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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재회
갑작스러운 연쇄 공격에 프리드가 부리는 사령은 맥을 못 추고 흐트러졌다.
치익 소리와 함께 녹아내린 방호벽 사이로 이번엔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이 몰아닥쳤다.
서걱!
몸을 돌려 피한다고 피했지만 왼팔이 통째로 날아가 모래에 처박혔다.
팔이 잘린 꼴을 힐끗 내려다본 프리드는 고통에 찬 비명 대신 작게 탄성을 흘렸다.
“호오―? 제법 과격한 행동도 할 줄 알게 되셨나 본데.”
“여기서 더 무엇을 바라는지는 짐작이 가지 않는다만. 하나 지금 네 행동은 도를 넘었다 여겨지는구나, 프리드.”
쥬다스는 가벼이 손을 휘저어 정령의 힘을 불러들였다.
꿈틀거리며 용의 표피처럼 진동하는 대지와 허공에서 춤을 추듯 뭉치는 물줄기가 그의 손짓 한 번에 들썩였다.
‘그 몸 상태로도 이 정도 힘을?’
씨익.
검게 죽은 흙이 피 대신 쏟아져 내리는 팔뚝을 덜렁거리며 프리드가 비뚜름하게 입술을 비틀었다.
“그래서? 날 죽이기라도 하려고?”
“…….”
“저런, 아직도 망설이는 건가. 당신의 힘을 빼앗겠다고 말한 나를 보고도?”
크르르.
섬뜩하게 목을 울린 루니가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물의 정령왕이 뿜어내는 살기에도 프리드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이래서 당신이 싫다는 거다. 끝까지 제 손은 더럽히지 않으려들지. 충분히 재앙을 막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서도 말이야!”
“그건.”
“큭큭……. 망할 위선자 노인네 같으니. 진즉에 당신의 말 따위 따르지 말았어야 했어.”
붉은 안광 속에 이글거리는 혐오감과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이를 본 쥬다스는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의지에 따라 부글부글 끓고 있던 물줄기가 순식간에 허공에 얼어붙었다.
“아니, 그건 잘못된 생각이로구나.”
“뭐…….”
푹.
거대한 얼음의 창이 프리드의 가슴을 관통했다. 피 대신 검은 모래가 얼음 창을 타고 흘렀다.
“……?”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제 몸을 꿰뚫은 얼음을 손바닥으로 감싼 프리드를 향해 쥬다스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네가 다루는 사령의 힘이라면 분명 이 정도로 죽지는 않겠지. 지금 그것 외에도 따로 마련해 둔 육신이 더 있을 터이니.”
사령술사란 죽음의 힘을 다루는 자.
한 번 죽은 이를 소생시키거나 영혼이 떠난 육신을 부리는 일이 가능했다.
같은 맥락으로 세월의 흔적을 거슬러 젊음을 되찾은 프리드에겐 제 영혼을 미리 마련한 빈 육신에 옮겨 담는 일 정도야 그리 어려운 술법이 아니었다.
이를 꿰뚫고 있는 쥬다스의 금안이 차갑게 빛났다.
“기다리거라. 다음번엔 내가 찾아가도록 하마.”
경고였다.
확실히 제 손으로 마무리 짓겠다는 옛 동료의 뜻을 알아들은 프리드는 놀라 치켜떴던 눈을 서서히 감았다.
쥬다스, 제국의 1황자. 황조 적통의 외향을 그대로 이어받아 태어난 귀한 혈통의 소년.
하지만 그럴듯한 겉모습과는 달리 그와 얽힌 황실에서는 썩은 내가 진동을 했다.
“……그 모습, 퍽 잘 어울리는군.”
파스슥.
생명력이 다한 육신이 검은 모래로 변해 쏟아져 내렸다. 자리에 남은 흔적이라곤 그가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뿐이었다. 로브 자락에 새겨진 검은 비둘기 위로 죽은 모래가 쌓였다.
어차피 어딘가에 준비해 둔 다른 육신으로 옮겨 눈을 떴을 테지만, 쥬다스는 씁쓸한 시선으로 그가 있던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바닥에 꿇어앉아 손바닥을 대었다.
‘내 손은……. 처음부터 더러웠다.’
사람들의 칭송과 다르게 그는 한 번도 스스로를 깨끗하다고 여긴 적 없었다.
깨끗했다면 부모가 갓난쟁이를 버릴 일도 없었을 것이며, 자신을 찾아와 엎드려 빌던 사람들의 얼굴에 얼룩진 눈물자국도 사라졌을 테다.
등을 돌린 동료들로부터 칼날을 받을 일도, 구렁텅이에서 건진 사람들에게서 원망과 저주의 말을 들을 일도.
또한 스스로 제어하지 못해 폭주한 거대한 힘으로 인해 피를 봤었던 젊은 날의 잔상(殘傷)도 없었어야 했다.
우웅.
정령의 힘이 그 손을 통해 얼어붙은 대지에 스며들었다.
4속성 정령 동조술, 자연계 최상의 힘이 하나로 합쳐졌을 때 그 빛깔은 무엇보다 고귀한 황금색으로 나타난다.
싸늘하게 얼어 있던 대지를 황금빛 기운이 서서히 감싸기 시작했다.
차갑던 얼음 알갱이가 녹고, 퍽퍽한 모래 사이로 작고 뾰족한 사막 식물이 피어오른다.
얼어붙은 오아시스가 녹아 반짝였으며 먹구름이 사라진 하늘에 태양광이 작렬했다.
‘어린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된다…….’
―마찬가지로, 결국 사람은 사람을 배신하는 겁니다.
언젠가 옛 친우로부터 들었던 싸늘한 냉소가 깃발처럼 머릿속에서 흔들거렸다.
바람이 불어왔다.
사막의 뜨거운 햇살을 머금은, 메마른 투르케의 열풍이었다.
* * *
「…….」
깜빡깜빡.
다홍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이 쥬다스의 곁에 붙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사슴 같은 크고 동그란 눈이 자석처럼 그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렸다.
이마에 박힌 붉은 보석과 살랑거리는 하얀 원피스가 그녀가 한 장식의 전부였다.
소탈해 보이면서도 무시할 수 없는 기품을 뽐내고 있는 이 여인은, 다름 아닌 쥬다스가 부리는 정령왕 중 하나인 카니였다.
“……저기.”
흡사 아벨의 표정을 따다놓은 듯한 얼굴로 바이칼이 우물쭈물 눈치를 살폈다.
정작 아벨은 간소한 장례를 치르고 난 후라 슬픔과 피로에 젖어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바이칼은 애꿎은 머리통만 벅벅 긁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쥬다스 님.”
카니는 현재 실체화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기에 다른 이들은 전부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쥬다스의 상태를 보고 기겁했을 뿐이다.
투르케 공동묘에서 애도를 표하고 돌아온 다섯 사람을 기다리던 건 말끔히 녹아 옛 모습을 되찾은 사막의 모습이었다.
거짓말처럼 본래대로 돌아온 마을의 형태에 아벨은 놀라 입을 떡 벌렸다.
그러나 그에 더 놀라워할 겨를도 없이 사막 한구석에 쓰러져 있는 쥬다스의 모습에 일행은 기함하여 그를 임시 병동으로 옮겨왔다.
마침 공습을 받은 지역이라 배치되어 있던 중급 치유술사가 허둥지둥 그를 치료했으나 워낙 피를 많이 쏟은 탓에 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
그러더니 눈을 뜬 이후로 줄곧 한마디도 하지 않고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쥬다스 님.”
“…….”
“아오, 대답 좀 해주시라고요! 당최 어떤 놈한테 당하신 건지 알아야 방비를 하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닙니까?!”
“무례하군, 너. 환자 앞에서 큰 소리로 떠들 거면 나가.”
조용히 지켜보던 크리스티나가 짜증스레 한 소리 했다.
그녀의 일침에 바이칼은 스스로도 무례를 깨닫고 답답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궁금한 건 크리스티나를 비롯해 일행 전체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힐끗 쥬다스의 숙인 머리 위로 시선을 주었다.
‘저 정도로 흔들리셨던 적은 없었어.’
언제나 태연자약하던 황자였다. 머리에 물을 끼얹든, 모욕을 주든 크게 흔들림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화를 내거나 불안에 떠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평소와 달리 자신만의 생각에 푹 잠겨 있다는 건 분명 그를 크게 흔든 묘연한 사건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걱정에 잠긴 크리스티나의 옆에서, 마찬가지 심정인 에단은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
‘실책이다. 곁에 붙어 있었어야 했는데.’
황자가 3속성 정령을 부리는 이능을 가지고 있는 데다, 제국에서 특별히 관리 중인 지역이라 안심한 게 화근이었다.
그가 잠깐 정도는 혼자 있고 싶을 수도 있겠다는 얄팍한 배려심도 이번 상황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침울해져 있는 에단 옆에 자리한 마르젠은 또 마르젠대로 생각이 복잡했다.
‘걸어서 오기엔 척박한 사막. 굳이 험한 환경을 뚫고 올 가치도 없는 멸망한 영지. 원주민은 전멸. 그렇다면 포탈을 이용해서 들어오는 사람뿐이라는 건데, 그 정도 재력을 갖춘 사람이 미쳤다고 루바흐 교복을 입은 학생을 건드릴까?’
적어도 귀족이나 교육받은 재력가는 범인이 아니었다. 마르젠은 감색 눈동자를 가늘게 좁혔다.
‘……질 나쁜 녀석이 있었다는 건데. 정령술사이신 쥬다스 님에게 해를 끼칠 수 있을 수준이라면.’
그가 짐작하기로 어쩌면 투르케 사막을 전멸시켰던 그 사령술사와 대면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만일 그랬다면 쥬다스가 지금 살아 있는 게 더 이상했다.
‘단순히 어중이떠중이에게 급습을 당했든지, 아니면 역시 쥬다스 님이 가진 능력이 상상 이상일 가능성도 있겠지.’
어떤 결론이든 간에 마르젠은 쥬다스가 가지고 있는 힘 전부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음을 확신했다.
지금껏 그가 밟아온 행적을 되새김질해 본다면 저 영리한 1황자는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 자신의 패를 보이지 않고 철저히 숨기는 일에 익숙했다.
아마 아직도 그는 드러내지 않은 패가 몇 가지 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그 패를 이용해서 습격해 온 적을 상대했고 보란 듯이 살아남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마르젠은 특별히 걱정하지 않고 만족했다. 그런 철저한 자기 대비를 할 줄 아는 황자가 쉬이 무너지지 않을 거란 믿음이 생긴 탓이었다.
「끄응.」
무거운 분위기는 정령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니는 한숨을 폭 내쉬며 쥬다스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머리 위에 자리 잡은 토니도 답지 않게 침묵했으며 침대 밑에 엎드린 루니는 심기 불편한 얼굴로 귀만 까딱이고 있었다.
그들의 계약자가 느끼는 감정은 지금도 여과 없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가슴을 꽉 조여 오는 답답함을 전달받은 카니는 원피스 자락을 구겨 잡으며 우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저…….」
“으음, 시간이 늦었구나.”
핫.
움찔 고개를 든 카니는 쥬다스가 자신이 아닌 인간 아이들을 보고 말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어느덧 밤이 깊어 창밖이 어두컴컴했다.
“생각할 것이 많아 집중하다 보니 너희에게 폐를 끼치게 되었구나. 자, 다들 일어나련. 이만 휴식을 취해야 하지 않겠누? 내일 아침 다시 움직이려거든 말이다.”
“……내일 바로 움직이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에단이 걱정스레 묻자 쥬다스는 창백한 얼굴 위로 평소와 같은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허허, 거뜬하이. 한숨 자고 나면 말짱할 게야.”
바로 조금 전까지 넋을 빼고 있던 것에 비해 거짓말처럼 빠른 회복이었다.
평소와 다를 것 하나 없는 눈빛과 태도에 일행은 마음을 놓으면서도 병실을 나서길 망설였다.
부상을 입어 따로 병실 신세를 지고 있는 쥬다스와 달리 나머지 일행은 병동에 마련된 간이 객실에서 하루를 묵을 예정이었다.
축객령 아닌 부드러운 축객령에 하는 수 없이 간호석에서 일어선 일행은 주춤거리며 병실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자리를 떠나던 크리스티나가 힐끗 쥬다스를 돌아보았다.
빙긋.
어른스러운 미소와 정통으로 마주하고만 크리스티나는 움찔 문고리를 잡은 손을 멈추었다.
찰나의 망설임이 바닷빛 눈동자를 흔들었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너무…….”
“으음?”
“너무 완벽해 보이는 게 더 불안합니다.”
“…….”
“……저희에겐 걱정할 틈도 안 주시는 것 같으니까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병실 문이 닫혔다.
침대에 앉아 있던 쥬다스는 이내 고개를 돌려 일행이 있었던 자리를 눈으로 훑었다.
사람의 온기가 남은 구겨진 의자 방석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그의 뺨을 따뜻한 손바닥이 감쌌다.
인간의 온기와는 달랐지만 그와 다른 온도의 따뜻함을 품고 있는 손이었다.
「이그레트.」
확인할 필요도 없이 익숙한 목소리였다.
동시에 그와 정령은 같은 말을 내뱉었다.
“미안하구나.”
「미안해요.」
눈을 동그랗게 뜬 카니가 곧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처럼 웃었다.
「설마 나를 붙잡아 이용하겠다는 미친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그저, 눈앞에 찾아온 그 망할 놈의 소환진을 보고 누굴까 호기심이 생겨서.」
순수하고 여려 보이는 외형과 달리 불의 정령왕 카니는 은근히 입이 험한 편이었다.
「그랬는데, 내가 이그레트를 공격하다니.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게 너무 무서워요.」
정령왕인 그녀가 공포를 느낀다. 이는 가히 처음 있는 일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카니는 사령에게 잠식당해 이지를 잃었던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했다.
파르르 떨리는 날개깃을 스스로 감싸 안으며 그녀가 계속 말했다.
「나, 어쩌면 이그레트의 정령으로 계속 남아 있을 자격이 없을지도 몰라요.」
“카니.”
「근데도요.」
사랑, 우정, 소유욕, 그 모든 것이 뒤섞인 애정이 오로지 단 한 명을 향했다.
자신이 그를 상처 입힐 뻔했다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카니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게 반응했다.
「……그래도 곁에 있고 싶어. 미안해요, 나. 추잡스럽게 욕심만 부려서…….」
그리고 오랜 세월 그와 함께해 온 정령으로서, 그가 결코 자신들을 버리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는 그런 인간이었다. 한 번 믿음을 준 이에게는 밑도 끝도 없이 신뢰와 애정을 보였다.
만일 그 대상이 배반을 할지라도, 찔릴 줄 알면서도 기꺼이 등을 내어준 사내였다.
사랑하는 이가 내어주는 잔이라면 독이 든 잔마저도 달게 마실 수 있을 맹목적인 신뢰였다.
그리고 그의 그런 점은 정령들이 가진 성향과 매우 흡사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지금은 또 거의 말짱합니다. 치유술사 버금가는 빠른 회복력(...)
독한 감기로 고생하시는 독자님들도 계시던데...ㅠㅠ 얼른 나으시길 바랍니다!
아참, 지지난 화에서 묘사는 짧았지만 쥬다스와 프리드는 1:1상황으로 마주쳤습니다.ㅎ 나머지 일행은 투르케 공동묘로 이동하여 애도를 표하고 있었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선 전혀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애정과 응원에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팬아트로 주인공을 그려주신 디스이즈님,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ㅠㅠ 조만간 표지로 사용하겠습니다...!(수줍))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