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52화 (5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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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재회

그 반응을 재미있다는 듯 응시한 프리드가 피가 방울져 매달린 상대의 턱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정령 역소환에 의한 부작용. 많이 아프겠군.”

캇.

칼날처럼 몰아닥친 바람이 프리드의 손등을 할퀴고 지나갔다. 더 다가온다면 아예 손목을 잘라 버릴 기세였다.

흉흉한 정령의 경고에 프리드는 항복하듯 손을 떼며 피식 웃었다.

“이봐, 전하. 내가 지금 어디에서 왔는지 아나?”

“…….”

“황성을 다녀오는 길이다. 혈통이니 존엄이니 떠들어대며 썩은 내를 풀풀 풍겨대는 쓰레기들이 가득한 곳이지. 그런데 소득은 있었다. 마침 너에 대해서 재미있는 얘길 듣고 오는 길이거든.”

제국의 황성을 강아지 개집 드나들 듯 가볍게 다녀왔다는 말에 쥬다스의 표정이 한층 굳어졌다.

“말해. 너는 ‘이그레트’ 그자와 무슨 관련이 있지.”

쥬다스가 내내 대답을 하지 않자 프리드는 쭈그렸던 무릎을 폈다. 우뚝 선 채 피로 물든 모래를 짓밟은 그가 살기와 광기가 뒤섞인 눈으로 다시금 물었다.

“혹 숨겨둔 제자라도 되는 거냐? 그는 어디에 있지?”

“…….”

“나 참, 벙어리마냥 입을 안 여니 원. 별수 없군.”

프리드는 품속에서 어린아이 주먹만 한 돌을 꺼내 들었다.

“꼬마 황자, 이게 뭔지 알아?”

우웅.

익숙한 기운을 느낀 쥬다스가 고개를 들어 돌을 응시했다.

‘정령석.’

하지만 이건 그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정령석과는 조금 달랐다.

일단 이그레트가 만들어낸 정령석은 크기부터가 저렇게 크지 않았다.

주먹은커녕 손톱만 한 크기에 주변의 정령을 불러들여 그 힘을 빌려 쓸 수 있도록 해주는 일종의 매개체였다.

그랬다. 정령석이란 본디 정령의 힘을 빌리는 돌이었다. 지금 프리드가 들고 있는 것처럼 정령을 속박하는 기능 따위가 아니었다.

“그 위선자가 지배하고 있던 힘의 일부지. 아직 완벽하게 다루지는 못하지만, 사령술과 접목하니 그럴듯해지더군.”

화르륵!

잘게 진동하던 정령석에서 시뻘건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붉은 불꽃 사이사이 검은 기운이 혼탁하게 뒤섞여 있었다.

거칠게 솟구친 불길이 마침내 하나의 형상을 갖추자 프리드는 만족스레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불의 왕.”

「…….」

노을빛 머리카락이 사락 자리를 잡았다. 가냘픈 여인의 형상을 완성해 낸 불의 정령이 검은 원피스 자락을 흩날리며 눈을 떴다.

사령의 기운이 침식하여 동공이 까맣게 물든 상태였다.

「……카니?」

그녀를 알아본 유니가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맴돌았다. 토니와 루니도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틀림없이 카니다요!」

「……저 녀석이 왜 저딴 인간 손에.」

정령은 오로지 술사의 소망에만 반응한다. 그러나 지금 카니는 계약자가 아닌 존재의 부름에 응한 상태였다.

유니가 제일 먼저 이질적인 기운의 정체를 알아채고 쥬다스를 돌아보았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어서 믿기진 않지만.」

유니의 녹색 눈동자가 걱정을 담고 그를 향했다.

「……아무래도 죽음의 기운에 잠식당한 것 같아. 카니.」

정령과 사령은 각각 빛과 그림자처럼 정반대의 성질을 품고 있는 존재였다.

자연계의 생명력을 관할하는 4속성 정령과 달리 사령이란 죽음의 기운을 양분 삼아 움직인다.

나뭇가지에 불을 붙이면 타버리고 그 불에 물을 끼얹으면 식어버리듯 그 둘은 결코 융합될 수 없는 존재였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쥬다스는 너덜너덜해진 몸 상태와 별개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게 되었다.

처음으로 잔잔하던 눈에 동요가 일었다.

“이상도 하지. 내가 불의 왕을 잡아둔 건 꼬마가 아닌 노인을 찾아내려는 목적이었다만.”

“……프리드.”

“흠?”

말 한마디 꺼내는 데에도 폐부를 쥐어짜는 고통이 찾아왔다. 하지만 쥬다스는 멈추지 않고 다시 입을 열어 또박또박 그를 향해 물었다.

“카니에게, 쿨럭. 무슨 짓을 한 게냐.”

“뭐?”

프리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황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쥬다스의 말뜻을 알아듣고 손에 들고 있던 정령석을 들어 올렸다.

그 안에 눈이 시리도록 검은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아아, ‘카니’.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뭐 조금 손봐줬을 뿐이다. 계약하지 않고도 정령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돌이라니, 이 얼마나 편리한가?”

“…….”

“편리를 개발해 놓고도 거기서 더 발전하지 않는 게 멍청한 거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야. 힘이 있는데 사용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지.”

“저 아이를…… 어찌한 것이냐.”

“그게 궁금한가? 내가 건드린 건 불의 왕만이 아닐 텐데. 한 번 쭉 둘러보라고.”

프리드는 무감정하게 한 손을 들어 주변을 가리켰다. 검은 비둘기가 새겨진 회색 로브가 찬바람을 머금고 펄럭였다.

그 말대로 프리드의 손에 타격을 받은 건 불의 정령왕뿐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투르케 사막이 규모로 보나 사라진 생명으로 보나 훨씬 피해가 컸다.

그러나 쥬다스의 시선은 검은 불꽃에 잠식된 카니로부터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를 확인한 프리드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역시 네놈은.’

그가 지금껏 굳이 할 필요도 없는 대화를 질리지도 않고 주절거린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한때 이그레트의 가장 곁에서 그를 따랐던 프리드였다.

정령왕들이 이그레트로부터 어떤 이름을 부여받았는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이그레트에 관련된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애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마저 전부 꿰뚫고 있었다.

황궁에 다녀오면서 알게 된 정보로 인해 어느 정도 짐작은 했었지만 그저 심증일 뿐이었다.

지금 여기서 직접 1황자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프리드는 아직 그를 흥미로운 꼬마 정도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달랐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불의 정령왕을 ‘카니’라고 부르는 존재는 이그레트, 단 하나뿐이었다.

프리드는 드디어 목표에 근접했다는 기쁨을 감추지 않고 내색했다. 손바닥으로 입가를 짚은 그가 아이처럼 키득거렸다.

“좋아, 보여드리지. 똑똑한 꼬마라면 알아볼 수 있을 테니.”

화르륵.

변질된 정령석을 든 프리드의 손짓에 따라 카니가 불길을 일으켰다.

속은 붉었지만 겉으로 갈수록 새카맣게 타오르는 이형의 불꽃은 기름 부은 것처럼 그 세기를 더했다.

검은 기운에 사로잡혀 미동 없이 서 있는 카니의 붉은 날개에서 타오르는 깃털이 흩날렸다. 흡사 타락한 천사와 같은 모습이었다.

“…….”

쥬다스는 물러서거나 다른 정령의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주변을 넘실거리는 불길을 내버려 둔 채 카니의 검은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곤 비틀거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니.”

“이런, 그만두는 게 좋아. 억지로 부르려고 해봤자 역소환 충격만 더 되받을 뿐이다.”

자책감으로 얼룩진 금안이 잘게 일렁였다.

쥬다스는 검은 불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사령에 잠식당한 정령에겐 소용없어야 할 접근이었다.

퍼엉!

불길이 폭발하며 사방에 그을음이 흩날렸다.

‘자, 어서 보여 봐라. 그저 자질만 그럴듯한 애송이 황자인지, 아니면…….’

프리드의 눈이 흥미진진하게 그들을 향했다. 현재 불의 정령왕을 통제하는 건 그의 손에 들린 정령석이었다.

공격 명령을 따로 입력하진 않았어도 사령의 기운에 잠식당한 정령은 사납게 날뛰게 되어 있다. 이성이 사라지고 파괴적인 본능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그레트.」

유니가 걱정스레 그를 부르며 뒤를 따랐다. 피아 구분 없이 마구잡이로 날아드는 불덩이는 전부 세 정령의 힘에 의해 산화되었다.

그가 옮기는 걸음에 따라 물과 바람, 대지의 기운이 불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했다.

“미안하다.”

화륵!

그의 사과는 불의 정령에게 닿지 못했다. 오히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불길을 연달아 피워 올렸다. 그를 태워 버리기 위한 검은 불꽃이 지척에서 넘실거렸다.

하지만 쥬다스는 그마저도 가뿐히 무시하고 정령의 힘에 접촉했다.

“……이리 오련.”

떨리는 손끝이 정령의 이마에 박혀 있는 붉은 보석에 닿았다. 그러자 이변이 일어났다.

우우웅!

영혼과 영혼이 공명하며 검은 불꽃이 삽시간에 정화되기 시작했다.

“……!”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강한 ‘술사의 부름’이었다.

이를 본 프리드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정령석과 융합된 사령의 진득한 기운마저 몰아낼 정도로 강한 힘에 그가 들고 있던 정령석에 쩍 하니 금이 갔다.

쩌― 엉!

“……허?”

간단한 해박(解縛)이었다.

슈욱.

정령을 잠식하고 있던 사령이 물위에 기름 뜨듯 분리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역시 불완전한 채로는 무리였나. 하지만 이로써 한 가지는 확실해졌군.’

프리드는 작게 혀를 차며 깨진 정령석을 미련 없이 버렸다.

어차피 이번 건은 ‘이그레트’의 행방을 찾는 게 목적이었다.

이그레트가 아니라면 깨뜨릴 수 없는 힘이었으니, 카니를 데려온 것은 그를 시험한 것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 시험의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프리드는 검은 기운이 사라져 제 빛깔로 타오르기 시작한 불의 정령왕을 보며 가볍게 팔짱을 꼈다.

「…….」

다홍색 눈망울을 되찾은 카니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몽롱한 얼굴이었다.

“카니.”

다시금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은빛 머리카락, 그리고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따스함을 담은 금색 눈동자.

생소한 외형이었으나 그 안의 영혼만큼은 그토록 그리워했던 사람의 것이었다.

여인의 모습으로 현신한 불의 정령은 와락 눈앞의 소년을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요. 정말로. 보고 싶었어…….」

쥬다스는 익숙한 손길로 그녀의 떨리는 등을 다독여 주었다. 노을빛 머리카락과 붉은 깃털이 뒤섞여 하늘거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프리드는 돌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큭, 하핫, 하하하하!”

‘찾았다’.

뚝 웃음을 멈춘 그가 스윽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며 말했다.

“정말 믿기지가 않는군. 설마 설마 했는데, 도리나 순리 따위를 지껄이던 당신이? 하하하, 예상 밖의 일이야. 자연의 사랑을 받아 선하고 순수한 영혼이라 칭송받으며 더럽다 여겨지는 일에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이그레트 님 당신이…….”

들떠 있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낮게 가라앉았다.

“사상 최악으로 더러운 그 몸에 깃들어 있을 줄이야.”

프리드는 본래 황족을 매우 싫어했다. 그러니 당연히 제국에 충성하지도 않았다.

귀족 출신이었으나 과감히 성을 버리고 이름 석 자만 가지고 살아가는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황족과 제국의 계급 사회에 신물 나 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그 이유로 하는 말치고는 무언가 어감이 달랐다.

프리드는 그 점에 대해서는 더 언급하지 않고 넘어갔다.

“여하튼 그래, 우리는 한때 같은 목표를 향해 손잡았던 동료였지 않은가? 건재하게 살아 계셔서 아주 기쁠 따름이야.”

“나를 찾아다닌 게냐. 왜……?”

“정확히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힘이지. 어차피 제대로 사용할 생각도 없지 않나. 힘이란 건 쓸 줄 아는 사람이 갖는 편이 어울릴 테니.”

후우웅.

허공에 몰려든 녹색 바람이 날카로운 칼날을 형성해 프리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위협적인 태도에도 프리드는 그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파앙!

찢어지는 듯한 파공음과 함께 바람은 프리드를 감싼 검은 장막에 가로막혀 산산이 흩어졌다.

“뭐 당장 어쩌겠다는 건 아니니 진정해. 당신이 다 죽어가는 노인이었다면 상황은 달라졌겠지만, 아쉽게도.”

프리드는 계획을 조금 수정할 필요를 느꼈다.

어쨌든 지금은 ‘이그레트’의 생존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다음에 다시 찾아오도록 하지.”

“……그건 곤란하구나.”

“흐음?”

막 뒤를 돌려던 프리드는 고개를 꺾어 쥬다스를 쳐다보았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부드럽기만 하던 그의 눈빛이, 약간의 한기를 품고 서늘하게 그를 마주 하고 있었다.

우득, 우드득.

순식간에 얼어붙은 사막 모래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프리드는 흔들리는 땅을 피해 훌쩍 자리를 이동했다.

균열이 일어난 틈새로 솟구쳐 오른 모래더미가 괴수처럼 그를 덮쳤다.

얼음 알갱이가 사방으로 튀어 흩날렸다.

사령의 기운이 몰려들어 모래를 막아냈으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부글부글.

고열로 인해 하얀 증기를 뿜어내는 물줄기가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펄펄 끓는 온도의 물은 허공에 뭉쳐 수룡의 형태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대로 프리드를 향해 내리꽂혔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몸 상태가.. 영 좋지 않아 어제 하루는 쉬고 왔습니다.ㅠㅠ 기다리신 독자님들이 계실 줄이야...! 죄송합니다.(꾸벅)

오늘의 팁 : 사령은 죽음을 다루는 정령, 혹은 일종의 유령 같은 개념입니다. 언데드나 네크로맨서를 떠올리셔도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늙은 몸을 생기넘치는 젊은 몸으로 바꾸거나 빈 육신에 옮겨가는 일도 가능합니다.

부작용은 사령술사의 영혼은 영원히 사령의 소유로 넘어간다는 점... 또한 작중 나오겠지만, 이런 사령술사도 사용가능한 힘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무적은 아닙니다.ㅎ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따뜻한 응원에 늘 감사드립니다. ^^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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