 궁금하기로 따지면 아벨이 더했다. 자신이 소환한 정령이라 해도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당연히 계약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쩔쩔매고 대답하지 못하는 그 대신 쥬다스가 부드럽게 답했다.
“거울의 정령이란다.”
“예?”
“……네?”
생소한 명칭이었다.
쥬다스는 제 어깨에서 뒹굴고 있는 유니를 살짝 들어다 손바닥에 놓았다.
“너희가 익히 알고 있는 정령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인 자연계 4속성일 터. 하나 세상엔 다양한 정령이 존재한다 하더구나.”
그가 지금 하는 말이 ‘~하더라’ 하는 전달식인 이유는 그 역시 자연계 외 정령을 직접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쥬다스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아벨의 뒤에 그림자처럼 동동 떠 있는 거울의 정령을 바라보았다.
보통 자연계 정령이 인간이나 동물 등 살아 있는 생물체의 형상을 취하는 것과 달리 물질계에 속하는 거울의 정령은 그저 뭉실뭉실한 안개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눈코입이 없으며 거대한 먼지 덩어리처럼 그저 허공에 둥실둥실 떠있을 뿐이었다. 그가 보기에 전혀 살아 있는 느낌이 안 들었다.
「그러니까 우리랑은 먼 친척뻘인 셈이야! 관여할 수 있는 영역이랑 힘이 정말 많이 다르거든. 쟤들은 우리랑 사는 동네도 달라. 정령계가 아니라, 뭐라지.」
「우웅, 이공간? 차공간? 비스므리한 거였다요.」
「아공간(亞空間). 무의 세계, 왜곡되고 비틀린 공간이다.」
다른 사람 귀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세 정령이 그에게 정보를 전달해 주는 중이었다.
쥬다스는 자신이 알고 있던 사실에 이를 취합하여 적당히 필요한 부분만을 아이들에게 재전달했다.
“아벨이 소환해 낸 정령은 물질계, 그중 거울 속성을 가진 정령이라 한다. 거울이 가지고 있는 ‘반사’의 특징을 마음대로 다를 수 있는 모양이야.”
“……그래서 그때, 도플갱어처럼 제 모습을 흉내 냈던 거로군요.”
거울의 정령을 정면으로 상대했었던 에단이 당시를 떠올리며 수긍했다.
쌍둥이처럼 똑같았던 모습에 심지어 원판이 가진 능력마저 복제해 낸 그 정령의 속성이 ‘거울’이라면 말이 되었다.
무력에 초점을 맞춘 에단과 달리 마르젠이 눈을 빛내며 턱을 짚었다.
“호오, 그거 엄청난데요? 사용하는 자가 어떤 목적을 가지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마음만 먹는다면야 손쉽게 아비규환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겁니다.”
꼭 무력만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니었다.
실력 있는 정령술사가 아닌 이상에야 구별이 힘든 ‘가짜’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는 자칫 악용될 경우 큰 혼란과 분란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이었다.
당장 마르젠이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만 해도 정계의 혼란이나 국제적인 분쟁을 일으킬 만한 건수가 수십 가지였다.
하지만 쥬다스는 이미 그 부분을 생각해 두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아직 아벨에게 정령술을 가르치지 않았다.
“아벨은 루바흐의 학생이 아니게 될 것이야.”
“그건……. 오히려 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에단이 조심스레 질문했다. 아벨이 가진 힘은 시야 밖에 놓아두기엔 너무 위험했다. 자신이 맹수임을 모르는 어린 불곰을 길거리에 풀어놓는 격이었다.
아직 새끼에 불과한 곰이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무력하게 죽어갈 수도 있지만, 예상외로 잘 견디다 누군가의 목을 물어뜯을 수도 있었다.
한 번 피 맛을 알고 자신이 맹수임을 깨닫게 되면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터였다.
본래 통제 불능의 위협이 더 위험한 법이었다. 차라리 학교 안에 두고 감시하는 게 나았다.
쥬다스는 에단이 뜻한 바를 두고 부드럽게 대답했다.
“학생이 아니니 더는 수업을 듣지도 성적에 연연할 필요도 없지. 대신 아벨은 앞으로 ‘연구원’ 자격으로 루바흐의 정령학 연구소에 머물게 될 게다.”
“‘연구원’……?”
가만히 듣고 있던 크리스티나가 그 말을 되풀이하며 팔짱을 끼었다.
이는 쥬다스가 학생 부장 사무엘에게 특별히 부탁한 처리 내용이었다.
아벨은 어제부로 투르케 남작가의 자제가 아니라 1황자 휘하로 소재를 변경했다.
황자의 이름 아래 보호받으며 그 재능을 지원하여 ‘정령학 연구원’으로 자질을 키울 수 있도록 한다.
단 향후 있을 모든 책임은 쥬다스가 짊어지는 조건이었다.
또한 이제 학생이 아닌 연구원인 만큼 루바흐의 시설 중 정령학 연구소만이 그에게 허가될 예정이었다.
사실상 정령술이 아닌 다른 학업에는 재능이 없으며 관심도 보이지 않는 아벨로서는 최적의 선택이기도 했다.
비록 루바흐의 졸업장이 나오진 않을 테지만, 적어도 원하던 정령술을 배워 수련할 수는 있게 된 셈이다.
“확실히 그 편이 효율적이군요.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쥬다스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러나 쥬다스를 믿는 것이지 아벨을 믿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서늘한 눈으로 흘끗 아벨을 쳐다보았다.
“아벨이라 했나. 네가 속했던 투르케 사막은 완전히 얼어붙었다고 했지. 너는 멸망한 고향에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나.”
“…….”
“어려운가? 네 사사로운 감정과 복수심 따위에 흔들려 쥬다스 님을 곤경에 빠뜨리지 않을 수 있겠냐는 뜻이다.”
듣는 사람의 상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차가운 어조였다. 하지만 그 물음에는 틀림이 없었다.
쥬다스는 가뜩이나 여기저기서 노리고 있는 적이 많았다. 심지어 그를 도울 외척도 없었다.
그의 모계는 루바르잔 제국 출신이 아니었다. 알려지기로는 먼 타국에서부터 동맹혼을 위해 찾아온 왕녀라고 전해졌다.
하지만 그마저도 5년 전, 그녀의 의문스러운 죽음과 동시에 국가 간 왕래가 끊기다시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인 아벨을 거두는 걸 그냥 두 손 놓고 바라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크리스티나의 차가운 어투에 아벨은 움찔 어깨를 좁혔다. 그러나 소심하게 움츠러든 모습과 달리 금방 입을 열어 답했다.
“흐, 흔들리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무엇보다, 전하의 뜻, 을 따르려 합니다.”
탐탁지 않다는 듯 냉기를 풀풀 날리는 크리스티나에게 쥬다스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서 내일 먼저 투르케를 들릴 생각이란다.”
“투르케를……?”
모두의 시선이 아벨을 향했다가 다시 고무줄처럼 쥬다스에게로 돌아왔다.
“어, 쥬다스 님, 투르케 사막은 수도와 다른 방향으로 알고 있는데요.”
바이칼이 코끝을 문지르며 의문을 제기했다. 다른 이들도 그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루바흐 학원은 제국 서쪽의 넓은 지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수도는 교황청과 마찬가지로 제국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고, 투르케 사막은 최남단 끝에 펼쳐진 황량한 대지였다.
루바흐에서 투르케 사막을 들렀다가려면 아무리 포탈을 통한다 한들 한참을 돌아서 이동해야 했다.
“돌아갈 곳을 잃었다 하여 무작정 잊으라 하는 건 핍박이나 다름없다. 스스로 현실을 보고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할 테지. 그러고 나서 황궁으로 가도 늦지 않아.”
“하지만, 어떻게.”
“보거라.”
쥬다스는 가볍게 유니의 힘을 사용했다.
모두의 의문을 종식시키는 방법은 간단했다.
솨아아.
어디선가 불어온 녹색 바람이 잔디 위를 한차례 쓸고 지나갔다. 그중 일부는 쥬다스의 손에 몰려들어 작게 회오리를 그리고 있었다.
후웅.
“바람이 지나는 길은 하나가 아니란다.”
은빛의 황자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1황자가 ‘바람의 부름’이나 ‘바람의 인도’ 정도의 상급 기술을 다룰 줄 아는 정령술사였음을 상기해 냈다.
물론 일반적으로 상급 정령술사가 활용 가능한 범위는 그리 넓지 않았다.
최상급 바람의 정령이 가진 힘으론 기껏해야 가시거리에 해당하는 영역을 이동할 수 있었는데, 그에 비해 정령왕인 유니의 힘이라면 지금 당장에라도 투르케로 이동이 가능했다.
하지만 쥬다스는 자신이 다루는 힘을 온전히 개방할 생각은 없었다.
“현재 제국에서 다루는 포탈은 정령석을 장착하여 안전히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지. 여기에 정령의 힘을 더해 준다면 효율을 어느 정도 증폭시킬 수 있단다.”
그는 그중 일부의 활용법을 알려주었다.
* * *
다음 날 아침 6명의 학생은 루바흐 포탈 앞에서 다시 모였다.
확고히 의지를 드러냈던 에단과 크리스티나, 바이칼은 아예 외출증까지 따로 챙겨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간밤 고민한 흔적이 역력한 마르젠은 푸석해진 얼굴로 나와서 동참 의지를 겨우 밝혔다.
‘이런 때 잘 보이지 않으면…….’
원래대로라면 황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 학원 내에서 그의 추종 세력을 만들 생각이었다.
마르젠은 이미 많은 귀족과 그 자제로부터 정치적인 능력과 처세술을 인정받고 있는 정계형 인재였다.
그의 정보력은 십 대 소년답지 않게 빠르고 정확한 걸로 소문이 자자하였으며 때문에 그를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이고자 눈독 들이는 지도층이 많았다.
마르젠은 이를 역으로 끌어들여 1황자의 편으로 돌리는 작업을 구상하고 있었다.
자신이 가진 연줄을 중심으로 그를 황좌에 앉혀 놓을 수만 있다면 새 지도층을 좌지우지할 거대한 힘이 생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다 1황자가 자신을 믿고 최측근으로 여기기 시작했을 때에서야 가능한 일들이었다.
기껏 날개를 달아주려는데 정작 본인이 거부해 버린다면 끈 떨어진 뒤웅박마냥 낙오될 게 뻔했다.
마르젠은 피 같은 물밑 작업을 포기하고 황자의 신임을 얻기 위한 행동을 택했다.
“의외로군. 네가 몸을 사리지 않을 때가 다 있다니.”
그런 마르젠을 향해 크리스티나는 여전히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하핫~ 최대한 사리고 있는 겁니다? 뭐, 그만큼 쥬다스 님께 큰 기대를 걸고 있다고 알아봐 주시면 좋겠군요.”
“쯧, 네가 무슨 기대를 걸든 관심 없어. 쓸데없이 방해하지나 마.”
그녀의 날선 경고에 마르젠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는 걸로 답했다. 정말이지 예전부터 입맛을 맞춰주기 어려운 아가씨였다.
마르젠은 크리스티나에게서 호언을 듣느니 차라리 목석같이 입을 꾹 다문 에단으로부터 호감을 사는 편이 훨씬 쉬우리라 생각했다.
물론 그것도 상당히 엇나간 추측이었다.
“외출 확인증을 제출해 주십시오.”
포탈 관리자의 요구에 대표로 확인증을 모아 들고 있던 쥬다스가 이를 건넸다.
총 인원수를 확인한 포탈 관리자는 포탈의 동력을 작동시키며 주의 사항을 알렸다.
“외출 허용 기간은 최대 14일입니다. 연장 신청은 기간이 끝나기 전에 해당 지역 포탈에서 따로 해주셔야 하며, 무단으로 어길 시 해당 기간 수업의 학점에 반영됩니다.”
커다란 전신 거울처럼 생긴 포탈의 내부가 물결치듯 일렁였다.
마법력에 의한 공간 분리, 즉 굴절이 일어나고 있었다.
“미성년자의 포탈 이용 가능 횟수는 하루 1회입니다. 최종 목적지는 루바르잔 황성이며 총 3일에 걸쳐 제1, 제2, 최종 목적지까지 이동하게 됩니다. 지금 향하실 제1목적지는 샤를로 영지입니다.”
황성은 수도에 위치해 있었기에 지난번 진명식 때 다녀왔던 교황청과 같은 경로를 지나도록 포탈 좌표가 잡혀 있었다.
하지만 쥬다스는 이에 대해 수정을 요청했다.
“제1목적지를 투르케 사막으로 변경해 주십시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그러고 보니 어느 틈엔가 50화 기점을 찍었네요. 여러분은 완결까지 대략 1/4을 함께 하셨습니다. ㅎㅎ
잘 따라오고 계십니까~?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매일 한 걸음씩 걸어가고 있습니다. 가끔 이렇게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 괜시리 뿌듯해지고 그러네요.ㅋ
카니에 대해선... 진짜 입이 엄청 근질거리는데 꾹 참고 있습니다. ㄷㄷ; 음...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ㅎ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평점 등 보내주신 응원과 애정에 늘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